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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수 구르미그린달빛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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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미그린달빛

    1. 운종가 삼놈이

    땅에서부터 봄이 오고 있었다.

    파릇한 생명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귀밑 자분치를 날리는 바람에도 제법 훈훈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잎새달 초하루(4월 1일), 한양의 운종가.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 하여 운종가라 불리는 거리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담뱃가게는 오늘도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르것어."

    담뱃가게 안, 평상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삼놈이, 난 암만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것어."

    평범한 장정보다 덩치는 두 배 이상 크고, 키도 어지간한 사람 머리 하나는 웃자란 사내. 생긴 모양이나 하는 짓이 흡사 곰 같아 곰 서방이라 불리는 그는 반촌(泮村)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는 천 서방이었다.

    언제나 미련한 곰처럼 느릿느릿, 급할 것 없던 그가 오늘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모습이다.

    천 서방은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맞은편의 어린 사내를 응시했다.

    겨울 밤하늘을 담은 듯 맑게 빛나는 커다란 검은 눈, 잇꽃처럼 붉게 반들거리는 입술, 그리고 설원처럼 새하얀 피부.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봄 들판의 꽃처럼 싱그러운 어린 사내는 어찌 보면 여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미려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삼놈이, 나는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시. 그러니 자네가 한번 말혀 봐."

    앞뒷말 모두 잘라먹은 천 서방의 재촉에 삼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진정부터 하시고,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말이시......."

    천 서방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참, 사람 답답허이."

    "저러니 곰 서방이지. 달리 곰 서방이겠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 있던 사내들이 답답하다는 듯 지청구를 날렸다. 매일같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김없이 찾는 이곳은 구 영감의 담뱃가게였다.

    구 영감의 담뱃가게는 두 가지 이유로 유명했다.

    첫 번째는 한양에서 가장 품질 좋은 담배를 파는 곳으로 유명했고, 두 번째는 운종가 사람들의 고민 상담을 하는 곳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곳에 오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그중에서도 여인의 마음에 관한 일이라면 '삼놈이'를 찾으면 그야말로 직방이었다. 덕분에 구 영감의 담뱃가게는 여인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사내들로 연일 문전성시였다.

    "천 서방 아저씨, 말씀해 보세요. 이번엔 아주머니께 또 무슨 잘못을 하신 거예요?"

    좀처럼 말문을 떼지 못하는 천 서방을 대신하여 삼놈이 물었다.

    "잘못은 무슨 잘못!"

    정곡을 찔린 천 서방이 펄쩍 뛰었다.

    "아저씨."

    삼놈이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천 서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구신 같은 놈."

    결국 천 서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삼놈이, 저놈은 속일 수가 없어.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어찌 저리 남의 속내를 훤히 꿰뚫는 것인지. 천 서방은 푸념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삼놈이 운종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3년 전, 여름이었다.

    어디서, 뭘 하다 이곳까지 흘러들었는지 알 길 없었으나, 어지간한 계집아이 뺨칠 만큼 고운 미태로 운종가 아낙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홀려 버렸다.

    어디 생긴 것뿐일까?

    얼굴이면 얼굴, 언변이면 언변, 글이면 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갖춘 잘난 놈이었다.

    하여, 운종가 사람들은 그를 삼놈이라 불렀다. 난 놈, 될 놈, 할 놈이란 뜻의 삼놈이.

    뭐든 갖춘 잘난 놈이라 '난 놈'이라 하였고, 저리 잘났으니 뭘 해도 될 놈이라 '될 놈'이라 하였으면, 또한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놈'이라 할 놈이라 하였다.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줬다는 '라온'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이 운종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천 서방이 억울하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 우리 여편네 속을 알다가도 모르것다니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계집 속은 모르겠다는 말이 아주 딱이라니께."

    "무슨 일인데요? 또 아주머니께 못났다고 하신 거예요?"

    "아녀. 전번에 삼놈이가 그런 말 하면 여편네가 싫어한다고 혀서 그 이후로는 입도 달싹 안 혔다니께."

    "그럼 아주머니께선 언제부터 화가 나신 거예요?"

    "사흘 전부터 도끼눈이라니께. 아주 사람을 잡아먹을 태세여."

    "사흘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라온의 물음에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던 천 서방이 커다란 눈동자를 뒤룩 굴렸다.

    "뭐, 별일은 없었고. 여편네가 새로 옷을 한 벌 맞췄어."

    "아주머니께선 당연히 예쁘냐고 물으셨겠네요?"

    "암만. 그래서 내가 삼놈이 가르쳐 준대로 '좋다' 혔지.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또 물으셨겠죠. 정말 좋아요? 하고 말이죠."

    "어찌 그리 잘 아는겨? 내 마누라지만, 여편네가 참말로 요상혀. 좋다, 한 마디 했으면 그냥 들어 처먹어야 할 것이 아니여. 분명 좋다고 혔는데, 또 묻잖여. 진짜 좋아요? 하고 말이여. 그래서 좋다, 아주 좋다, 혔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주 코맹맹이 소리를 혀대질 않겠는가. 솔직 담백하게 말해 보라고, 자기는 다 이해한다고....... 그름서 '솔직히 이 옷, 나한테 안 어울리지요?' 허질 않것어?"

    "그래서요? 설마 아주머니 말씀대로 솔직하게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어디! 내가 누군가? 한양 최고의 대장장이, 천 서방이 아닌가. 내 손으로 만든 창칼이 수천 자루여. 그런 내가 못 헐 말이 뭐이가 있것어. 그렇게 솔직허게 말하라고 하니, 내 솔직허게 싹 다 말혔어."

    "뭐라고...... 요?"

    "솔직허게 말해서 그 옷 안 어울린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얼굴도 시커먼 사람이 꽃 분홍이 웬 말이냐? 그리고 두 냥이나 줬다 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그 옷, 가만 보면 논두렁에 세워놓은 허수아비가 입던 옷이라고 해도 믿것다, 혔지."

    천 서방의 큰 소리에 주위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맞장구를 쳤다.

    "잘 했네."

    "내 속이 다 후련하구먼."

    "그럼그럼, 사내라면 자고로 그리 솔직한 맛이 있어야지. 우리 곰 서방, 생긴 대로 사내답구먼."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천 서방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내들이란.......'

    주위를 둘러보던 라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어쩜 여인을 몰라도 저리 모르는 것인지.......

    "삼놈이, 삼놈이가 말혀 봐. 대체 우리 여편네 왜 지랄발광인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모르것어. 모르니께 내가 파루치기 무섭게 삼놈이를 찾아온 것이 아니여. 여편네가 아주 사람을 달달 볶아. 사람 피를 말리고 있다니께."

    맺힌 게 많은 듯 천 서방은 제 가슴을 쾅쾅 쳐 댔다. 이 억울한 마음 좀 알아줘, 하는 표정이다.

    그 가엾은 얼굴에 대고 라온이 매정하게 한 마디 했다.

    "당하실 만했어요."

    천 서방이 발끈 성을 냈다.

    "뭐이 당할 만혀? 내가 뭐이를 그리 잘못혔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주머니한테 어떻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여편네가 먼저 솔직허게 말허라고 혀니께, 솔직허게 말헌 것뿐이라니께."

    "아주머니께서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정말 아저씨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을까요?"

    "그럼 뭔 말이 듣고 싶은 것이여?"

    "그건 말입니다, 새로 산 옷이 얼마나 아주머니에게 잘 어울리고 예쁜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란 뜻이었어요."

    라온의 설명에 천 서방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뭣이여? 그게 그런 뜻이었어?"

    라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편네, 참말로 이상혀네. 그럼 그렇게 말할 것이지, 어째 솔직 담백허게 말혀라고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가."

    천 서방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삼놈이, 이제 워쩌면 좋것는가?"

    천 서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풀 죽어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미 잃은 어린 송아지였다. 저럴 것을 왜 매번 실수를 하는 것인지.

    "화해하고 싶으신 거예요?"

    "독현 여편네라니께. 어제부터는 내 꼴도 보기 싫다고 밥도 안 주고 있다니께."

    천 서방이 등가죽에 달라붙은 배를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라온이 검지를 치켜세우며 할아버지를 언급했다.

    담뱃가게에 있던 사내들이 시선이 일제히 라온을 주시했다. 삼놈이 할아버지를 언급할 때면, 언제나 기가 막힌 해결책을 내놓곤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번 일엔 어떤 해결책을 내 놓을까?

    "여인의 마음이란 춘삼월 봄바람이라."

    "뭔 말이여?"

    "봄바람처럼 이리저리 어디로 불지 모르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니.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그때그때 처신을 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신을 잘 혀?"

    "이렇게 해보세요."

    생각을 끝낸 라온이 천 서방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천 서방은 영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대장간으로 옮겼다. 아내 안 씨는 단단히 부아가 치민 얼굴로 화로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이, 이봐."

    "흥."

    천 서방의 부름에 안 씨는 팽 앵돌아진 모습으로 화답했다.

    "임자...... 화났는가?"

    "화 안 났소. 내가 화 날 일이 뭐가 있겠소?"

    말과는 달리 안 씨는 온몸으로 '나 화났소.' 시위하고 있었다.

    "그것이......말이시....... 내가...... 잘못혔네."

    천 서방을 힐끗 쳐다본 안 씨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내가 잘못혔네, 임자."

    "뭘 잘못한 줄은 아시유?"

    천 서방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삼놈이 알려준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참이었다.

    설마...... 통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일랑은 통할 것 같지가 않은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

    천 서방은 주춤주춤, 영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저, 저기, 사, 사실 말이여...... 나는 싫으네."

    "뭐가 싫어요?"

    "나는 임자가 고운 비단 옷 입는 게 참말 싫으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 씨가 치켜 올라간 눈초리로 천 서방을 노려보았다.

    "그럼 그렇지. 어째 순순히 사과를 하나 했더니. 본심이 따로 있었네. 내가 비단 옷 입는 것이 그렇게 싫었단 말이지요?"

    "그것이 아니여!"

    "그게 아니면 뭐요? 왜 내가 비단옷 입는 게 싫단 말이오?"

    "나는 말이시, 임자가 자꾸 고와지는 게 너무 싫단 말이시."

    "......뭐, 뭐예요?"

    뜻밖에 대답에 안 씨가 당황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천 서방이 꿀처럼 달달한 말을 입 밖으로 흘려냈다.

    "사실...... 임자가 그 옷을 입고 나 어때요? 하는데,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니께. 믿을지 모르겠지만, 임자를 딱 봤는데, 뭐시냐, 이건 하늘 선녀가 따로 없었다니께. 아, 저리 고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저 어여쁜 아낙이 내 마누라구나 생각하는데....... 주책없게도 심장이 미친놈처럼 발광을 하지 않겠는가."

    말을 하는 천 서방의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정말이에요?"

    내내 등을 보이고 있던 안 씨가 천 서방을 향해 돌아앉았다. 돌아앉은 안 씨의 두 눈은 어린 계집아이처럼 반짝거렸고, 두 뺨엔 발그레 홍조마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참말 그렇게 예뻐 보였어요?"

    콧물이 가득 들어찬 듯한 안 씨의 콧소리에 천 서방은 기가 찼다.

    통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한 거여?

    "두말하면 잔소리고, 더 말하면 입 아프지. 나는 말이시, 임자가 그리 고와 보이는 게 참말로 싫으네. 10년을 한 이불 덮고 자는 내 눈에 그리 예뻐 뵈는데, 딴 놈들 눈엔 을매나 고울 것인가. 사내놈들이 임자한테 힐끔힐끔 대는 꼴, 눈에 안 봐도 훤 혀."

    "누가 힐끔댄다고 그래요?"

    "거참, 자네는 사람이 이렇게 순진하단 말이시. 사내는 말이여, 다 짐승이여, 짐승. 자네처럼 고운 여인네만 보면 저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단 말이시. 이리저리 집적대는 놈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리고 내가 그 꼴 보고 새색시마냥 가만있을 성 싶은가."

    "참말로! 내가 몇 번 말했어요? 그 성질 좀 죽이라고."

    "내 마누라를 딴 놈이 힐끔거리는데 참는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겠는가. 참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빙신이여, 빙신!"

    천 서방은 대장간이 떠나가라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띤 안 씨가 천 서방의 가슴팍을 톡톡 치며 앙알거렸다.

    "내가 당신 때문에 못 살아요."

    "뭐이, 내가 없는 말 혔는가?"

    "아이참, 이 양반이 왜 이래?"

    안 씨는 남편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천 서방이 은근슬쩍 안 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임자, 내가 잘못혔네."

    "나도 옹졸했어요. 나는 당신 속도 모르고......."

    두 사람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 익어갔다.

    "역시 삼놈이군."

    "계집에 관한 일이라면 우리 삼놈이를 당할 자가 없겠어."

    대장간 밖에서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던 사내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

    일이 어찌 되는지 궁금하여 천 서방을 뒤따라왔던 사내들은 앞다퉈 라온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내 차례요."

    "어째 자네 차롄가? 빠짐없이 상담해 드릴게요."

     

    ***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무거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웅....... 다 끝났다."

    라온은 길게 몸을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미시(未時初: 오후 1시)가 훌쩍 지난 시각.

    사람들로 북적였던 담뱃가게가 이제야 한적해졌다. 라온은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오늘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우리 단희 약이 다 떨어졌거든요. 구리개에 들러 필요한 약재도 사야 하고, 쌀도 사야 하고, 이리저리 살 것들이 많습니다."

    버릇처럼 싱긋 미소 짓는 라온에게 구 영감이 작은 무명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챙겨라."

    "이게 뭡니까?"

    "김 역관 댁에서 보내온 열 냥이다."

    "김 역관 댁에서요?"

    "일전에 그 댁 큰 아들 상사병을 고쳐 준 일이 있지 않느냐?"

    "그 일이라면 이미 충분한 사례를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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