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9

127일전 | 127읽음


“ ...어..어!”




무너지듯 땅바닥에 쓰려지려는 그를 간신히 껴안아 붙들 수 있었다.




- 기절했군. 하긴. 그 상태로 살아있는 것도 용하긴 하다만.



“ 으으....어떡해요? 그럼 이제!”



- 흥. 네가 고집을 부려 거둔 것을 나보고 어쩌란 거냐.



“ ....너무해요!”




매정한 대답에 울상을 지었지만 그런 나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골목길 저쪽으로 눈을 돌렸다.




- 방금까진 시간이 뒤틀린 공간에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젠 아니다.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다.



' 크..큰일이다아!’




으슥한 골목길에 낭자한 피와 잔인하게 살해된 시체 한 구, 덤으로 발목 뚫린 남자까지. 그 곳에 기절한 파예를 안고 있는, 유일하게 팔팔한 소년 한 명.




‘ ...으아! 딱 오해하기 좋잖아!’




제국 아카데미에 가기도 전에 이 무슨 얼굴 팔릴 대형 사고란 말인가! 라이작의 싸늘한 얼굴이 떠오름에 나는 혜안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인페르노를 바라봤지만 ‘난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잘해봐라.’ 하고 말하더니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인다.




‘ .....언젠간 대장간에 비싸게 팔아먹을 테다!’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서점 뒤편의 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비상구로 사용했을 법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단검으로 문을 막아놓은 자물쇠를 잘랐다. 툭 떨어진 자물쇠를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그의 허리를 휘둘러 어깨에 걸친 뒤 열려진 문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뼈밖에 안 남은 체형이라 그런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아 수월하게 옮길 수 있었다. 아니...그래도 키가 대충 180은 넘어 보이는데 이렇게 가볍게 들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내 힘이 세긴 센 거겠지.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곰팡이와 먼지가 가득한 쪽방에서 나가고자 안쪽 문을 열었다.




“ ....아니, 도련님! ....왜 거기서 나오시는...? 그..그리고 그건 대체 누구..?”




나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서점 주인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 ......이 사람이 노상방뇨 하던 것을 잡았어.”



“ ....네에에?”




더 이상 동그래질 수 없다는 듯이 커진 눈은 추가적인 설명을 필요로 해 보였지만 나는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쳐 책장 아래에 블레이크를 내려놓았다. 내 연기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서점 주인은 갑자기 싸늘해진 귀족 손님에 안절부절 못하며 있다가 훼이른이 들어오자 살았다는 듯이 판매대로 달아났다.




“ ....라스넬님. 이 사람은 누굽니까?”



“ 내 파예야.”




과연 보르크 가문의 총 집사!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그는 꼬치꼬치 묻지 않고 묵묵히 파예를 내려다보았다.




“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이는군요.”



“ 응. 치료가 가능할까?”



“ ...치료야 가능합니다만...혹시 아카데미에 데려가실 생각이시라면...”



“ ....아니. 그건 아니야.”




기간도 얼마 안 남은 데다 그 동안에 블레이크가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어차피 혼자 가려고 했던 거니까.




“ 알겠습니다. 저택에 돌아가는 데로 치료사를 불러 치료하겠습니다.”



“ 응. 고마워. ....근데...집에 가기 전에 잠깐 노예 상회에 들릴 수 있을까?”




궁금한 눈빛이었지만 곧 그렇게 하겠다고 하며 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불러 블레이크를 옮겼다.



아까 살펴보았던 책들을 계산하면서 나는 눈가에 힘을 주어 서점 주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라는 느낌을 듬뿍 담아서. 이번엔 내 카리스마가 제대로 통했는지 서점 주인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상회에 도착하자 통통한 노예 상인이 쪼르륵 달려 나와 함박웃음으로 우리를 맞았지만 내가 제인을 불러달라고 하자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혹시...제이언 무샤크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상회 총단님이신?”




본명을 몰라 나는 ‘아마도..’라고 머뭇거렸다.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대기실 밖으로 사라졌다.



5분도 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 다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 ....저도예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그는 내게 파예를 사기 원하냐고 물어봤다.




“ ...그때 봤던 파예 말이에요.....”



“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거짓말! 다 알고 있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른 척 하는 모습에 조금 울컥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 그때 그 하급 파예요! 검은 머리에 상처투성이였던!”



“ ...아아! 그 녀석 말씀이시군요. 근데 그 녀석은 이미 팔렸습니다만..”



“ 누가 사갔죠?”



“ .....죄송합니다만 손님에 대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신용이 달려있어서요.”




그러면서 싱긋 웃는다. 보이지 않지만 단단하게 처진 심리적 장막에 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솔직하게 나가야겠지?




“ ....그 파예 지금 저한테 있어요.”



“ ......그렇군요.”



“ 간신히 살아있는 상태에요.”




그러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지만 눈에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원숙한 삶의 깊이가 가득한 그 눈은 내가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종류였다.




“ ....저는 상인입니다. 이익과 실리를 추구하며 장사를 하죠. 지금 제 위치에 오기까지 저는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뻔히 어떤 용도를 쓸 것인지를 알면서도 냉혹하게 노예를 팔아야 하며, 죽을 것인지 알면서도 이윤이 남도록 계산을 해야 하죠.”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어딘가 씁쓸한 미소였다.




“ ...하지만 상인이기 전에 인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노예나 파예를 물건처럼 판매한다고 해도...그들이 잘 됐으면 합니다. 좋은 주인님을 만나 행복했으면...바라죠.”



“ ....노예란 상태 자체가 그렇게 만들기 힘들 거 같은데요.”




뚱하게 반문하자 그가 이번에 껄껄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말도 맞지요. 확실히 ‘노예제도’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만....하지만 쉽게 없어질 제도도 아니고 또 제가 개혁가나 혁명가가 아닌 이상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몽상가라도 될 수밖에.”




자조하는 말투에 조금 미안해졌다. 사실 나도 그렇게 말했지만 노예제도를 없애겠다! 뭐 이런 포부가 있는 건 아니니까.




“ ...상인에게 있어 감이란 참 중요하죠. 제가 도련님께 그 하급 파예를 보여줬던 것도 바로 그 ‘감’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날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여태까지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 그 파예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많은 걸 겪은 녀석입니다. 이젠 녀석도 좋은 주인님을 만날 자격이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말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컴컴해진 저녁 하늘이 물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 이거 받으십시오.”



“ ....이건...”



“ 아까 무기점에 들려서 산 것입니다.”




격자무늬가 들어간 가죽재질의 검집이었다. 왠지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으니 훼이른이 설명을 덧붙인다.




“ 자체 방수마법이 걸려있는데다 무크 가죽으로 만들어져 신축성이 아주 좋습니다. 단검 크기지만 장검도 무리 없이 들어갑니다.”




순간 놀라서 훼이른을 쳐다보았다. 훼이른은 그런 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 ...저도 집사이기 전엔 소드 마스터를 꿈꾸는 검사였습니다. 도련님의 단검이 무엇인지 첫눈에 파악할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범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겠더군요. 그리고 도련님의 옷자락이 탄 걸 보고 혹시나 해서..”



“ .....말하지 못해서 미안.”



“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멋대로 추측해서 드리는 것일 뿐이니까요.”




배려 가득한 말에 나는 정말 마음 속 깊숙이에서, 어쩌면 예전 라스넬도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을,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 ....고마워.”




따뜻하게 마주 바라보는 눈동자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에 나는 일부러 부산스럽게 단검을 꺼내 검집에 주섬주섬 넣었다. 단검에서 미세하게 진동이 전해졌다.




‘ ....좋다는 걸까?’




다시 허리춤에 매달아 놓고는 나는 훼이른을 보았다.




“ ....저기, 그럼 다른 사람들도...이게 뭔지 알아볼까?”




훼이른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지금까지 이 검을 가주님 외에는 관심을 가진 이가 없었지요?”



“ 응.”



“ 그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제국에서 가주님과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분들은 3대 가문의 수장과 기사단장정도 뿐인데...그 분들은 웬만해선 만나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뭔가 떠올랐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 제가 소드 마스터는 아닙니다만....오러를 보는 감각은 검술에 비해 상당히 발달되어 있는 편입니다. 저처럼 오러나 마나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면 검에서 풍겨지는 미약한 기를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 ...음. 그런 사람들이 아카데미에 있을까?”



“ 글쎄요. 뭐라 말씀드리기 참 힘드네요. 개인차가 있는 데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그래도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도련님이 누군지 모르는 한, 그저 좀 좋은 무기를 가졌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기가 서려진 무기는 흔하진 않지만 그래도 희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곤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의 귀족들이라면 아마 대부분의 무기가 그러할 것이라고 덧붙여서 내 불안을 잠식시켜줬다.



저택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나는 라이작과 잠시 대면해야 했다.




“ 그래. 책을 사러 가서 시체를 하나 구해왔다고?”



“ ....파예요. 그리고 살아있는데요.”




아마도..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이자 그가 별 상관없다는 얼굴로 내게 얇은 책 한권을 건넸다. 이게 뭐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내가 앞으로 위장할 신분을 위해 필요한 자료라고 한다.




“ 충분히 숙지하도록.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 않다면.”




책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무언가 쓰여 있었다.




[ 라스 말라테스타 ]




“ ..........”



‘ ....무슨 국수 이름도 아니고...’




어색하게 글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라이작이 설명했다.




“ 과거에 우리 가문과 잠깐 왕래가 있었던 집안이다. 평민의 신분으로 페르모 전투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귀족의 지위를 얻었지만 정계에 관심이 없어 일찍이 유테카 산맥 변두리에 자리를 잡았지. 지금은 화전으로 먹고 산다고 하더군.”




...화전이라면 설마 그 산에 불을 지른 뒤 농사를 짓는 거? ...여기에도 그런 농법이 있구나. 신기해하며 나는 역사 수업에서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페르모 전투라면....190년 전에 있었던 쉐버린 제국의 내전을 말하는 거였지? 1황녀와 4황자가 페르모 계곡에서 벌였다던.




“ 현 말라테스타 가주에게는 아들이 셋 있는데 두 명은 어렸을 때 전염병으로 죽고 막내만 살아있다. 그러나 그 하나마저도 아파서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하더군. 네가 그 신분을 이용하게 될 거다.”



“ 저랑 이름이 비슷하네요.”



“ 이름은 일부러 바꾼 거다. 네 애칭으로. 성만 그대로 두고.”




....어? 하지만 귀족명단이 있어서 그렇게 맘대로 바꿀 수 없지 않나? 의아함에 나도 모르게 라이작을 바라보는데 그가 눈치 채고 설명을 덧붙였다.




“ 아들들이 어린 시절에 죽어 막내아들도 그러리란 생각에 따로 올려놓지 않은 거 같더군. 솔직히 그럴 걸 일일이 신경 쓸 형편도 못 되고.”




왠지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거리니 라이작이 이제 가보라고 한다.




“ 그 검집은 못 보던 것인데.”




문을 나서려다가 중얼거리듯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훼이른인가? ....괜한 짓을 하는군.”



‘ ....괜한 짓?’




훼이른의 진심이 비난받았다는 생각에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런 내 반응이 신선하다는 눈빛을 띠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냔 듯이 원래의 냉혈로 돌아갔다.




“ 화염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몇 개 보존되어오는 게 있지. .... 화염검을 진정으로 부리는 자에게는 그 어떤 걸작의 검집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 무슨 말인가요? 그게?”



“ 글쎄. ....하지만 지금 네게는 ‘검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군.”




선문답도 아니고 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요? 나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철푸덕- 몸을 던졌다. 푹신한 쿠션감이 느껴지자 온 몸이 노곤하게 늘어진다.




“ .....인페르노. 자요? 안 자면 잠깐 나와 봐요.”



- 뭐냐.




언제 봐도 현란하다. 하얀 침대에 대비돼 더 화려히 빛나는 불의 검령을 쳐다보았다가 나는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아하게 휘어진 아치형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 아까 라이작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 ‘검집’ 이야기 말이냐?




다시 인페르노를 바라봤다. 긍정의 의미였다.




- 네가 나를....




나를...? 뭐요? 갑자기 말이 끊김에 내가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인페르노가 나를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가려진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읽혀졌다.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 ....네가 나를 완벽히 소유하게 되면 검집은 그야말로 필요하지 않다. 진짜 검집은 따로 있으니까.



“ ...진짜 검집? 그게 뭔데요? 그리고 소유하다니, 뭘 어떻게 완벽히 소유하는데요?”



- 네 마력이 내 마력을 뛰어넘고 나를 온전히 네 기술만으로 다 부릴 수 있게 되면 나를 소유할 수 있다. ...그때 되면 검집은 저절로 알게 될 거고.




그럼..지금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 ....그렇다면 우리 관계는 동반자 또는 동거(?) 뭐 이런 건가?




“ 흐음. 굳이 그렇게 소유해야 하나요? 진짜 검집이 필요한가?”



- 너는 비할 데 없이 약하다.




또 나를 놀리는가 싶어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았지만 인페르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 지금 네가 그 재수 없는 검을 든 가주와 부딪치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내가 어찌해볼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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