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아르]붉은 여왕red queen - 2

127일전 | 93읽음

주의인 아버지가 그를 그냥 나두었을 리는


만무하다.



"개자식! 결국 날 비참하게 데리고 놀다 버릴 생각이었군. 뭐? 네 시중을 들어? 차라리 내 발로 이 더러운 집안을 나가고


말테다!"



졸지에 그의 품에 머리를 박은 꼴이 되어버린 난 이를 갈며 그의 옆구리를 향해 다시 주먹을 뻗었다. 휴란은 이번엔


피하지도 않고 도리어 내 머리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 당겼다. 덕분에 그가 즐겨 쓰는 향수 냄새가 얼얼할 만큼 코를


찔러왔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놔!!"


"바보 같구나, 슬레온."



내가 몇 번이나 주먹으로 그의 등과 옆구리를 올려쳤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쓸모 없는 쓰레기를 내 곁에 둘 만큼 관대한 사람이 되지 못돼. 그게 설사 내 혈육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난 너에게


굴욕을 가르치기 위해 기회를 주는 게 아니다. 네가 린덴마이어의 후손으로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지. 그리고


그 시험관이 나라면 다른 친척들도 반박하진 않겠지. 정말 이것이 맘에 안 든다면 멋대로 가문에서 나가도 상관은 않겠다.


무엇이 더 비참한 건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게 느껴질 만큼 침착했으나 예전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내가 마치 7살 짜리 어린애 취급받는


것처럼 그는 슬쩍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화가 나긴 했지만 황당한 심정이 더했다. 그보다 더 기분 더러운 것은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제길! 필요 없어!!!"



난 휴란의 팔을 뿌리치고 똑바로 자세를 잡았다. 휴란은 차가운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지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감언이설로 날 속여보실 생각인 것 같은데-. 어림없어! 나의 엘그란을 유혹해간 주제에 날 속이려 들어? 흥, 멀었어.


귀족 나으리."


"무슨 말을 하든 지금은 믿지 않을 테지. 그렇지만 여기서 네가 가문을 포기한다면 넌 모든 것을 잃어버릴 거야.


네 친구도, 돈도, 네가 누리던 모든 혜택도.....그리고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엘그란 양까지 말이야."


"죽어 버려, 개자식!"



난 치밀어 오르는 욕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모두 필요 없어. 내가 나가주지."



난 그 즉시 내가 걸치고 있던 비단 셔츠나 감색의 고급스런 조끼, 염소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장화, 양말, 바지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속옷만 남겨두었다. 보란 듯이 그것들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문으로 향했다. 내 이런 대응에는 다소


당황했는지 휴란은 멍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슬레온."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빌어먹을, 아주 병 주고 약 주는 식인가? 그러나 난 다신 그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을 작정으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휴란 엘 린덴마이어 공작."


"거기 입고 있는 속옷도 우리 가문의 것인 걸로 알고 있는데......"


"..........."



정말 할말없게 만드는 남자다. 기어코 날 맨 몸으로 쫓아내야 성이 풀리겠다 이건가? 잠시동안 밑을 내려다보며 속옷도


벗어야하나 고민할 무렵 작게 킥킥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마치 숲 속에 산다는 페어리들의 웃음소리같이 매우 청량하고 기분 좋은 톤의 웃음이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등을 돌렸다.


한참동안 내 눈을 의심했다. 차라리 페어리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게 더 현실성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냉정하고 차갑기로 유명한 얼음 공작 휴란 엘 린덴마이어가 배를 웅켜 쥐며 웃고 있는 것이다. 미남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어서 얼굴이 약간 상기된 체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웃을 때마다


어깨가 흔들리며 허공에 긴 궤적을 긋는 매끈한 은발, 은색 눈동자는 긴 속눈썹에 가리어져서 어떤 표정을 짓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눈가의 미소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난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무나 순수하게 웃고 있어서 화도 내지 못하고 반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멀뚱히 서있을 수밖에.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기만 하던


휴란은 간신히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거야?"


"네가 투정부리는 모습은 10살 때 이후로 못 본 것 같구나, 슬레온."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듯 다정한 시선으로 줄곧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 만났던


4개월 전까지 그렇게 차갑고 냉정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야!"


"널 내치는 일 따윈 절대로 없을 거다. 그러니 날 믿고 한 달만 곁에 머물지 않겠나?"



그는 다정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난 그의 다정한 태도에 혹해 하마터면 그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난 엘그란을 떠올렸고 곧 냉정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좋다, 내게 뭘 원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이다. 한 달 후엔 어떠해서든 내 권리를 되찾을 테니 흥분할 거 없어.'


"......그러지요, 친. 애. 하. 는 형님."



난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철썩 그의 손바닥을 치고는 바로 등을 돌렸다. 벗었던 옷을 다시 입기 위해서다. 아무리


파락호에다가 미친놈이란 칭호를 들으나 하녀들 앞에서 속옷차림을 보이긴 다소 민망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그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내 몸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아쉽구나, 슬레온. 속옷까지 다 벗어도 좋을 뻔 했는데 말이야."


".............."



이로써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는 적어도 날 놀리기 위해 곁에 두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을 말이다.








3.



새벽이 되기 무섭게 날 깨우는 손이 있었다.


평소라면 감히 날 깨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기에 난 약 5분간은 새로운 시종이 아직 내 성격을 잘 모르는구나-


하는 관대한 심정으로 굳세게 버텼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날 깨우려는 시도가 멈추지 않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대방이 누구인지 볼 것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크억!!"



경쾌한 비명이 터지고 땅바닥으로 구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난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베개 깃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막 꿈속에 내 몸을 맡길 무렵 또 다시 날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까 까지만 해도 제법 조심스러웠는데


이젠 아예 머리가 배게 위에서 들썩거릴 정도로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참자......참자......참아야..........못 참겠다!!!'



우드드득-.


오랜만에 기지개를 편 손가락뼈가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미안하구나, 나의 오른손.


그 동안 심심했었지?


오른손이 간만에 찾아온 기쁨에 환호성을 지를 무렵, 어깨에 머물러 있던 손은 거침없이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불을 젖히고 힘차게 아침 인사를 하는 그 녀석을 향하여.



"으아아아악!!!!!"



오른손의 슬픔도 무시하고 난 후닥닥 일어나 이불을 꽁꽁 온몸에 감쌌다. 감히 나에게 발칙한 짓을 저지른 이는 침대


가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있는 은발의 미남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가볍게 쥐었던 물건의 사이즈를 재보기라도


하는 듯 한 손을 허공에 들고 잠시 사색에 잠겨 있었다. 누가 본다면 연극 무대에라도 선 미남배우의 독백신을 연상하게


만드는 우수에 찬 자태였다.


그는 가볍게 공글여 쥔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어 나에게 상큼한 웃음을 던졌다.



"잘 잤느냐, 슬레온?"


"......이게....무슨 짓이야! 꼭두새벽부터!!!"



계집애같이 부드러운 은발을 휘날리는 주제에 그는 무척이나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야, 대체, 저게 정말 그


휴란이 맞는 거야?



"아침부터 아주 건장하구나. 널 데려갈 사람이 아주 좋아하겠어."


"제길,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설마 어제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잊었다면 무척 슬퍼할 거야, 슬레온."


"누가 잊었다고 그랬어?!"



난 집이 떠나갈 정도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달콤한 잠 같은 건 달아난지 오래였다. 그는 귀족다운 우아한 자태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날 수행하는 일은 누가 할 일이지?"


".............."


"알았으면 어서 일어나서 준비해라. 시종보다 주인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나? 이번은 처음이라 봐주지만


만약 다음에도 그럴 경우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크윽....체벌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니.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겐 키스가 약이지."



그는 여전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향해 비단 손수건을 던지곤 등을 돌렸다. 난 벙찐 얼굴로 입만 딱 벌린 채


굳어져 있었다. 이제 보니 방구석에 한쪽 눈이 시퍼렇게 물든 시종 하나도 돌덩이처럼 굳은 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저 인간이 정말 냉정하고 빈틈없기로 소문난 휴란 엘 린덴마이어, 그자가 맞는 건가?


그러나 깊이 생각하기 이전에 빨리 나오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는 즉시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아침밥을 챙겨 먹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하여간 집에서 나간 뒤론 아침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했으니 먹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오후 경에 나른하게 일어나서 동료들과 어울리고 술먹고 밤을 새던가 계집을 꼬셔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하루 일과였다.


그러니 밥맛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난 내 앞에 수없이 쌓인 음식 더미를 보며 포크만 꽂아놓았다. 명색이 공작 가의 아침 식사라서 수십 명은 둘러앉고 남을


거대한 식탁엔 그 거대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음식접시가 호화찬란하게 벌려있었다. 내가 아는 과자와 푸딩 종류만도 10여


가지에 평범한 야채 스프를 비롯한 색색의 스프 6종류, 샐러드를 비롯한 가벼운 전채 12종류, 갓 구운 빵과 고기 20여 종,


치즈 7여 종이 골고루 색색들이 식탁을 차지한 것이다. 하나 하나는 각기 향긋한 내음을 뽐내지만 그것들이 합쳐지니


음식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지경이었다. 이 정도 음식이면 이 저택에 사는 모든 시녀, 하인들과 가축들까지


먹여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난 주방장의 이 언밸런스한 센스와 능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정작 기다란 식탁에


자리하고 앉은 건 나와 휴란 단둘뿐이었던 것이다. 휴란은 이 엄청난 음식더미 속에서도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며 치즈를


포크로 작살내고 있었다.


아무리 예의라곤 하지만 설마 이 많은 음식들을 내가 다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래도 예전엔 좀 더 단촐했던


것 같던데 내가 없는 사이 가풍이라도 바뀐 건가?



내가 다시 눈앞에 놓은 오리고기 로스에 힘차게 포크를 뽑아내자 뒤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하인이 서둘러 음식접시를


교체해나갔다. 뭐야, 설마 아직도 남은 게 있던 건가? 난 황급히 뒤를 돌아보고는 질려버렸다. 은제접시를 양손에 치켜든


10여 명의 하인들이 이제나저제나 식탁의 자리가 남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부족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포도주 좀 줘."



난 결국 어마어마한 식단에 질려 간단한 스프만을 입에 댄 두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내 반대편 10여 미터 밖에서


식사를 끝낸 그를 향해 난 최대한 우아한 말투로 내 의문을 물었다.



"빌어먹을, 돈이 썩어나나 보지? 황제도 아침으로 이렇게 먹지는 않겠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돈은 많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난 너에게 최후의 만찬을 즐기게 해준 건 뿐이야."



그도 포도주로 입을 적신 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지만 식당 안은 빌어먹을 만치 너무


고요했다. 수 미터 밖이었지만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최후의 만찬?"


"곧 사형대로 보낼 사형수에게도 은총은 주어진다는 의미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입이 무척 거칠구나. 이제부턴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슬레온."



냅킨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면서 휴란의 부드러운 미소는 얼음장같은 냉소로 변했다. 홍채와 동공을 구별할 수 없는


차가운 은색의 광채가 찌를 듯한 빛으로 날 향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부터는 더 이상 넌 내 동생이 아니라 시종일 뿐이니까."



그의 말을 몸으로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는 나에게


자신의 외투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했던 것이다. 자신의 하인에게 그렇듯 전혀 주저하지 않는 당연한 태도에 난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보니 내가 무심코 집어 입었던 옷도 시종들이나 입는 단순한 색상의 조끼와 셔츠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멍하니 서있는 것이 안되어 보였던지 나와 안면이 있는 하녀 하나가 몰래 휴란의 외투를 가져다가 나의 손에 걸쳐


주었다. 건네주는 하녀의 시선에는 동정이 서려 있었다. 분명 나는 가문에서 쫓겨나서 휴란의 시중이나 드는 가련한 신세로


보이겠지. 뭐 상관은 없다. 난 이미 휴란과 약속한 바가 있고......또....그런데 뭐냐. 저 시선들은? 왜 일렬로 나란히


서서 동지의식이 그득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냐고!



"내가 왜......"


"뭘 꾸물대고 있는 거냐, 빨리 따라오지 못하겠나?"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해야하는 거냐!!"





퍼억.





아마도 그 당시에 반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하인을 추궁해서 그 날일을 물어본 결과 난 번쩍거리는 검은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곤 곧바로 휴란에게 덤벼들었다고 한다. 기세가 너무나 험악해서 주변의 하인들도 말릴 수 없었고


휴란도 당황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은색의 표범과 같이 우연한 동작으로(어디까지나 하인의 표현을 빌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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