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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바겐] 여왕의 기사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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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바겐] 여왕의 기사들

    현재는 구전 되지 조차 않는 태초의 전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하늘이 갈리고 땅이 솟은 날 다섯 색상의 비가 내렸다. 처음에 내린 붉은색 비는 여왕의 피와 살을 주조했으며, 두 번째 내린 노란색 비는 그녀의 척추와 뇌에 양분을 공급했다. 세 번째 내린 녹색 비는 그녀에게 숨과 생명을 내렸으며, 네 번째 내린 푸른색 비는 그녀의 주변으로 맑은 공기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리고 싱그러운 하늘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내린 검은색 비는 그녀의 영원한 그림자 심복을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폴버튼 대제국의 여왕, 칼로르포나 세인트 빈이다.]

    수십 개의 신화가 파생된 그녀의 전설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는가.

    명석한 두뇌와 현명함 그리고 지혜를 지닌 이라면 알 것이다.

    검은색 비는 그녀의 그림자를 만들지 않았다.

    만들어진 것은 그림자 같은 ‘심복’일 뿐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태초의 세상을 구성한 여신, 빈 여왕의 설화와 전설보다도 그녀를 위해 몰려든 이들을 말이다. 내 이야기를 적은 책은 분명히 그녀의 24대 손녀이자 현 폴버튼 제국의 여왕인 제시리안의 손에 의해 파기될 것이다. 만의 하나 그녀의 변덕으로 책이 불살라지는 모독을 피한다 할 손, 빨간책이 되어 제국도서관의 지하실에 내팽개쳐질 운명은 분명하다.

    그러니 운좋게 이 책을 접한 당신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두 번 다시 이 책을 찾아 읽었던 내용을 확인하려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소중한 독자가 금서를 읽었다 하여 교수형을 당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대가 폴버튼 제국의 비밀 기사단에게 붙잡혀 참수 당하는 일이 없도록 어두운 지하실, 밀랍 양초 하나에 의지하여 이 책을 읽길 권고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여왕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여왕의 기사들], 하일 리폰, 제국력 298년 늦은 봄에.

    “네 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 줄 알아?”

    “물론 알지. 여자 아닌가.”

    “그 여자만 밝히는 대가리부터 분리하는 거야.”

    따사로운 봄빛 아래, 뜰 안을 거닐던 남자 중 하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며 말했다. 부웅, 대기를 가르고 날아온 검 날은 그의 옆을 함께 걷던 이의 목을 정확하게 겨누었다. 햇빛에 반사된 날카로운 검 끝이 목젖을 눌렀다. 하지만 검살 위협을 당하는 남자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두려움은커녕,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지 않는다. 그는 검날을 없는 것 취급했다.

    “성기부터 분리한다는 소리는 아니어서 다행인가?”

    소리를 죽여 웃음을 뱉은 이는 검날을 피하는 대신,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손목을 잡고 근육을 비틀자 남자의 얼굴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씨발. 원한다면 그 좆부터 잘라버릴게. 아랫도리 바람난 새끼야.”

    “아하하하하. 여자가 없어서 심술 내는 건가, 아님 나한테 실력으로 안되니깐 화풀이 하는 건가?”

    “니미럴. 둘 다다.”

    우악스럽게 손목을 비틀던 손을 떼자 상대는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툴툴 거리면서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하트 로버.

    지난달에 생일이 지나면서 만 19세가 된 청년.

    폴버튼 제국 학교의 두 번째 가는 검술 실력자이자, 교복 위에 여왕의 장미 코사지를 꽂을 수 있는 두 명 중 하나이다. 폴버튼 제국의 지도자는 제시리안 세인트 빈으로 이제는 신화가 되어 국교의 일원으로 자리잡은 칼르로포나 여신의 스물 네 번째 후손이다. 아름다운 백금발과 맑은 하늘의 태양을 닮은 백금색 눈동자는 그녀의 신비로움을 부곽시키며 연약함보다도 강인한 통치자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마흔이라는 불혹의 나이에도 외양만큼은 스무살 초반 못지 않은 아름다움은 그녀가 인간이 아닌 ‘여신’의 후손이라는 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직접 보고 눈이 멀었다는 음유시인의 찬양보다도 강력한 힘은 외모가 아닌, 그녀의 ‘힘’에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는 제시리안 세인트 빈 여왕의 거대한 성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는 정체 불명의 기사단이 있다. 뭇사람들은 여왕의 숨은 힘이자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는 기사단을 단순 집합명사로 칭하지 않았다. 특정한 명칭도 없어 사신들로 이루어졌다는 기사단은 담백하게도 ‘여왕의 기사들’이라 불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총 서른 명 남짓으로 구성된 기사단은 전시에도 징집되지 않는 유일한 일원이라 한다. 그들의 검술 실력은 대지가 놀라고 창공이 비명을 지를 정도며, 그들의 여왕에 대한 충성심은 자신 뿐 아니라 삼대 가족의 목숨까지 공헌할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남색의 제복에 대비되는 붉은 장미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다. 여왕을 상징하는 장미를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며, 심해와 같은 짙은 색의 제복이 이 장미의 색으로 물들 때까지 그녀를 지킨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기사단은 결코 공개적으로 일원을 모집하지 않았다. 제국의 명망 높은 사신들의 소문을 통해서 추천을 받을 뿐이었다. 기사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자에겐 여왕이 직접 장미꽃을 하사했는데, 그 수가 일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폴버튼 제국 학교의 학생 두 명이 동시에 꽃을 하사 받은 일은 세간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아직 학생 신분의 미성년이 여왕에게 꽃을 받은 전례가 드물뿐더러, 당사자들의 외모가 그 꽃에 비견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소문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바로, 하트 로버이다.

    여자라면 사죽을 못 쓰면서 매일 밤마다 바지춤을 푸는 이 호색한 말이다.

    “밤마다 여자 안으러 밖에 나가면 나한테 민폐인거 몰라?”

    남자답게 잘생겨서 간혹, 같은 성별의 남자에게도 고백 받는 로버를 향해 그의 룸메이트인 진은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밤마다 안는 여자의 목록을 갱신하는 이 덜떨어진 치는 룸메이트의 짜증을 이해 못하는 양,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음?”

    “사감이 방 돌면서 일일이 사람 확인 한단 말이야!”

    그 말에 여유자적하게 하늘이나 올려다보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나 정도로 신뢰 있는 사람은 검사 안 할 텐데?”

    “이런, 씨버럴. ‘욕탕에서 씻고 있어요.’라는 핑계도 한 두 번이지. 언제까지 이럴 꺼야?”

    “카트린이 나를 더 이상 안부를 때까지.”

    “넌 대가리보다 니 좆부터 잘라야겠다.”

    비틀린 손목을 어루만지던 진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로버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검 날을 밀치면서 웃었다. 지나치게 무사태평한 태도에 오히려 보는 사람이 열이 날 정도였다.

    “로버!”

    밤마다 마실 나가는 룸메이트에 대해 한도 끝도 없이 불평을 쏟던 진은 불현 듯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지껏 진에게 욕을 한 사발이나 먹던 로버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한 소년이 서있었다. 역사 수업을 끝마쳤는지 양 손에 관련 과목 참고 도서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귀여운 소년은 로버를 보자마자 방긋 웃었다. 하얀 얼굴과 남자답게 잘 생긴 이목구비, 그리고 군살 없는 탄탄한 몸이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아직 성장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앳된 얼굴과 작은 키가 흠이지만, 키만 부쩍 크면 지금도 완벽해 보이는 외형에서 정말이지 조각같이 변할 상이었다.

    그는 양손에 들린 짐을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달려와, 양팔을 벌리고 로버에게 뛰어가 안겼다. 아까부터 진과 ‘좆 잘라라, 대가리 잘라라.’ 라는 저질스러운 단어들로 티격태격하던 로버는 순식간에 주변을 정화시키는 소년의 화사로움에 할 말을 잃고 눈만 꿈뻑였다. 소년이 자체 정화 페로몬이라도 발산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선 이토록 주변 공기가 깨끗하고 순수하게 변할 리가 없다.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던 로버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썼다. 소년이 격렬하게 달려와 안긴 탓에 안경이 콧잔등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것이다. 자신의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소년의 격렬한 재회가 우습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여 재밌기도 했다.

    로버는 소년을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수업 끝났어?”

    그러자 로버의 품에 파고들어 강아지처럼 얼굴을 부비던 소년이 고개를 발딱 든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함빡 머금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다 끝났어!”

    “오늘 수업 전부?”

    “응응!”

    “그래, 수고했어.”

    “헤헤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소년은 로버의 품속에서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가슴팍에 간신히 닿는 조그마한 생명체가 더욱 더 로버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룸메이트가 휘유~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야. 이렇게 귀여운 친구 버리고 저녁마다 그짓하러 도둑고양이 흉내내야겠냐?”

    그 말에 소년의 어깨가 움찔한다. 그는 헤헤 웃던 웃음을 지우고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그 짓?”

    로버는 혀를 차면서 곤란한 얼굴로 진을 노려봤다.

    “너 나랑 상담 좀 해야겠다.”

    “어우, 썅. 없는 얘길 한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꼬라보냐.”

    “말 좀 가려 해. 페일이 듣잖아.”

    “애기 취급하네, 아주.”

    똑같은 친구인데 누구는 애기처럼 곱게 키우려 하고, 누구는 그지 깽깽이냐며 진은 온갖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래도 어제는 사감이 방에 와서 한 바탕 뒤집어 엎고 나간 모양이다. 점오 시간에 안 보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매 번 이시간에 샤워를 하냐며 로버를 직접 봐야겠다는 사감이 그를 달달 볶았음이 틀림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심술을 부릴 리가 없다.

    로버는 한숨을 내쉬고는 페일이라 부른 소년의 이마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먼저 식당 가있을래? 얘랑 얘기 좀 하고 금방 따라갈게.”

    페일은 로버의 룸메이트를 가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배식은 안 받을테니 어서 와야 해.”

    “그래. 먼저 가있어.”

    품에서 떨어지기 싫다며 어리광 부리는 페일을 로버는 간신히 떼놓았다. 방긋 방긋 웃으면서 ‘빨리와.’하고 다짐을 받고서야 식당쪽으로 쪼르르르 달려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로버는 진을 바라볼 땐 살얼음이 낀 듯 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연무장 비었던데, 한 판 뜰까?”

    허리춤에 찬 검 집을 만지작거리며 위협하자 진은 두 손을 들고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이제 그만 놀릴게.”

    “둘이 있을 땐 상관없지만 페일 있을 땐 말 좀 가려서 해. 저 녀석 이런 일에 예민하단 말이야.”

    “네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건 아니고?”

    “아니야.”

    딱 잘라 말하는 로버에게 진은 뭐, 아무렴 어떻냐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말이지.”

    그는 로버와 페일과는 함께 밥먹지 않을 요량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똑같은 사내자식들이 히히덕거리면서 이마에 애정의 키스나 날리는 것들과는 닭살이 돋아서 함께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수 배양된 애가 아니고서야 열 일곱이나 처먹고도 ‘그 짓’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내새끼는 이 세상에 없어.”

    “야.”

    “아아, 알겠어, 페일 보모. 네 자식 욕 안할게.”

    그러면서 성큼 뛰어간 그가 히죽 웃으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네가 잘라야할 것은 대가리도, 좆도 아닌, 페일이야!”

    “너 밥 먹고 연무장에서 보자.”

    “와하하하하. 흰소리 아니니깐 새겨들어. 페일 새끼 사이코란 말이야. 콩깍지 씐 너는 모르겠지만!”

    목을 뚜둑, 소리 내며 풀던 로버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검 집에서 꺼냈다.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상단 베기였으나, 대기는 그에 반응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가 갈리며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뜰을 지나치던 여 학우들의 입에서 바람에 치마가 뒤집히면서 생긴 비명소리가 연달았다. 그와 함께 대기를 가른 바람이 저만치 뛰어가는 진의 등을 향했다. 위협적인 살기에 이크, 하고 재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등이 갈리는 중상을 입었으리라.

    “내가 미쳤다고 너랑 한 판 붙겠냐!”

    이미 정식 기사들보다 더 실력이 좋은 로버와 한 수라도 겨루고 싶지 않은 진이 소리를 빽 질렀다. 페일의 뒷담화로 기분이 꽁해진 버드는 답하지 않았다. 부한 얼굴로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진의 자취를 눈으로만 좇았다.

    잘라야할 것은 페일이야.

    “…헛소리.”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원.

    로버는 이럴 때마다 2년이나 함께 지낸 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시 여자가 없어서 심술부리는 거야. 나중에 카트린에게 친구 하나만 소개시켜 달라고 해야지.

    로버는 검집에 검을 끼우고 빙글 돌아섰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였다. 로버의 등 뒤에는 페일이 소리 없이 서있었다.

    “페일?”

    식당에서 기다리라고 한 페일이 안가고 있었던 걸까. 주춤 하는 로버를 향해 진이 사라진 방향을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페일은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로버의 품에 안기면서 속삭였다.

    “밥 먹으러 가자.”

    폴버튼 제국 학교.

    명망 있는 귀족 자제들의 고등 수업을 위해서, 혹은 국력에 충원 가능한 재원들을 기르기 위해서 설립된 국립학교다. 노후한 시설과 고지식한 수업으로 세간에서는 쓴소리를 많이 듣지만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폴버튼 제국 학교만큼 다양한 인재를 배출한 학교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특히나 정재계와 관련해서 ‘폴버튼 제국학교 출신이 아니면 입사 서류를 받고도 고개를 젓게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정치적인 줄을 타기 위해선 반드시 졸업해야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 한 곳이다.

    총 5년제의 제국학교에서 귀족 자제들과 기사 견습생 혹은 서민들의 비중은 1:9 정도이다. 귀족가 영양들은 교양을 위해서 애초에 기사반 학생들과는 접촉하지 않으며 사제 지망생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살육을 일삼게 된 기사반을 멀리한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파가 나뉘었다. 겹치는 수업이 없으면 졸업할 때까지 그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을 정도였다. 아카데미 관련자들은 귀족과 일반인이 섞이는 것은 대내외 이미지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학문반, 기사반의 사정을 모른척했다. 주먹싸움으로 번질 큰 일이 아니라면 크게 관여하지 않겠다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게 몇 년을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적인 편 가르기는 이번 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허물어질 기미를 보였다. 조짐은 기사반에서 부당한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기사반 아이들을 길가의 뭐 취급하던 귀족 영양들의 태도가 변화의 초석이 되었다.

    모든 수업과 기숙 제도가 기사반과 분별된 귀족 여자들은 땀내 나는 그들을 진절머리 나게 싫어하여 유일하게 한 자리에 모이는 점심시간을 증오했다. 오죽하면 샐러드 따위를 받아서 야외에 나가 먹을 정도니, 기사반 아이들과 눈이라도 섞길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알만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여자들이 때를 지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들은 한 남자 주변으로 아닌 척, 다가오고 있었다.

    경악스럽게도 그녀들이 호감을 보이는 이는 같은 귀족이 아니었다.

    기사반 아이들이 입는 제복을 자유분방하게 풀어헤치고 있는 열 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와 푸른색 눈이 신비로워 보이는 소년은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제복에 어울리지 않는 학구적인 분위기는 고루하고 딱딱하기 보다는 명석하고 지적으로 보였다. 단순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는 치와는 달리, 부드럽고 자상하게 비춰졌다. 특유의 색소를 지닌 머리칼과 눈동자 때문인지 차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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