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아르]붉은 여왕red queen - 1

127일전 | 595읽음



붉은 여왕(Red Queen) 1부.




- 에르아르









1.



때론 사람은 결코 원하지 않는 일도 해야하는 법이지. 설령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고 힐책하더라도 말이야. 산 자는


죽은 자의 멍에를 대신 쓰고 살아가듯 책임이란 어쩔 수 없는 법이야.



난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 그러나-.



"제길, 그딴 건 개한테나 주라지!!!!!!!!!!!!!!!"


"슬레온!"



사랑스런 엘그란, 나의 사랑스러운 숙녀.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런 슬픈 표정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결코 눈물짓게


만들지 않으리라 약속했는데 난 벌써 약속을 깨뜨리고 말았다. 난 노기를 삼키며 초조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까지 비를 내리던 날씨는 어느새 곳곳에 작은 도랑만을 남긴 채로 개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가문의 묘지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간 날은-.


회색 이끼가 덕지덕지 붙은 석관에 한 때는 근방 뭇 귀족들을 호령했던 그 위풍당당하던 사람이 들어갔다. 마크엔 엘


린덴마이어 공작. 대륙에서도 열 손가락 꼽히는 세도를 지닌 린덴마이어의 전대 가주, 그리고 나의 아버지였던 그.


종종 이미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유언을 남기고 산 자를 속박한다. 그러나 아무리 나의 아버지라 해도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살아 있을 때도 결코 사이좋은 부자간은 아니지만 죽어서까지 날 엉망으로 만들 셈이야? 빌어먹을


아버지. 난 적어도 당신에 대해 다소의 동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에게 복수를 하다니.


제길, 제길!!



나와 같이 창 밖을 바라보던 엘그란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슬레온..........나............유언에 따르기로 했어요. 이미 부모님께도 말씀드렸고요."


"가지마."


"슬레온........."



그녀는 애처로운 시선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항상 연약하고 바람불면 날아갈 듯 가냘픈 그녀가 그런 눈으로 날


보다니.......상상도 못해봤다. 한 마디로 기분이 엿 같다. 살구 색의 화사한 보닛과 허리선을 강조하는 풍성한 라인의


드레스, 그 속에서 사기 인형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한 그녀가 슬프게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데 이렇게 떠나보내라고? 엘그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항상


장미송이 같이 부드러운 입술은 나의 것이었는데 이젠 나의 형의 것이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난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허리를 펴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미미하게 저항했지만 곧 나의 품안에


떨어졌다.



"사랑하고 있어, 엘그란."


".....슬....레온."



나의 품에 안긴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의 떨림이 내 팔에 확실히 전달될 정도로 그녀의 가냘픈 몸은 낯선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떨어? 왜? 넌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손을 들어 내 가슴을 밀어냈다. 난 방금 깨달은 사실 하나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너.....................설마.............형에게 안긴 거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체로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정곡이었던 말이군. 아주 미약하지만 난 그녀의 몸에서


형이 자주 쓰는 향수의 냄새를 맡았다.



"슬레온...................난.."


"하하....최악이군....최악이야. 난 이제 겨우 가문에서 돌아왔는데 나의 아버지는 날 가문에서 내쫓기로 하고...........


나의 사랑하던 약혼녀는 이미 형의 품에 안겼다고? 그것도.........아버지의 유언이 발표된 지 겨우 2시간도 체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 나에게 변명해봐, 엘그란.



네가 기꺼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겠다는 것도 설마 그 때문인가?"



그렇다.


난 현재 가문에서 완전히 축출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아무런 재산도 영지도 하인도 없이-. 바로 두 시간 전에


아버지의 유언이 발표되었을 때 난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 평소 행동이 방탕하다고 소문이 났어도, 그


때문에 유배를 당했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필시 유언이 잘못된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무 조건


없이 날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배반을 해? 형님의 품에 안겨? 그제야 우울하기까지 한 감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하.....고맙군, 그래. 이제 난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란 말이지? 여태까지 교태를 부리며 나에게 안겼던 건 혹시나


내가 보석이라도 던져주길 바래서 그랬던 거야?"



내 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해진 그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가증스러운 여자. 저것도 필시 연기이겠지. 나의 동정을 사기 위한-.


그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인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있었다. 난 히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칼이 유난히 무겁게 어깨를 덮었다.



"스.........슬레온...."


"그래.......형님의 품은 어땠어, 엘그란? 달콤했나? 그랬겠지. 그는 대륙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미남이니까. 겉으론


비리비리 해 보이는 데 의외로 테크닉이 좋았나? 말해봐, 엘그란. 같은 형제의 품이라 느낌이 색다르던가?"



난 서슴없이 불량배들이나 지껄일 것 같은 음담을 늘어놓으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의 커다란 푸른


눈동자에서 뚝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원망의 눈으로 날 보고 있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의 시선에 상처받지 않았다. 아니 상처받을 수 없다. 절벽 끝까지 떠밀린 자에게 올라갈 길이란 없으니


말이야. 이렇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녀에게 감사해야 할까? 그녀는 나의 위험한 기세를 느끼고


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지금 나의 눈동자는 평소의 회색에서 새까맣게 타오르고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내 눈을


보고는 악마의 눈이라고 했다. 제 어미라도 잡아먹을 것같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재수 없는 눈이라고 했지. 여태까지


내 이런 눈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단 한 명 있었군.


바로 나의 형. 잘나디 잘난 귀족의 명예를 짊어지고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휴란 엘 린덴마이어. 나의 배다른 형.



그를 떠올리자 난 새로이 불쾌한 기분이 더해져서 거의 그녀를 죽일 듯 구석으로 몰아갔다. 순결하고 고아하리라고 믿었던


엘그란에게 그가 손을 댔다고 생각하면 당장 죽이고 싶다.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이 순진한 양 같은 눈동자를 후벼내고


싶다. 부드러운 암갈색 눈동자와 장밋빛 뺨을 가진 그녀는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낯설고 흉폭한


짐승을 보는 듯 두려움에 가득한 눈동자가 내 잔인한 본성을 더욱 자극한다. 내 손은 천천히 그녀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멈춰라, 슬레온."



나의 이성을 현실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건 흡사 지옥에 있더라도 침착할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무렵 엘그란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벌벌 떨며,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내 손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야차처럼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벽에 몰아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최악이군.



분명 나의 잘나신 형님은 나를 비웃고 있겠지? 짐승처럼 여자를 죽이려 했던 나를.


그리고 이젠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을 내세우는 나를.


난 이를 갈며 돌아섰다.



"아니 이게 누구시더라. 린덴마이어 가의 새로우신 주인인 휴란 경 아닙니까? 큭큭.....죄송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더럽혔군요. 아마도 새로운 연인과 기쁨의 재회를 하는 자리일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난 비아냥거리며 한껏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형은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 왔는지 차분한 모습으로 방


중앙에 서있었다. 행동거지 하나 하나 거칠고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나와 달리 지극히 단정한 모습의 그는 냉랭하게


나와 엘그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깎아 내린다고 해도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닌 남자다. 달빛 같은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긴 머리칼과 조각해놓은


것같이 또렷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눈동자는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같이 투명한 은빛이다. 이미 돌아가신 새어머니를


그대로 빼다 박은 그 화사하면서도 차가운 미모. 그는 붉은 선을 그리는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속삭였다.



"엘그란. 잠시 나가 주시겠습니까? 난 잠시 슬레온과 할 말이 있군요."



그는 더 이상 질문의 여지도 주지 않고 몸을 슬쩍 비켜섰다. 엘그란은 잠시 주저하다가 힐끔 날 바라보고는 문으로


달려나갔다. 문이 닫히자 난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거칠 것 없이 무서운 것 없는 내가 유일하게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나의 잘나신 형이다. 그는 항상 어느


한 군데 어긋나지 않는 예의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날 대하지만 오히려 그게 날 두렵게 한다. 그가 오싹하리만큼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날 응시할 때면 난 마치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 된다. 제길-.



난 그의 시선을 맞받아 치며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말 대신 천천히 나에게 다가섰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 건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슬레온."








2.



무려 4개월만에 보는 형의 모습이었지만 전혀 달라진 거라곤 없었다. 나를 처음에 린덴마이어에서 내쫓을 때의 그 꿀릴


것 없는 당당함과 위엄.


빌어먹을...그래. 나 역시 인정하긴 싫지만 그가 나보다는 훨씬 린덴마이어가를 잘 이끌어 갈 거란 걸 알고 있다.



애초부터 그는 백작 가의 영양이기도 한 나의 새어머니의 정통한 핏줄을 타고났다. 나같이 술집 작부 출신의 어머니보다야


몇 배나 훌륭하고 몇 배나 고귀한 신분이겠지.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도 그는 전형적인 귀족의 우아함과 늘씬함이


있다. 그에 반해 난 햇빛에 그을리지 않았어도 갈색 빛을 띄는 거친 피부와 노동자 같은 선이 굵은 체격을 지녔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넌 린덴마이어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말을 지껄이는 놈이 있다면 엎어놓고 패주기도 했다. 린덴마이어 가문이 대륙에서 몇 안 되는 공작가문이란 걸


생각해보면 맞는 그네들도 항의할 수도 없을 수밖에. 미친 척,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가문의 영광을 등에 업고 살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우아한 공작가의 핏줄 흉내내는 것보다는 평민들하고 어울리는 게 체질에 맞기도 하다. 그래서 여태까지


가문의 패륜아, 미친 놈. 별의 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도 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밥그릇을 빼앗으려 들어? 난 입술을 비틀며 고고하신 나의 형에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이제와 가문에서 나가달라는 말씀입니까?"



엘그란을 떠올리면 그의 잘난 면상을 한 방 갈기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한껏 뒤틀리고 비뚤어진 나의 인생 속에


유일하게 정상적인 구역이 있다면 바로 엘그란과 관련된 일이었다.


귀족 아가씨지만 누구보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씨....나의 이름이 아닌 내 본 모습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한 순간의 순수.


그러나 그건 이미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강한 척 당당한 척 하지만 이미 꼬리 내린 개꼴이다. 싸워보기도 전에 '졌다..'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나의 형인


이상 승리란 없으니-.






그의 눈이 한 순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여겨졌다. 그의 눈은 동공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은색의 얼음 조각 같다.


잡티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눈동자. 그 앞에서 난 항상 주눅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격렬한 분노로 인해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순간적이지만 그가 웃는 것 같다는 건 내 착각이었나?



"가문에서는...."



그가 말을 꺼내자 우리 둘 사이에 놓여있던 기묘한 침묵이 걷혔다.



"널 축출하라고 하더구나. 특히 나의 외가에선 널 외지로 보내라는 말까지 있었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난 앞 뒤 가리지 않고 입술을 비틀며 대꾸했다.



"그런 좋은 후원자가 있으니 당장 날 내치시겠다는 말씀이시겠군요. 맘대로 하십시오, 형님. 아니......감히 나 같은


패륜아를 동생으로 삼기에는 린덴마이어의 이름이 더럽혀지니 귀족 나으리. 날 당장 가문에서 내쫓으십시오."


"아니.....난 기회를 주기로 했다."


"........?"



난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했다. 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그가 다시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네가 린덴마이어의 핏줄이긴 하나 실제로 가문의 의무를 다한 적은 없었지. 그건 아버지가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 달?"


"그래. 네가 린덴마이어의 핏줄임을 나에게 증명해라."


"......어떻게?"



난 선생의 말을 듣는 착실한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말에 순순히 답하고 있었다. 그가 던진 제안은 솔직히 너무나


의외라서 난 아직도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 달간 내 시중을 들어라. 아침부터 밤까지 내 공적 업무는 물론 개인적인 생활까지 항상 옆에 붙어 있어라. 네가


린덴마이어의 이름에 어울릴지 안 어울릴지는 내가 판단해 주겠다."



난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올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그의 몸은 마치 내가 주먹을 날릴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왼쪽으로 몸을 슬쩍 돌려 내


주먹세례를 피해버렸다. 그리곤 무게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내 몸을 오른 팔로 받쳐들었다. 그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는 달리 꽤나 좋은 체격을 지니고 있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받쳐든 팔에서 느껴지는 건 단단한 근육이다. 하긴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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