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아르]붉은 여왕red queen - 9

162일전 | 129읽음




소문으로나 듣던 그 전도유망한 왕위 계승자가 찾아온 것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갈이


도착하자마자 배웅을 나가려는데 한 청년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정문을 향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그


안센이란 남자의 시종이나 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선뜻 날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안센 오크문튼이라고 합니다. 휴란 엘 린덴마이어 경을 만나러 왔는데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손을 번쩍 내밀며 얼결에 인사를 했을만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내 팔이


부러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내가 곤란한 표정으로 빙긋 웃어 보이자 안센이란 남자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라, 팔이 부러지셨나요?"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저런 저런......불운이었군요."



말하며 그는 눈꼬리를 밑으로 내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느 성격 좋은 공작님께서 부러뜨려 주셨죠.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난 호감 어린 웃음을 보였다. 뭐랄까...대하기


편한 사람이로군. 귀족이라서 모두 휴란 같은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었나? 몇 마디 더 맞장구 치려는 찰나 집사의 흠흠


거리는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나는 뒤로 물러섰다. 순간 목덜미에 와 닿는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제 시종에게 볼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오크문튼 후작님."



"아아....여기까지 마중 나와 주시다니 황송합니다. 역시...."



안센은 쾌활한 인상을 주는 회갈색 눈동자로 휴란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싱긋 웃었다.



"듣던 대로 대단한 미모로군요. 얼음 공작이라고 소문난 린덴마이어 가주가 아니었다면 기꺼이 청혼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별 말씀을-."



살기를 풀풀 풍기는 휴란 앞에서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그도 놀라웠지만 그에 무표정으로 응답하는 휴란의 모습도 그리


뒤지진 않았다.


저 청혼이라는 거, 외모만 예쁘다면 남자 건 여자 건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혹시 저 남자도 그런 부류였던가. 난 애써


휴란과 안센에게서 슬그머니 뒷걸음질치며 멀어지고 있었다. 변태가 옮을라.


그러나 안센은 '흐음' 하는 웃음을 짓더니 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참 특이한 시종을 두고 계시군요. 보통은 나 정도의 지위면 잔뜩 기가 죽는데 참 팔팔한 시종이군요. 게다가


온 몸을 붕대를 감고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천한 신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죠. 대륙에서 내노라하는 린덴마이어의 시종이라는데.."



그는 눈을 찡긋하며 나에게 윙크했다.


타오른다, 활활 타오른다.


보일 리 없는 불꽃이 휴란의 등뒤로 타오르는 것이 내 눈엔 훤히 보였다. 겉으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지만 곧 칼이라도


꽂을 듯한 기세다. 이래서 상대방을 너무 잘 파악하는 것도 때로는 고달픈 것이다.


안센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하군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의 시종이라니.....보통은 불길하다고 가까이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공작님의 동생 분께서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라 들었는데 말입니다."



빙글거리면서 웃고 있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은 예리했다. 멍청하고 한가한 귀족나부랭이만은 아니었단 뜻이겠지. 그러나


휴란은 안색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다.



"그래서요?"


"저 시종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고귀한 왕위 계승자이신 안센 경이 왜 남의 사생활을 간섭하는 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


시종의 이름은 슬레온, 천한 신분의 태생인지라 성은 없습니다."



휴란은 조소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나의 피는 급속히 차갑게 식어갔다.








13.



이번엔 안센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나와 휴란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난 반쯤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은 등으로 돌렸다. 주먹을 쥔 손가락 틈으로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안센은 냉정한 휴란의


얼굴을 지긋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어이, 거기 시종, 자리 좀 비켜주지 않겠어?"


"그러죠."



등을 돌린 채로 답했다.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보나마나 휴란을 찢어 죽일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여태까지 그를 내 유일한 혈육이라고 인정해 왔다는 것이, 적어도 그는 뭔가 틀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날카로운 칼날에


끊어져 내린다.



내가 그에게 뭘 기대했던 것인가? 그가 보인 이상한 애정을 형제애라고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던가. 단지 더럽고 비속한


성욕이었을 뿐.


난 처음부터 린덴마이어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란이 속삭였던 그런 달콤한 제의 같은 건 뱀이 이브에게


소근거렸던 죄악의 미끼였던 것처럼 버려지고 파괴될 것이었다. 나에게 남겨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아주 어렸을 때 단지


가난과 굴욕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것처럼.


나의 아버지라는 그가 날 데려간 건 더욱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수순이었을 뿐. 단 한 발자국도....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안고 소근소근 속삭이던 나의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거기 서라, 슬레온."


"........"



발목에 차갑고 미끈미끈한 것이 얽혀온다. 이건 환상인가? 검은 실뱀이 뒤에서부터 내 다리를 꽁꽁 묶고 사악한 시선을


던진다. 내 목을 건드리는 듯한 간질간질한 감각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지저분한 손톱과 거친 손마디, 휘감기는 검은


머리카락. 잊고 싶었던 검은 그림자, 나의 어머니. 천천히 등을 돌렸다. 흔들거리는 먼지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넌 나에게서 도망갈 수 없단다, 슬레온.



두근.


그러나 이내 겹치는 형상은 냉담한 표정을 한 휴란의 것이었다.



"한시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명했던 것을 잊었나? 너의 주인은 나다."


"..........허나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천한 신분은 감히 들을 수 없습니다. 문 밖에서 기다릴테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슬레온!"



그의 날카로운 외침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방밖으로 나갔다. 그와 마주 대하고 싶지 않다. 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방에서 멀어졌다.








"이야....정말 대단한 표정을 하고 계시는 군요. 거기다가 엄청난 박력. 놀랐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거리는 안센을 향해 휴란은 한층 도드라지는 날카로운 눈매를 돌렸다. 은빛의 바다에 잠든 보석같이


은색의 속눈썹 안에 표정 없는 동공은 아름답지만 싸늘했다. 그의 얼려버릴 듯한 표정에 안센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 뭘 원하고 있습니까?"


"아아....이해가 빠르시군요. 사실 당신께 약간의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약간의 부탁이라...."



대꾸하는 휴란의 말투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당신이 알다시피 전 다음 국왕 계승자로 낙인된 상태는 아닙니다. 저보다는 저의 사촌형이 훨씬 유력한 후보니까요. 그러나


린덴마이어에서 절 조금만 도와준다면 국왕의 자리는 문제없습니다. 만약 휴란 공께서 절 도와준다면 전 기꺼이


린덴마이어에 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좋은 청년의 얼굴은 능숙한 정치가의 얼굴로 변해 교활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별로 거부감을 안겨주지


않는 것은 빙빙 돌리지 않는 직선적인 어투 때문이었다. 그러나 휴란의 눈가에 경멸이 어렸다.



"전 분명히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중립을 택한다고 말했습니다."


"하하하....그렇게 융통성 없게 나오실 겁니까? 서로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다른 귀족들에게 알아보십시오. 왕권 다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 왜 이러십니까? 비록 거의 모든 해상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건 린덴마이어이지만 거기에 관세를 부여하는 것은


국왕이라는 걸 아실텐데요. 절 적으로 둬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자신의 부드러운 말이 통하지 않자 안센의 얼굴이 굳어졌다. 휴란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말대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왜 하필 린덴마이어를 걸고넘어지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애초부터 린덴마이어는 왕가와 연이 없습니다."


"하하.....난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한 휴란 엘 린덴마이어를 끌어들인다면


쓸모없는 귀족 100명 보다 낫지 않습니까? 더구나..........그대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흔들거든....."



안센은 얼음 같은 표정을 한 휴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싱글거리는 눈웃음 뒤에 붉은 음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손가락에


닿는 피부의 감촉은 차갑지만 최상급의 옷감같이 부드러웠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미모...이 도자기 같은 피부,


얼음 같은 시선. 신의 완전한 예술품 같은...."



그는 휴란이 별다른 저항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를 승낙으로 여긴 안센은 대담하게도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유혹적인 색의 입술이야."



그러나 그가 맛본 것은 달콤한 입술이 아니라 입안까지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휴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손을 털었다.



"그 더러운 입 치우시죠. 그런 쪽의 일이라면 더 이상 볼일은 없습니다, 집사."


".........가...감히...."



휴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에 대한 더러운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까지 손을 뻗칠 줄을 몰랐군요. 다음에도 이런 일로 마주칠


때는 그 입이 아니라 심장이 온전하지 못할 겁니다."



휴란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집사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던 안센은 얼굴에서 인상 좋은 가면이 떨어져나가고 추악한 인상이 되어서 중얼거렸다.



"후회할거다, 휴란."








계단 밑에서 잠시 멍하니 서있던 나는 다가오는 인기척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휴란이 날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다못해 근처에 하인이라도 있으면 요행히 이 상황은 모면해 보련만 그는 정확히 나를 향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눈빛에 질색해 죽을 것 같다.



도망가고 싶다. 회피하고 싶다. 저 무시무시한 갈망과 아집(我執)으로 가득한 시선이 두렵다. 그러나 난 숨을 몰아쉬며


내 두려움에 애써 맞섰다.



"공작......."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는 내 목을 조르며 뒤로 밀었다. 얼결에 뒤로 물러서며 내 몸은 계단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떠밀리고 말았다. 노기를 참는 휴란의 거친 숨소리가 내 고동치는 맥박소리와 더불어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디까지 날 시험할 셈이냐."


"...............더러운 짓거리, 더러운 욕망....그딴 것에 응해 달라고?"


"날 초조하게 만들지 마라, 슬레온. 난 이대로 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이니까.."


"하.......되려 당당한 건가? 어디 변명할테면 변명해 봐........날....우웁."



날 동생으로 여기지도 않는 주제에-.


그러나 나의 사나운 목소리는 거칠게 겹쳐지는 입술로 인해 막혀버렸다. 휴란의 키스는 이젠 잊혀진 줄 알았던 역겨운


기억을 몰고 온다.




거부, 절대적인 거부. 내 존재의 거부.


내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느꼈던 지독한 이질감에 또 다시 부딪힌다. '저 애는 마녀의 자식이다. 더러운 피를 가진


자식이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보듬어 알아줄 때 단절되었던 어두운 세상이 다시 손을 벌려 나를 찾았다. 마치 저 선명한


경계를 이루며 섞이지 않은 찬란한 은색과 검은 색의 맞부딪힘처럼.


그는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날 원하지만 그건 혈육에 대한 집착일 뿐이라고 정리했었다. 아마도 너무나


완벽하기에 공허한 거겠지, 아마 여자라도 한 명 생기면 달라질테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그는 날 동생으로도


여긴 것이 아니었다.


휴란은 억지로 내 턱을 벌려 혀를 끄집어냈다. 그는 내 혀끝을 자근자근 물어오며 내 속으로 들어오려 한다. 거부하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의미 없는 짓이었으니까-.



차라리 날 멋대로 짓밟고 망가뜨려 버려. 다시는 희망 같은 거 품을 수 없도록 좀 더 철저히, 영혼까지 지옥에 떨어뜨려.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왜 반항하지 않는 거지?"



휴란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날 탐색하듯 내 입술을 훑으며 물어왔다. 타액으로 끈끈해진 입가에 애써 미소라 불릴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널 싫어해, 휴란."


"............."


"싫어해.........."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이 자리에서 날 덮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한 순간 화끈하는 열기가 와 닿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이내 시원해졌다. 눈을 떠보자 휴란이 묘하게 상처 입은 표정으로 날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엄격하고 차가운 인상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커다랗게 확대된 동공 안에 단단히 얼어버린 내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나지막한 욕을 내뱉으며 등을 돌려 뚜벅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져갔다.









단 몇 분간의 짤막한 시간을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한 팔에 코트자락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계단 난간을 짚고 있었다.


슬쩍 밑을 향해 숙여진 얼굴에 보기 좋은 웃음이 걸렸다. 눈꼬리가 접히며 내려가는 사람 좋은 미소.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독보다 진득한 음모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그 의외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4.



그는 사기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여 나에게서 멀어진다.


은으로 빚은 것 같은 머리카락이 내 심장을 도려낸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그리고 증오한다.






내가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 무엇하나 부족해 본 적도 없고, 뭇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 본 적도 없다.


어두운 뒷골목 생활의 처절함 따위는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을 테지. 바로 내 옆에서 썩은 시체가 실려나가고 나이든


처녀들은 웃음을 팔며, 빵 한 조각에 목숨을 거는, 그런 처절함을 그가 어떻게 알까?



나도 잠시 타성에 젖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귀족 생활이 주는 안온함에 내 몸을 맡긴 채 잠시 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빛과 어둠은 서로 극과 극이지만 바로 등을 돌리면 맞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깝다. 빛 속에 서있는 휴란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해주었다.



-저 시종의 이름은 슬레온, 천한 신분의 태생인지라 성은 없습니다.



바보같이 그제야 내 몸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손도 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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