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8

190일전 | 510읽음

비명을 지르며 그 검은 물체를 본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와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시체.



그 끔찍한 장면에 얼어있던 나를 깨운 것은 허리춤을 흔드는 강렬한 진동이었다. 나는 서둘러 단검을 빼어 들고 앞을 바라봤다. 엎어져 있던 검은 물체가 무형의 힘에 이끌려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 파묻혀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일단 사람인 건 확실했다.




‘ .....악귀에 쓰인 모습만 빼면 말이지’




그의 전신을 휘감은 시커먼 기류가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순식간에 뻗어갔다.



푸슉!




“ ...아악! ..사..살려...”




쿵!


달려가는 이의 발목을 꿰뚫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넘어져 기절했다. 뒤따라오던 다른 기류가 정신을 잃은 그의 목을 뚫으려는 듯 빠르게 아래로 뻗어갔다.




‘ 안 돼!!’




스왁!


뻗어가던 기류를 서둘러 자르자 잘린 부위가 뜨거운지 본체와 연결되어 있던 기류 전체가 요동친다. 그렇게 몸부림치던 기류는 잠시 잠잠해졌다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모든 기류를 뻗어왔다.




‘ 으아앗-! 치..치사해!“




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여섯 개의 검은 줄기를 보며 나는 단검을 꽉 쥐었다. 단검이 좀 더 길었으면....! 막 가슴을 뚫으려는 기류를 반토막내며 생각할 때, 갑자기 단검에 확! 불이 붙었다.




‘ ....장검이 됐잖아?’




불꽃이 잦아들자 어느새 내 손에는 갓 출시된 거처럼 번쩍이는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딴 생각할 새도 없이 기류는 바로 내 머리를 향해 찔러왔다.




“ 캭!”




간발의 차이로 머리를 숙여 피하고는 얼른 검을 휘둘렀다. 검에 잘려 떨어진 기류는 힘을 잃은 듯 부르르 떨더니 사라져갔다.




‘ ....그렇다면!’




예전의 나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빠르게 기류의 본체를 향해 달렸다. 중간 중간 공격해 오는 기류를 잘라가며 검은 기류에 휩싸여 이제는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갔다. 예상대로 됐음에 기뻐하며 나는 다시 후려치기 위해 검을 뒤로 뺐다.



휙!




“ 으앗!”




죽지 않은 기류하나가 내 등 뒤를 찌르려는 듯이 뻗어오고 있었다. 허를 찌른 공격에 뒤로 뺀 검을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기류를 잘랐지만 발이 꼬여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 ...어..어어어...! ..부..부딪친다아앗!!“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구체를 보며 다가올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포옥.




‘ ....잉? 포옥?’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감촉에 눈을 뜨자 웬 흰 벽이 보인다. 군데군데 푸른빛이 도는 흰 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올리자 검은 머리에 반쯤 가려져 있는 창백한 얼굴과 텅 빈 눈동자가 보였다.




‘ ...이..이건...’




후다닥 물러서며 겁에 질려 외쳤다.




“ ...귀..귀신이..!”



- 너는 틈만 나면 귀신이라고 해대는구나.




언제 인간화 한 건지 검은 형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추하게 벌벌 떠는 나를 인페르노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 .....귀신 아니에요?”



- 귀신은 아니다.



“ ...정말?”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라는 의심 가득한 눈을 하자 인페르노의 주위가 불길로 넘실된다. 산채로 통구이가 되기 싫었던 나는 얼른 눈을 깔며 주위를 둘러봤다.




“ ....여기가 어디에요?”




사방이 온통 까맣다. 무기 창고의 어두운 공간보다 더 캄캄한, 한 치의 빛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암흑. 한 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어 보이는 그런 새까만 어둠에 저절로 몸이 떨려온다.



이런 내 떨림을 알아챈 듯 인페르노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뿜어지는 따뜻하고 밝은 빛 무리는 내 떨림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 ...고마워요.”




그는 오만한 얼굴로 별거 아니란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아까보다 더 환하게 밝혀준다.




‘ ....인간 개똥벌레 같다고나 할까..’




그가 알았다면 무기창고 네댓 개는 태워먹었을 무서운 생각을 하며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인페르노는 대답 없이 내가 귀신이라 오해했던 사람을 보고 있었다.




“ 왜 그래요?”



- .....특이한 인간이다. 보통 인간들은 감지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몸 안에 가지고 있다.



“ 전 감지했잖아요?”



- 너는 예외다! 이미 날 봤다는 자체가 네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는 증거지. ......너는 이상할 정도로 특이한 기운을 잘 알아챈다. 저번에 그 ‘재수 없는 검’을 한 번에 알아본 것도 그렇고.




재수 없는 검이라니..? 폭풍검을 말하는 건가?




‘ .....근데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뭔가 이상한 거야...?’




내 얼굴에 뜬 불안감을 읽었는지 인페르노는 그래도 허약하다는 면에선 다른 인간과 똑같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다. 쳇! 그게 뭐야.




- 이 공간은 저 인간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거 같군. ....근데 뭔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아. 마치 혼이 빠져나간...시체 같군.





그 말에 호기심을 느낀 나는 아까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귀신에 대한 완전히 의심을 풀지 못한 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그를 관찰하던 나는 그의 얼굴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그러지?



“ 아니...그게 꼭 어디서 본...앗!”




생각났다! 일주일 전 노예상회에서 본 그 하급 파예잖아!?



그의 상태는 그때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아까 단편적으로 들려왔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아까 실험 어쩌고 하던 게 바로 이 파예를 가리키던 거였나? 마법 대상체로 쓰고 죽으면 소멸시켜 흔적을 없애면 된다고 하던...




-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나가야 한다. 시간과 순리가 비틀어진 이 공간에 오래 있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인 너야 말할 것도 없고.



“ 나갈 수 있어요?”



- 당연한 걸 묻는구나. 인간이 만든 공간 따위가 내 화염을 가둬둘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정도는 내 마력만으로도 소멸시킬 수 있다.



“ ...소멸?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요?



- 당연히 함께 소멸되지.



“ 에엣! 그건 안 돼요! 안 죽이는 방향으로 해요!”




강렬한 반대에 인페르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너를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다. 왜 신경을 쓰는 거지?



“ .....뭐랄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남아있다고나 할까요....”




그때 그를 샀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때 결정에 엄청난 후회가 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심상 조..조금 찔리는 게 있으니.




- 별 시답잖은 이유도 다 있구나. ....하지만 너를 공격한 죄는 크다. 감히, 내가 선택한 이를 죽이려 했다니!



“ ...그...그 사람 의지가 아니었을 거예요! 아까 인페르노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혼이 빠진 거 같다고... 그러니까...”




그를 살리기 위해 우물쭈물 변명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 그럼 인페르노가 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뭐에요?”



- 간단하지 않느냐. 이 공간을 연 자가 파훼시키면 되는 거지.



“ 의지가 없다면서요! 어떻게 공간을 없애라고 말해요!”



- 그럼 그냥 소멸시키던가!



“ 냉정해!”



-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거냐!




이크! 눈에서 불꽃이 쏟아질 기세다. 재빨리 파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과 사를 오가는 논쟁에 서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처음 봤을 그 모습 그대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만약 파예가 뭔지 몰랐다면 틀림없이 그를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온 몸에 난 상처와 뼈가 들어난 앙상한 체격.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 ...파예를 대기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 그게 파예였던 거냐. ....하긴, 그럼 저 무의지의 육신이 설명되는군. .....파예와의 계약이라면 입을 맞추면 될 거다.



“ ..........”




물끄러미 인페르노를 바라봤다.




- 뭐지? 그 기분 나쁜 눈은?




고운 이마에 혈관마크가 솟아나는 것을 보며 얼른 눈에 힘을 풀었다.




“ ....농담이 아니라 진짜...그....맞춰야 한다구요?



- 네가 널 상대로 농담을 해서 뭘 하겠느냐! ....200년 전에도 그리 했으니 지금도 그렇겠지. 쉽게 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



“ 입을 그냥 맞추기만 하면 돼요?”



- 이름을 붙여주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춰야 할 거다.



‘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해야 한다고?!’




나는 눈앞에 파예를 지그시 노려봤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인페르노가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빨리 결정하라고 한다.




“ ...인페르노가 하면 안 돼요?”



‘ 일단 무성인데다 검이니까 남자와 하는 것도 부담 없어 보이고.....’




주절주절 그래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는데 그야말로 인페르노 주위에 화염이 솟구쳤다.




-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날 볼 수 있는 건 너뿐이라는 걸 잊은 거냐?! ...됐다! 어차피 나도 네가 이런 이상한 노예를 구한다고 설치는 게 내키지 않았으니, 그냥 소멸시켜 버리겠다!



“ 아..알았어요! 할게요, 바로 한다니까요!”




금방이라도 불꽃으로 일으켜 모든 걸 태워버릴 기세에 나는 수척한 파예의 얼굴을 잡았다. 시체처럼 차가운 피부가 만져지자 소름이 돋았지만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에 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재빨리 누르고는 다음 절차(?)를 기다렸다.




“ .........”



- .........




...아....아무 변화 없는데? 이대로 그냥 이름을 말하면 되는 건가?




- ....너 지금 뭐하는 거냐.



“ ...그...입을 맞추라면...서요...”




인페르노의 어이없다는 눈빛에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 입을 맞추랬지 누가 입술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냐?!



“ 캭! 그...그 말은 지금 나보고 키스하라는 뜻?!”



- ...흥. 완전히 바보는 아니구나.



“ ....하지만!!...난 미성년자인데다... 그..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남자한테, 그것도 이렇게 굳어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해요?!?”



- 성인식도 치른 녀석이 미성년자는 무슨. ......못하겠으면 됐다. 그냥 간단히 소멸해....“



“ 이잇! 알았어요! 잠깐...잠깐 준비할 시간을 줘요!”




어느새 불꽃으로 휩싸인 손을 휘두르려고 함에 나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막았다.




‘ 날 이딴 이상한 차원으로 보낸 사람, 아니 존재들! 죽으면 악귀가 돼서 평생 괴롭혀줄 테다!!’




굳게 다짐하며 나보다 최소 10Cm는 더 높게 자리 잡은, 핏기 없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이왕 사람 하나 살리기로 한 거 눈 딱 감고 하자! 다시 그의 뺨을 감싸고서는 인페르노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은 뭐냐고 되묻는 눈빛에 나는 뒤로 돌아봐 달라고 했다.




- 뭐?



“ .....하지만 부끄럽단 말이에요! 누군가 보고 있으면....”



- 무슨 그런 유치.....하! 됐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화를 참으며 인페르노가 돌아서는 것을 본 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까치발을 했다.




‘ ....일...일단 이론(?)대로 가야겠지?’




볼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듯이 머금고는 빨아올렸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그의 차가운 입술에 포개며 눌렀다가 혀로 살짝 핥았다. 이래도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 굳어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려졌다.



그에 용기가 난 나는 혀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생각과는 달리 따뜻한 안쪽 온도에 만족하며 아래에 경직된 채로 있는 혀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파릇한 빛이 돌기 시작한다. 서서히 푸른 눈동자가 생기를 찾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손을 내리고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앞에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나를 인지하고는 나의 노력(?)으로 살짝 벌어진 입을 움직였다.




“ 주인님의 성함은...?"




탁하고 거친 목소리였다.




“ ....라스넬 체 보르크.”



“ 제 이름은...?”



‘ 헉! 생각 안했다!’




내 대답만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그를 보며 얼른 머리를 굴렸다. ...으으? 뭐가 좋지?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머리가 백지 상태가 된다. 끙끙- 되고 있으니 다시 그에게서 질문이 들려왔다.




“ 제 이름은 무엇입니까?”




까만 머리와 심해를 닮은 눈.



멍하니 보고 있자니 잊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 하나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내게는 이제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된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던 사람.




[ 만약에 내가 외국인과 결혼하게 되면 아들은 블레이크라고 짓고 딸이면 엘리자베스라고 지을 거야.]



[ 뭐냐! 그 뜬금없는 설정은.]



[ 약자가 마음에 들어서. 엘리자베스는 린지라고 부르고 블레이크는 레이라고 부르면 되더라고. 어때, 멋지지? ]






“ ....블레이크. 네 이름은 블레이크야.”




그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누군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남잔지 여자인지도. 뿌연 안개가 낀 거처럼 기억들은 희미했고 퇴색되어져 있었다.




‘ ....어쩐지 우울한 걸.’




침울해진 나와는 상관없이 생기를 찾은 그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블레이크’라 다시 한 번 중얼거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서 빨리 마무리를 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이마에 한줄기 땀방울이 흘렀다.




“ ...저기..눈 좀....감아줘.”




내가 남자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다니! 볼이 마구마구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듣는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을 감았다. 그 담담한 태도에 용기를 얻은 나는 빨리 끝내자는 생각에 입을 부딪쳤다.



아까와 달리 따스한 입술과 숨결이 느껴지자 온 몸에 닭살이 돋았지만 얼른 혀를 움직였다. 이미 한차례 경험했던 바, 속전속결로 열려진 입 안에 딱딱하게 가라앉아 있는 혀를 건드렸다.



툭.



가슴이 뜨거워진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심장을 감싸고돌며 옭아매는 기분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팍! 하고 검은 공간이 터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이 아파 찡그리는데 그런 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륵!


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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