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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즌]필로우토크 3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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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시즌 - 필로우토크 3

    Scene 12. 손과 손을 맞잡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실 불부터 켰다. 손수 욕실 문까지 열어주며 아직 현관에 서 있던 차일주에게 권했다.

    "우선 좀 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일주는 흠뻑 젖은 상태였다. 어디에서부터 걸어온 건지, 얼마나 비를 맞은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옷부터 갈아입혀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나 차일주는 꼼짝하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손끝으로 연신 빗방울이 모여들어 뚝뚝 떨어지는데도 미동이 없다. 눈은 멍하니 뜨고 있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그렇게 계시면 감기 걸립니다."

    차일주를 지켜보던 의현이 거듭 설득했다. 얼굴에서는 어쩐지 초조한 기색마저 묻어났다. 그럼에도 차일주는 의현을 물끄러미 볼 뿐, 움직이지 않는다. 공연히 전전긍긍하던 의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금세 돌아온 그의 손에 큼직한 샤워타월이 들려 있었다.

    타월을 양쪽으로 넓게 펄쳐들고 차일주에게 다가갔다. 이내 그것으로 차일주의 젖은 얼굴을 가만히 감싼다. 차일주는 두 눈을 감으며 잠자코 제 얼굴을 맡겨두었다. 그의 속눈썹에 맺힌 작은 빗방울이 눈에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의현은 돌연 호흡이 빡빡해짐을 느꼈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차일주의 얼굴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꼼꼼히 닦아준다. 의현의 손길이 얼굴에서 목으로, 어깨로 분주히 옮겨진다. 차일주는 눈을 떠 그 움직임을 고요히 좇았다. 그러다가도 시선은 물기 제거에 여념 없는 의현의 얼굴로 단번에 옮겨졌다.

    그것도 모른 채 의현은 차일주의 팔을 열심히 훔쳐냈다. 이내는 빗방울이 고여 뚝뚝 떨어지는 손끝으로 눈길이 향한다. 순순히 손을 내어줄 만도 하련만 차일주는 그저 동상처럼 서 있었다.

    의현 역시 손을 달라 청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 상체를 살짝 숙여 젖은 손을 닦아줄 뿐이다. 잠자코 지켜보던 차일주가 문득 타월로 손을 뻗어왔다. 얼결에 손과 손이 맞닿는다. 느닷없는 접촉에 의현이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손을 내뺐다.

    그 찰나에 눈이 마주쳤다. 의현을 지그시 보는 차일주의 눈동자는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비를 많이 맞은 탓인지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선 핏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전히 흠뻑 젖은 하의는 계속해서 발밑으로 물웅덩이를 만든다.

    "옷, 갈아입으셔야 되는데....."

    고이는 물을 보던 의현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위기에 처한 것은 차일주인데 도리어 그가 안절부절못했다. 차일주는 좀 더 그렇게 서 있다가 젖은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잠자코 욕실로 들어가자 의현이 서둘러 문을 닫아준다. 제 젖은 양말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한참 서랍을 뒤져 차일주가 입을 만한 옷들을 추려냈다. 반듯하게 접힌 옷을 들고 일어서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가만히 옷자락에 코를 대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역하지 않고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 의현은 그 옷을 욕실문 앞에 조용히 내려놓곤 당부했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에 두겠습니다. 전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씻으세요."

    안에서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물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차일주가 불편해할세라 의현은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었다.

    침실로 간 그는 한동안 켠 적 없던 보일러를 돌렸다. 온도가 제대로 오르고 있는지 시시각각 방바닥을 짚어보며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를 떠올리곤 제 휴대폰을 찾는다. 통화목록의 가장 상단을 차지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휴대폰 저편에서 상대방의 음성이 들려왔다. 충분히 그쪽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함께 딸려오는 주변 소음이 상당하다.

    "한 실장님, 정의현입니다."

    [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저희 집 근처에서 일주 씨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욕실에서 씻고 계십니다."

    [그래요? 상태는 괜찮던가요?]

    "비를 좀 맞으셨는데, 그것 외에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씻고 나오시면 일단 저희 집에서 쉬게 해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일주 씨 어디 못 가게 잘 붙잡아 두세요. 이곳 일 마무리되는 대로 내가 직접 데리러가겠습니다. 혹시 괜찮으면 이쪽으로 전화 한 통 달라고도 전해주고요. 부탁 좀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의현은 용건만 전달한 뒤 무엇엔가 쫓기듯 분주한 한 실장을 놓아주었다. 통화를 끝냈을 즈음,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욕실에서부터 비어져 나온 뿌연 수증기 구름이 보였다. 잇따라 밖으로 나온 차일주의 모습도.

    의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세 차일주와 눈이 마주친다. 흠뻑 젖은 그를 발견했을 땐 서둘러 씻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그 일이 끝나니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일주도 특별히 요구하는 바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차일주는 대꾸가 없었다. 그저 몸을 살짝 틀어, 의도치 않게 막고 있던 의현의 앞길을 터주었을 따름이다.

    그를 지나쳐 주방으로 간 의현은 서둘러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몸을 따뜻하게데워줄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 한참 찬장을 뒤진다. 곧 그의 손에 율무차 두 포가 딸려 나왔다. 의현은 그것을 하나의 머그에 모두 부었다. 물은 한 잔 분량만 넣어 진한 차를 만든다.

    "드세요."

    의현이 머그를 식탁 위로 옮기며 권했다. 머그의 손잡이도 자신의 맞은편으로 살짝 돌려놓는다. 차일주는 순순히 의현이 의도한 자리로 와서 앉았다. 하얀 김을 피워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긴 숨을 뱉는다. 차가웠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모양이었다.

    "......."

    "......."

    잠시 적막감이 맴돌았다.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올 만큼. 난생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주변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진다. 의현은 밑으로 내려잡은 제 손을 습관처럼 조물거리며 적당한 말을 찾았다. 그 부단한 노력을 눈치챈 것일까. 율무차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던 차일주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여자와 호텔에 갔던 건 사실이니까."

    예상 밖 고백에 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사에 실린 사진까지 확인해 놓고도 생경한 이야기를 들은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동요하는 모습을 들킬까, 의현은 다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몰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차일주가 의현 씨, 하고 그를 부른다. 전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어조였다. 단지 그렇게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독여지는 듯하다. 고개를 들자 그는 제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만히 두드리며 권했다.

    "이리로 와서 앉아요. 할 말 있으니까."

    그의 말에는 강제성이 없다. 그럼에도 늘 거역하기가 어렵다. 이번에도 의현은 잠자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차일주는 식탁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며 잠시 말을 골랐다. 하려는 이야기가 많아 순서를 정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의현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얼마 후 차일주가 의현을 똑바로 보며 운을 뗐다.

    "의현 씨한테 제대로 못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의현은 예의바른 학생처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준비가 됐다. 그제야 좀 안심한 듯 차일주가 덤덤하게 화두를 꺼낸다.

    "내 부모에 대한 얘깁니다."

    이어진 말에 의현은 영문 모를 표정을 했다. 박 감독과의 관계 외에 달리 더 밝힐 일이 있는 걸까. 의현의 얼굴에서 그 의문을 포착한 차일주가 나직이 웃는다.

    "그 전에 의현 씨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저요?"

    "왜 의현 씨한테 잘해주느냐고, 물었던 적 있죠?"

    "...아, 네."

    "내가 했던 대답도 기억납니까."

    기억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의현은 차마 당시 차일주가 했던 말을 입에 담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즉시 차일주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처음에 눈이 갔던 건 의현 씨가 나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서였습니다. 자만할 생각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날 대하는 반응은 한결 같았거든요. 내가 그들에게 보여주길 기대하는 모습도 모두 똑같았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들이 흔히 토로하는 고달픔이다. 뭇사람들은 특정인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씌우고 그에 맞는 언행을 기대한다. 그 기준점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설사 그것이 그릇되거나 잘못된 행동이 아니어도 제멋대로 실망하곤 하는 것이다. 차일주 또한 그러한 기대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였다.

    차일주는 의현과 처음 만났던 상황을 회상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피식 웃는다.

    "...그랬는데 의현 씬 처음부터 달아날 궁리만 했었죠. 혼자 술 마시기 싫어서 한잔 권했더니 마지못해 앉기나 하고. 정말이지, 된장찌개에 밀린 건 처음이라서, 의외로 내가 남이 띄워주는 걸 좋아했던가 봐요."

    장난기 어린 말에 공연히 의현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차일주는 그에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뒤로 의현 씨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더 관심이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순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선 인상이 확 바뀌는 게 신기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 생각한 건 좀 더 나중이었어요. 정확하게는 의현 씨의 지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때 의현씨하고 내가, 참 많이 닮았다고 느꼈거든요."

    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차일주를 봤다. 의아함이 그의 눈동자 한가득 일렁였다. 차일주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그를 지그시 마주봐왔다. 누가 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그런데 어디가 어떻게 닮았다는 걸까. 차일주의 말뜻을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차일주는 곧 부연하며 의현의 의문을 일말 해소시켜 주었다.

    "처한 상황은 닮았지만 그걸 감내하는 방법은 전혀 달랐죠. 난 그러지 못했는데, 의현 씨는 과거의 일들을 모두 담담히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결국에는 극복한 것 같아서 놀랐습니다. 정말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닙니다, 저는....."

    차일주느 고개를 저으며 의현의 말을 잘랐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을 깎아내일 필욘 없어요. 의현 씨를 만나고 처음으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으니까. 힘들었던 일들은 지나간 시간에 흘려보내고 더 이상 과거로 인해 고통스럽지 않게 됐을 때, 의현 씨에게 덤덤하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의현 씨가 내 얘길 듣고 잘했다고, 장하다고 해주면 정말 완전히 극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그런데... 상황이 도와주질 않는군요."

    "......"

    "기사, 봤죠?"

    "네."

    의현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자 차일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가 이렇게 갑자기 의현을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 어떤 모습을 보고 어떻게 오해하건 상관없습니다. 아니, 한때는 두려웠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그런데 의현 씨까지 그렇다고 하면 그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아직은 털어내지 못한 오래 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무조건 믿어달란 말보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고 싶어졌어요."

    차일주가 두 눈을 온전히 맞춰왔다. 의현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린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한 탓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았다. 그로 인해 차일주의, 미처 털어내지 못했다던 오랜 상처가 다시 헤집어지는 건 아닐지. 그러나 오랜 고민 끝에 찾아왔을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차일주는 얕은 한숨을 뱉었다. 곧 다시 입을 연 그는 비로소 예고했던 부모의 이야기를, 나아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에, 촉망받던 여배우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도, 집도 없는 천애고아였는데 방직 공장에 취직이 결정되면서 상경하게 됐죠. 그 길에 우연히 방송 제작자의 눈에 들었고 데뷔하게 됐습니다.

    연기 경력은 전무했지만 신선한 마스크라 바로 주연을 따냈던 모양입니다. 운 좋게 그 드라마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그녀가 잇따라 출연했던 영화도 유례없이 흥행했습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죠.

    그렇게, 대중들에게 차츰 얼굴을 알릴 무렵이었을 겁니다. 스폰서 제의가 들어왔던 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유명하다 싶은 여배우 치고 재벌과 얽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뒤를 봐줄 든든한 백이 있지 않고서야 정글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어려웠겠죠."

    연예계의 뿌리 깊은 악습이 언급됨에 돌연 숙연해진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내 모르는 척해왔던 일이다. 기실 연기에 대한, 음악에 대한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빛을 볼 수 없는 치열한 세계다. 의현 자신도 차일주의 눈에 들지 않았다면 여전한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게 자명했다.

    이 세계에서의 성공은 악마와의 거래를 전제로 한다. 하나를 얻는 대신 다른 하나를 내주어야 하고, 유명해지는 만큼 추락의 위험도 따라붙는다. 몸담고 있는 누구도 그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차일주도, 그리고 의현 자신도. 연기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진즉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를 길이다.

    의현은 물끄러미 차일주를 응시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그는 꼭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전혀 감정적 동요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어질 이야기의 행방을 짐작하지 못했다.

    "기댈 곳 없던 시골 아가씨는 그 검은손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처음으로 맛본 인생의 달콤함을 떨쳐내기가 어려웠겠죠. 남자와 만날수록 여배우는 승승장구했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 뱃속에 원치 않는 생명이 잉태될 때까진 그랬죠.

    막연하게 언젠가는 끊어야 할 관계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리도 갑작스레 그 순간이 오리라곤 남자도, 그 여배우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설마.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박 감독에 대한 기억이 생각의 진전을 막았다. 분명히 박 감독과 차일주는 부자지간이라 했었다. 이야기 속 두 사람과 차일주를 연관 지을 수 없는 이유다. 그에 대한 의문은 곧 이어진 차일주의 이야기를 통해 풀려나갔다.

    "가정이 있는 일류 기업인과 어린 여배우의 염문설은 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누구도 그걸 원치 않았죠. 눈치껏 아이를 떼기에 여배우는 너무 철이 없었어요. 남자 입장에서도 어쨌거나 제 핏줄이라는데 죽여 없애는 게 찝찝했을 테고. 그래서 남자는 아이와 여배우를 뒤끝 없이 처리할 방법을 떠올립니다.

    당시 작품성 있는 영화를 기획하고도 투자금 때문에 번번이 제작에 고배를 마신, 영화에 대한 열의가 남다른 영화감독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에게 제안을 한 거죠, 그가 원하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주겠다, 단 하나만 해주면 된다."

    "....그런."

    묵묵히 듣던 의현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놀란 표정에 설마, 하는 불안감이 선명하게 배여 있다. 의현의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차일주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젊은 감독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곧장 여배우와의 결혼을 발표했죠. 그리곤 미국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며, 도망치듯 그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여배우 뱃속의 아이는 당연히 그의 핏줄인 걸로 둔갑했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던 여배우는 회사 사장이, 매니저가, 남자와 젊은 감독이 하는 말만 믿고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줬을 겁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무사히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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