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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리]연의바다미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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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하야,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아무래도 내가 같이 가는 게 낫겠다.”

    연하는 핸드폰을 꺼내려는 우진을 얼른 말렸다.

    “괜찮아요, 우진씨. 오늘 반나절 뺀 것도 얼마나 무리한 건데요. 늦기 전에 빨리 들어가 봐요.”

    집까지 따라오겠다는 우진과 외삼촌 부부를 돌려보낸 연하는 집에 들어서면서 이제 이 좁은 공간을 나눠쓰던

    어머니라는 사람이 영영 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절감했다.

    화장한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는 내내 독하단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얼굴이 온통 젖어들었다.

    자신이 어떤 굴레를 갖고 태어났고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 순간부터 어머니란 사람을 지긋지긋하게

    미워했다. 반항도 많이 했고 또 가슴에 못을 탕탕 박는 소리도 일부러 해댔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내와 자식이 있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고 그가 남긴 흔적을 뱃속에서 긁어낼

    배짱도 없었던 어머니란 여자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는 만큼

    그걸 누르기 위해 더 모질게 굴었건만 그런 마음조차도 의미가 없어졌던 것은 언제였을까?

    의사가 되고 싶었다. 돈 없고 소위 백 없는 그녀로선 돈과 나름대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전문

    직종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공부했지만 노력으로 되는 것과 현실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멀리 지방에 있는 의대에 지원해 그럭저럭 합격을 기대할 정도의 성적은 되지만 의대 공부를 따라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교대를 가라는 선생님과 어머니의 말을 물리치고 반항하듯

    간호대에 원서를 넣었고 확실한 하향 지원 덕분에 당연히 합격했다.

    학비가 싼 국립 간호대에 차석 합격을 확인하던 날 축하해주는 엄마에게 이왕이면 한 재산 뜯어낼 수 있는

    남자를 잡지 땡전 한 푼 보태줄 능력도 안 되는 못난 인간하고 눈이 맞아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가게 하느냐고

    퍼부었던 말이 갑자기 가슴을 뜯어내는 것 같았다.

    대학에 가고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엄마와 화해를 하긴 했지만 다 풀지 못했던 일들. 엄마에게 던졌던 수많은

    말의 화살들이 부메랑이 되어 이제 자신에게로 쏟아져 돌아오고 있었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 연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서랍이란 서랍을 다 끄집어내고 온 방을 홀랑 뒤집으면서 대청소를 시작했다.

    내친 김에 이사 온 뒤 한번도 치우지 않았던 작은 벽장까지 진출한 연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낡은 티가

    줄줄 나는 커다란 종이 박스를 하나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손에 시커멓게 묻은 먼지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박스를 내려 너덜거리는 테이프를 뜯어내 내용물을

    보자 겨우 진정됐던 눈물샘이 다시 터져 나왔다.

    연하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림일기장과 상장, 성적표와 온갖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 그 흔한

    포장이사 한번 못해보고 방값이 싼 산동네만 찾아 그렇게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도 이것들이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듯 차곡차곡 모아 끌고 다닌 엄마의 손길에 그녀는 다시 한번 상실감에 몸부림쳤다.

    “엄마.... 엄마.... 엄마....”

    그렇게 부르면 꼭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불러대면서 숨이 막혀 가슴까지 치면서

    한참을 다시 꺽꺽거리고 울다 지친 그녀는 엄마의 보물단지를 미련 없이 버릴 것을 모아

    놓는 쪽으로 옮겼다. 무거운 박스를 낑낑거리며 들어올리던 순간 낡은 테이프로 유지되던 밑이

    빠지면서 박스 속 물건들이 우르르 바닥에 흩어졌다.

    “아얏!”

    발등을 강타하는 또 하나의 플라스틱 상자에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었던 상자를 내던지고 연하는 다시 주저앉았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예전에 한참 유행했던 플라스틱으로 된 어린이용 보석함. 연하는 떨어지면서 그나마 덜렁거리던 뚜껑이

    깨져버린 보석함을 걷어차는 걸로 화풀이를 대신하던 연하는 커다란 딱정벌레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장식이란 것을 발견하고 그날 처음으로 피식 웃으며 그

    새파랗고 정교한 딱정벌레를 손에 집어 올렸다.

    “이건 어디서 난거지? 본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너무 지쳐서 생각하기도 싫어진 연하는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널 부러져 있자 엄마를 보낸

    사흘간과 떠나보낼 준비를 하던 1년간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왔고 어는 순간 전원이 픽 끊긴 것처럼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꿈속의 그녀는 17년 전. 보령의 외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던 6살 어린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6살이 되던 그해 여름. 연하는 늘 함께 놀던 동네 아이들에 의해 자신이 사생아, 아이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야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막내 외삼촌이 준 몇 백 원을 쥐고 동네 가게에 달려간 그녀는 평상시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초콜릿이 가득 뒤덮인 꿈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었다.

    그 하드를 손에 쥐고 연하가 가게 앞으로 나왔을 때 동네 아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연하에게 잘

    보여 한입이라도 얻어먹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불량식품에도 굶주렸던 연하는 모처럼 손에 쥔

    권력에 도취되어 평소에 밉게 봤던 아이들 앞에서 한껏 뽐내며 친했던 친구들에게만 인심 좋게 한입씩 맛을 보게 해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미웠던지 한입 먹어보자는 입질을 매몰차게 거절당한 학교 선생님 딸인 주희가 연하에게 대뜸 말했다.

    [후레자식 주제에.]

    [후레자식?]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연하가 반문하자 주희 역시 그게 나쁜 소리란 것은 알았지만 뜻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그렇듯 뜻을 몰라도 듣고 그대로 외워 전하는 재주는

    있는지 대뜸 어른들이 하던 얘기를 그대로 옮겼다.

    [넌 아빠도 없잖아. 네 엄마는 결혼도 안했대!]

    [뭐? 우리 아빠는 미국에 돈 벌러 갔어.]

    [거짓말이래. 너희 아빠는 너랑 너희 엄마 싫다고 멀리 도망갔대.]

    하드를 못 얻어먹은 축에 속해 연하에게 역시나 반감을 느끼고 있던 아이들이 주희의 말에 바로 가세를 했다.

    [얼레꼴러리. 연하는 아빠도 없대요.]

    [연하아빠는 연하가 싫어서 도망갔대요, 도망갔대요.]

    [너희 다 거짓말쟁이야! 우리 아빠는 정말로 미국에 있어. 나빠.]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하드를 한입 얻어먹은 죄로 엉거주춤 말없이 있는 아이들을

    제외한 다수는 주희 편에 가세해 연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굳이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바락바락 성을 내는 연하가 재밌어서, 그리고 하드를 갖고 유세떠는 모습이 얄미워서

    시작된 아이들의 합창은 기어이 연하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다.

    아이들의 놀림을 뒤로 하고 바닷가로 뛰어간 연하는 한적한 곳을 찾아 달리고 또 달렸다. 아이들의 놀림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조용한 곳에 오자 그런 와중에서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녹아내리는

    아이스 바를 인식하고 한입 베어 물었다.

    [우리 아빠는 미국에 있다구. 할머니가 그랬어. 엄마는 서울에서 돈 벌고 있고.]

    듣는 사람도 없건만 혼자 중얼거리던 연하는 바로 옆에서 훌쩍이고 있는 낯선 남자 아이를 발견했다.

    짧은 치마 같은 이상한 수영복을 입고 있는 남자 아이는 우습게도 구슬을 주렁주렁 엮어 만든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훌쩍거리고 있는,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 때문에 연하는 자기가 울고 있었던

    사실도 잊고 그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아직 조금 이르지만 해수욕을 하러 온 외지 아이구나 생각한 연하는 자기보다 조금 작은 아이에게 잘난 척을 하며 물었다.

    [너 엄마 잃어버렸니? 경찰 아저씨한테 갈까?]

    연하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지 그 아이는 깜짝 놀라며 연하를 보더니 성난 어조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랗게 쌍꺼풀이 진 황금색 눈동자. 갈색기가 도는 곱슬머리. 연하는 이

    아이가 TV에서만 보던 미국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헬로? 나 영어 한다~ 너 한국말 못하니?]

    대답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방방 뛰며 화를 내며 더 알아듣지 못할 소리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눈에 가득한 눈물과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은 이상하게 6살 연하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 평소

    그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했다. 연하는 본격적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하드를 남자 아이에게 불쑥 내밀었다.

    [먹어봐. 맛있어.]

    조금만 덜 놀랬다면 분명히 바닥에 내팽개쳤겠지만 얼굴 앞으로 쑥 내민 하드를 얼떨결에 한입

    받아 문 그 아이의 표정이 묘해지더니 그야말로 지상 천국을 발견한 듯한 얼굴로 변했다.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다시 한입 베어 무는 아이를 보자 연하는 흐뭇해졌다.

    [맛있지? 미국엔 맛있는 게 많다던데 이건 없어?]

    대꾸도 없이 아예 손에서 하드 막대를 뺏어가 먹는 남자 아이를 보며 내심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하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동화를 떠올리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를 상대로 혼자 종알거렸다.

    [미국에 우리 아빠도 있는데. 우리 아빠 돈 많이 벌면 선물도 사오실거야.]

    그야말로 씻어낸 듯이 막대에 묻은 초콜릿의 마지막 한 얼룩까지 말끔히 먹어치운 아이는 아까와 달리

    훨씬 상냥해진 어조로 연하에게 뭐라 뭐라 말했다.

    [나 미국말 못해.]

    [@@#%&&)*&&*(*()%#]

    못 알아듣겠다는 표시로 연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몸으로 하는 표현과 표정은 만국 공통어인지

    남자 아이 역시 연하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피차 서로 보이고 싶지 않은 엉엉 우는 모습도 보였고 또 아이스크림까지 나눠먹은 처지라 말이

    필요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한바탕 울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면서 각자 속상했던 것이

    많이 수그러들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연하는 바다를 보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나보고 후레자식이래. 나쁜 말인 것 같아서 화가 나. 너희 아빠도 미국에 있니?]

    남자 아이 역시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 연하가 편한 듯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가 너무 슬퍼 보여서 연하는

    할머니 집에 올 때면 엄마가 해주듯 남자 아이를 꼭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쪽 해줬다.

    [힘 내. 이렇게 안고 뽀뽀를 하면 힘이 난대. 우리 엄마가 그랬어.]

    연하의 갑작스런 행동에 몸을 굳히던 아이는 연하의 조그만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때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우는 남자 아이를 보며 공연히 슬퍼진 연하도 같이 엉엉 울었다.

    [연하야~ 연하야~ 어딨니? 연하야!]

    바다가 평소와 달리 너무나 잔잔하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엉엉 울던 연하는 아련히 들리는

    외삼촌의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들어 벌떡 일어섰다.

    [삼촌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연하에 밀려 벌러덩 주저앉은 아이는 연하가 가는 것이 싫은지 연하의 반바지

    자락을 잡았지만 모처럼 휴가 나온 삼촌과 놀 궁리에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삼촌이 배 태워준댔어. 내가 삼촌 데려올게.]

    연하를 따라 잽싸게 일어나 뭐라고 명령조로 외치는 아이를 뒤로 하고 연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삼촌을 부르며 달려갔다.

    [삼촌~]

    “삼촌...삼촌..”

    자기 목소리에 놀라 잠깐 든 토끼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아직 반쯤은 멍한 가운데 연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며 무의식처럼 정교한 딱정벌레를 집어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 파란 벌레를 응시하던 그녀는

    충동적으로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풀어 딱정벌레 펜던트의 고리 사이에 끼워 목에 걸었다.

    ‘엄마. 엄마의 보물단지에서 발견한 거니까 이건 내 마스코트로 갖고 있을게.’

    휴가를 끝내고 복귀한 날 연하는 ‘앞으로 평생 괜찮지 않을 테니 괜찮으냐는 말은 절대 물어보지 마세요.’ 라는

    팻말이라도 머리 위에 써 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애써 적당한 슬픔과 감사를 담은 미소를 뿌리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차라리 야간 근무였다면 이렇게 사람들과 얼굴을 많이 대하지 않았을 텐데. 배려하는 차원에서 주간조로 넣어

    복귀시켜준 친절한 수간호사를 원망하면서 연하는 근무를 마치자마자 탈의실에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곱게 쉴 팔자는 아닌 하루인 듯싶었다. 막 전철역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낯선 번호에

    망설이던 연하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오연하씨?”

    “네, 그런데요...?”

    귀에 익지 않은 여자 목소리에 뜨아했지만 분명 자신이 오연하가 맞았기에 인정했다. 그러자 약간 주춤거리던

    상대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난... 그러니까 김우진 어머니 되는 사람이에요. 연하씨를 만나러 왔는데 지금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더할 나위 없이 교양 있게 부탁하는 말투였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강압적인 톤이 그녀의 조용한 말속에

    실려 있었다. 모르는 번호는 무시하던 평소 습관과 달리 전화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연하는 비교적 깔끔하고

    찾기 쉬운 의료원 근처 커피 전문점의 상호를 불러줬다.

    우진의 어머니 역시 그곳을 아는지 커피숍의 이름을 듣자마자 연하가 말한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끊긴 핸드폰을 쥐고 연하는 그냥 이대로 계단을 내려가 집으로 가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간호대 2학년 때 의료원으로 실습 나와 우진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이 3년 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세상에

    자기가 제일 잘 난줄 아는 외과의 중에서 우진은 드물게 섬세하고 친절해서 환자들은 물론 간호사들에게도 인기가 최고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벽을 쌓는 것이 습관이 되어 사람들 간의 감정에 둔감한 편인 연하는 그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관심이 있으리란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의료원에 취직해 수술실 전문 간호사로 운 좋게 발탁되어 근무 후 교육을 마치고 나오던

    어느 날 저녁 우진이 지금 시간이 있냐는 말을 처음 했을 때 연하는 급히 보조할 인력이 필요한가 보다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데이트를 시작한 것도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갑작스런 발병으로 수술실 전문 간호사를

    관두고 외과 병동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도 당연히 멀어지리라 생각했던 우진은 그녀의 곁에 있어줬다.

    그리고 손쓸 수 없이 악화되어가는 뇌종양과의 힘겨운 싸움을 옆에서 함께 지켜준 우진과의 시간이 쌓이면서

    이 사람이라면 아버지로 대표되는 지긋지긋한 남자들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연하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는 작은 꿈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진의 가족이 어떻게 받아들여 줄지에 대한 자신은 없었기에 감히

    그에게 결혼이란 말도 입에 담지를 못했고 우진 역시 결혼하자거나 하는 얘기를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우진 어머니의 방문. 결코 우호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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