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6

162일전 | 348읽음

니.




“ 알고 싶으냐?”



“ ...뭐. ..그..그렇죠.”




...뭐지? 이 반응은. 다시 되묻는 그에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했더니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 그 비밀은 가주에게만 전해진다.”




...그 말인즉, 내가 가주가 된다면 알려주겠다는 소리? 아니면 궁금하면 가주가 돼 바라는 의미? 그의 얼른 대답하란 눈빛에, 어설프게 웃으며 입을 떼려는데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그가 들어왔다.




“ 스완 차와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우아! 목소리도 예쁘구나. 여자답지 않으면서도 맑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톤이랄까. 내 앞에 다소곳이 우유를 내려놓는 동작도 참 예스러워 감탄하며 바라보는데 그가 어느새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란위가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빠져나가고 가주가 찻잔을 드는 것을 보며 나도 하얀 유리컵을 들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새삼 갈증을 느낀 나는 빠르게 우유를 꿀꺽 꿀꺽 삼켰다. 한 번에 다 들이키고 싶었지만 체통도 있고 해서(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쯤 먹고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꺼내려고 그를 보는데 입가에 웃음기가 걸려있다. ..어? 왜 그러지?




“ 목이 말랐나 보군.”




입 주위를 스치는 따뜻한 촉감에 나는 잠시 멍해있었다. 가주가 손을 뻗어 내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주고 있는....




‘ ...!!’



“ .....제..제가 할게요!”




두세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쪽팔린 내가 서둘러 뒤로 얼굴을 빼려했지만 그는 내 턱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뒤통수를 움켜쥐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 강압적인 행동에 반사적으로 주먹이 쥐어졌으나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그의 핏빛 눈동자를 피해 그저 눈을 아래로 굴리며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얼굴에 흠을 찾듯이 구석구석 살피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이렇게 보니 그 여자를 많이 닮았군.”




그 여자? ...혹시 빙족이라던 나의 생모? 근데..어째서 여자라고 부르지?



무감정하게 제3자로 부르는 듯한 말투에 왠지 기분이 상해 인상을 쓰자 그가 피식 웃고는 손에 힘을 풀고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감정 없는 톤으로 다시 물었다.




“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가주가 될 것이냐는 질문에.”



“ ...가주가 되려면 화염검이나 폭풍검의 주인이어야 하는 건가요?”



“ 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화염검이 오랫동안 주인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여태까지의 가주 후계자는 폭풍검의 가주와 싸워 이긴 후, 그 전신을 넘겨받았다.”



“ .....그럼 굳이 화염검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여태까지 폭풍검으로 잘 해왔고.”



“ 그 말은 가주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거냐.”



“ 네.”




그는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에서 이유를 찾듯 훑어보더니 다시 찻잔을 들었다.




“ 너는 아직 어리다. 가주란 이름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몰라. 지금까지는 그 논의에서 소외되어 왔던 탓도 있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멀뚱히 자신을 보는 나를 차갑지만 불타는 눈으로 응시했다.




“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다. 너는 부정할 수 없는, 화염검 인페르노의 주인. 이제 논의의 중점에 서게 된 거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



“ ......인페르노를 가졌다고 해도 전...검술도 모르고, 몸도 약하고 또 별로...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요.”




검술이라면 결국 칼로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는 거잖아?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내 변명이 유치했는지 그의 얼굴에 약간 비웃음이 들어있었다.




“ 네가 약하다고? ...그럴 리가. 너는 변했다. 네가 이곳을 처음 들어섰을 때 받은 내 기운이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느냐?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아이도 기절하거나 울음을 터뜨리고 도망간다. 하지만 너는 어떻지? 기절하지도 울지도 않고 내 기운을 맞서며 나를 쳐다봤지.”




...아니, 사실 거의 기절할 뻔했거든요? 내 힘이 아니라 인페르노가 도와 준거라 말하려는데 그가 더 빨랐다.




“ ...물론 화염검이 막아준 것도 있을 테지만. ...네가 변했다는 건 확실해. 2년 전 날 보던 눈에는 짙은 병색만 가득했는데 지금 네게선 생기와 활기, 그리고 냉기가 느껴진다.”




생기와 활기는 알겠는데...냉기는 뭐지? ...뭔가 조화롭지 못한 단어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 가주가 되라. 내가 널 지원하마.”




나는 그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화염검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초대 가주의 상징이자 보르크 가문의 진정한 무기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이런 제안을 하게 만들 만큼? ...그렇지만 그동안 버려왔던 허약한 둘째 아들이 가주가 되어 가문을 잘 이끌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실력과 선택에 의해 정해진다는 가주의 자리를 어쩜 이렇게 오만하게 나에게 되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과 의문이 생겨났지만 나는 의외로 침착했다. 가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예전 라스넬에게 말했듯이. 그거 하나는 내가 가진 확실한 진실이었다.




“ 그래도 싫은데요.”




이번에는 그가 조금 놀란 눈이었다. 곧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이 차가운 얼굴로 변해 조금 겁이 났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후회하지 않느냐. 너는 이 가문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 ‘보르크’라는 이름이 가진 위대함을 모른다. 우리 가문은 4대 가문 중에서도 으뜸이라 칭해지는 곳. 막대한 부와 무력, 그리고 황권까지 손에 쥔 이 모든 것이 탐나지 않는단 말이냐? 정말 욕심이 없는 것이냐?”



“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가주가 되기도 싫고 또 그럴 만한 그릇도 아니에요”




가주가 되면 내 맘대로 돈은 펑펑 쓸 만큼 많겠지만 수많은 책임과 의무가 따라온다. 행복과 불행이 한 쌍이 된 거처럼.




“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장담은 못해요. 모든 일이 완벽할 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도 결정을 할 땐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요. 더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내 운명으로 사랑했던 그들을 살릴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내 외로움쯤이야 무시해도 좋을 후회일 것이다.




“ ....그러니까 가주의 후계자는 되고 싶지 않아요.”




잠시 그와 나 사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 꽤나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나의 진심을 그리 단순히 평가해 버리다니! 조금 울컥해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얼음 조각 같은 얼굴로 덧붙였다.




“ 하지만 그래도 내겐, 진짜 세상을 만나기도 전에 네가 선수를 치고 달아나는 거처럼 느껴지는군. ....일단은 알았다. 네 의견은 기억하지. 하지만 지금 네가 보르크 가문의 일원인 건 자각하고 있겠지? 거기다 덤이라 말하기엔 엄청난 가문의 보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도.”




캭! 내가 원해서 갖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요!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계약 해체를 어떻게 하냐고 묻고 싶지만 지금 내 허리춤에 인페르노가 매달려 있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지! 으윽.




“ 네게 3년이란 시간을 주마. 답변을 유예할 시간인. 그때에도 가주가 되겠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마. 하지만 3년 동안은 너도 가문의 아이들처럼 교육을 받고 검술을 익혀라. 그동안 미뤄왔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허약하다는 구차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당당하게 말하긴 했어도 나는 아직 어린 나이에다 돈도 없고 경제 감각은 물론 기초 상식도 없는 상태다. 확실히 공부가 필요하긴 하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일어서서 뒤쪽 원목 탁자에서 서류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 앞으로 2년 동안은 제국 아카데미에서 수업 받게 될 거다.”




헛! ...여기서 공부하는 게 아니었나? 내가 놀란 것을 보고 그는 ‘ 가주의 후계자라면 기본 코스다.’ 라고 딱 잘라 말했다. 가주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먹힐 분위기가 아니라서 일단 그가 건넨 서류에 사인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 근데...솔직히 제가 거길 가면 가문 이미지에 별로 안 좋을 거 같은데요.”



“ 무슨 의미지?”



“ 제국 아카데미는 쟁쟁한 귀족 자식들이 올 텐데 전 정말 아는 것도 검술의 기초도 없으니.....거기 가면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요?”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했던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그가 그게 내 진심이라는 걸 알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가문의 이름보다 틀림없이 거만의 결정체일 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버려졌다는 라스넬 녀석도 그랬는데 실제 귀족들이면...어휴.




“ 그러니까 전 그냥...”




여기서 짱 박혀 하는 게...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책장으로 걸어가 두꺼운 책 하나를 꺼냈다. 한참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더니 마침내 그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그래. 네 말대로 대책이 필요한 거 같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지. 네게 눈길이 쏠렸다가 검의 정체가 들통 나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하고는 란위를 부른다.




“ 아카데미에 가려면 쓸 만한 노예가 필요하겠지? ....란위. 라스넬이 ‘파예’ 고르는 것을 도와줘라.”




순식간에 결정된 제국 아카데미 행에 멍해있던 나를 깨운 것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란위를 따라가며 나는 남몰래 긴 한숨을 쉬어야 했다. 오전인데도 밤을 샌 거처럼 무척 피곤했으므로.





마차는 잘 포장된 자갈 도로를 달렸다. 생전 처음 마차를 탄다는 사실보다 바깥세상을 구경한다는 흥분이 더 컸다. 마차 창문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 ....아. 그게. 왠지 새로워서..”




변명해야 할 거 같아 우물쭈물 대답하자 그가 싱긋 웃는다.




“ 외출을 자주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구경하세요.”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에 용기를 얻은 나는 정보 탐색(?)에 들어갔다.




“ ....저기 내가 좀....모르는 게 많은데. ....저기...파예가 뭐였지?”




그런 것도 까먹었냐 하는 얼굴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여전히 애정이 묻어나오는 얼굴로 빠르게 대답해 주었다. 그의 자세하고 쉬운 설명에 용기를 얻은 나는, 평소 궁금했던 것을 모조리 물어봤다. 그는 가주의 ‘파예’답게 정말 박학다식했다.




“ 어이고! 귀하신 분들이 방문해 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죠!”




호들갑을 떨며 노예 상인이 우릴 맞았다. 그는 우리가 타고 온 6륜 마차의 현란함을 보고 이미 재정 상태를 한 눈에 파악, 소비자 분석을 끝낸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 쓰인 ‘ 돈줄 대환영’ 메시지에 질려버린 나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그게 거만한 귀족의 자태로 보였는지 한 층 더 아부가 심해졌지만. 한 귀로 흘리며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파예’는 쉽게 말해서 노예다. 그러나 일반 노예라고 하기엔 그들이 가진 능력과 재능은 월등히 뛰어나며 그 충성도 또한 유래 없이 높았다. 그들은 후천적으로 노예가 된 평민, 노예 부모에서 태어난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노예’인 존재로 태어나는 ‘파예’란 종족(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기원은 불분명해서 역사학계에선 논쟁이 많다고 한다)으로 그들은 누군가에 종속되어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지 않았다. 아무리 노예라도 의지가 있고 소망이 있지 않을까. 노예라는 자기 처지를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나의 고민은 직접 ‘파예’를 봤을 때 사라졌다.




“ .....주...죽은 건가요?”




사람을 가리키며 손가락질 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 분의 안전이라고 죽은 것들을 내놓겠습니까? 모두 팔팔하게 살아있는 최상급 ‘파예’들입니다!”



“ ..하..하지만..”



‘ 누..눈에 생기가 없는 데다 약간의 미동도 없잖아! 저게 정말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진 마네킹처럼 전시된 그들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의 경악을 감탄으로 받아들였는지 노예 상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금발의 남자 마네킹 하나를 가리켰다.




“ 특별히 엄선한 ‘파예’ 중에서도 제가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녀석입니다. 수많은 귀족 분들이 이 녀석을 탐내고 계시지만 도련님이 제국 아카데미에 가신다니 제가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내드릴 수밖에. 헤헤헤. 안 그렇습니까?!”




손을 비비며 아부하는 모습에 ‘시끄러워, 탐관오리!’란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가 추천하는 파예를 찬찬히 보았다. 확실히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긴 블론드와 아도니스 상처럼 완벽한 얼굴. 드러난 상체에 보기 좋게 잡힌 근육. 외모에 있어서 경이로울 정도로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 같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황금빛 눈.



...정말 이들이 인간일까? 저런 죽은 눈을 하고 안드로이드처럼 서있는 그들이?




“ 이들은 지금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주인님을 만나 종속 되는 순간부터 최선을 다해 모십니다.”




제국의 코흘리개 꼬마도 아는 사실을 굳이 말하는 란위를 보며 노예상인은 어리둥절한 눈을 했지만 그 설명이 나를 위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종속되지 않고선 저희는 따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습니다. 대기상태에 들어가면 기초적인 활동 즉, 의식주 외엔 다른 활동은 모두 무(無)가 됩니다.”




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란위를 더더욱 의아한 눈으로 보는 상인이 느껴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란위는 침울해진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었다.




‘ ...그렇다면 란위도 한 때 저런 상태에 있었다는 거겠지?'




란위의 눈은 더할 수 없이 따뜻하다. 어떤 상처든 어루만져줄 듯이. 저 온화하고 정감 있는 눈동자가 한 때 저런 지독한 허무를 담고 있었다니.




내 우울함이 느껴졌는지 노예상인은 돈줄이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 실망하긴 이릅니다! 아직 하이라이트를 보지 않으셨잖습니까! 이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은 무술도 청소도 요리도 아닌, 묵직한 그곳과 끝없는 정력입니다!”



“ ....뭐?”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비적거리며 되묻자 내 반응에 신이 난 노예상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 아카데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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