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4

193일전 | 582읽음

보일...



휙!




‘ 뭐...뭐지?“





방금 무언가가 빠르게 내 앞 쪽에서 움직였다.




' 드...드디어 귀신이 나타났구나!!'




침을 꿀꺽 삼키며 겁에 질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 호기롭게 외쳤다.




“ 뭐...뭐냐! ...원한이 뭐야! 억..억울함을...내 능력이 된다면 풀어줄 테니 얼른 나타나!”




그러자 무기고 한쪽이 불붙는 듯이 환해졌다. 어둠 속에서 일부가 드러난 무기고는 끝이 없을 정도로 넓어보였다. 그 어마어마한 공간에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 바닥에 꽂혀있는 가지각색의 검과 대형 탁자에 전시된 채찍, 활, 창 등을 훑어보았다. 공간이 다 밝혀지지 않았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검의 무가답게 검 종류가 가장 많아 보였다.



근데 어디서 이런 밝은 빛이...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다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발목까지 내려왔고 붉은 빛을 띠는 하얀 피부.(붉은 피부가 아니라 은은하게 빛나는 그런 종류였다!) 거기에 얼굴은 정교한 그리스 상처럼 섬세하게 빚어졌고 그 완벽함의 정점은 머리카락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에서 끝을 맺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듯한 그(혹은 그녀의)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냐?




청아하면서도 깨끗한, 그러면서도 인간적이지 않은 이질적인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쪽이니까 역시 처녀 귀신일까? 혹시 백년 묵은 여시? 왜 하필 이런 어두컴컴한 무기고에...에잇. 사정이야 어찌됐든 저런 무시무시한(?) 귀신을 화나게 해서 좋은 것은 없으니까.




- 흠. 볼품없게 생겼구나.




캭! 내 몸을 노골적으로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라니! ...으윽. 그래. 귀신은 보통 성격이 나쁘니까. 그러나 너그러이 용서하자는 마음과는 다르게 얼굴은 찡그려졌는지 귀신이 그걸 보며 피식 웃는다.




- 화났나 보구나.



“ 당연하잖아요! 초면에 그건 실례라고요.”



- 하지만 볼품없다는 것을 없다고 하지 뭐라 그러겠느냐.



“ ...너 개성 있게 생겼다. 착하게 생겼어...이런 좋은 대안 많잖아요! .....아무리 본인이 화려하다고 남을 그렇게 우울하게 만들면 안 되죠! 제가 ....어...당신..여하튼 그쪽보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가게 생겼네요! 라고 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름 예의를 다한 항변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어..엄마야! 화나게 한 건가?!



....누....눈...에서 화염이 폭사되어 나올 거 같아!! 뜨악!



그 모습에 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는 거침없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 아까부터 설마 했는데...넌 내 모습이 보이는 거냐?




그렇지? 응? 얼른 그렇다고 말해! 라는 눈빛에 담긴 이글이글한 소망에 겁에 질려 목이 아플 정도로 세게 위아래로 끄덕이자 그가 갑자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여기서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성이었지만.)



나보다 약간 클까. 거의 비슷한 키의 귀신(?)에게 안겼다는 공포로 나는 잠시 혼이 이탈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의 인간 같지 않은 서늘한 체온에 온 몸에 소름이 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감히 날 귀신으로 착각하다니!!



“ ...죄송해요.”



- 어찌 그런 허상과 나를 혼동할 수 있단 말이냐!



“ ....정말 죄송하다니까요...”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를 불타는 눈으로 신기하다는 듯이(어디까지나 겉보기엔 무표정했지만) 내려다보던 그가 자신을 보며 원한을 들어준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래서 솔직히 귀신 아니냐고 했다가 그의 불똥 튀는 분노를 받아야 했다.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주변 온도가 급격히 올라감을 알아챈 나는 다시 긴 사과의 말을 했다.




“...정말 몰랐어요. 그러니까 너무 당황해서.... 더군다나 갑자기 그쪽이 나타나는 바람에..”



- 그쪽이라니! 내게는 이름이 있다!




그게 뭐냐는 눈으로 보자 그가 갑자기 부르르 떨며 얼굴을 붉혔다. 무표정한 얼굴이 붉혀지니 좀 인상이 순해보였지만 그 상태로 한참 뜸을 들인다. 뭔가 사연이 있는가 싶어 안 알려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 뭐라고! 내 이름을 몰라도 괜찮다니! 그런 망언을! 그게 진심이냐! 사실대로 말해라! 내 이름을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거냐!!




...아. 어쩌란 말인가. 다시 급속도로 더워지는 공기에 나는 간사할 정도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 엄청 알고 싶어요! 꼭 알려주세요!”



- 흥. ...대부분의 인간들은 평생 귀에 담을 수도 없는 단어다. 너는...특별히 알려주도록 하마.




‘ 아. 상대하기 까다로운...아니 반대로 보면 알기 쉬운 성격일라나.’




급 피곤해진 나는 그의 이름만 듣고 여길 나가자는 결심을 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봤자 좋을 건 없었다.




- 나는 화염검, 인페르노다.



“ 아.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손을 뻗자 그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악수를 했지만 표정은 뭔가 이게 아닌데, 라는 얼굴이었다. 답례로 내 이름도 알려준 뒤 나는 약간 얼이 빠져 있는 그를 지나쳐, 그의 분노(?)로 인해 환해진 공간에 제 모습을 드러낸 무기들을 살폈다.



대충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걸 가지고 가야지. 아무래도 나중에 여행할 것을 생각하면 단검이 좋을 라나? 가벼워 보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단검 종류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배로 환해진다.




-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어느새 내 곁에 가까이 와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바로 대답했다.




“ 무기 고르는데요.



- ....무기? 왜 무기를 고르지?




요만큼도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어딘가 불만스럽게 말하는 투에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무기고에 살면서 의외로 여기 사정에 어두운 걸까? 많은 사람들이 성인식을 치르느라 다녀갔을 텐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인가?



그를 무기고에서 조명을 밝히는 역할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약간 고민했지만 곧 솔직하게 알려줬다.




“ 제가 성인식을 치르기 때문에 여기서 무기 하나를 골라 가져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단검을 고르려고.... 캭! 불이다앗-!!”




갑자기 그의 주위로 불길이 넘실됐다. 가까이 있던 탓에 소맷귀에 불이 옮겨 붙자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들어 황급히 탁탁, 털어 됐다. 한참 난리 법석을 털어 불을 끈 뒤, 까맣게 타들어간 옷자락을 보며 화가 나서 고함을 쳤다.




“ 뭐에요! 왜 갑자기.....아앗-!! 뜨거워요!!”




볼에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열기에 아파 소리치자 열기가 약간 줄어든다. 그래도 여전히 뜨거운 탓에 산 채로 태울 셈인가 싶어 눈을 치켜뜨는데....어..엄마야! 그의 눈이 훨씬 광폭하게 타오른다.



도대체 내가 뭔 실수를 했다고! 화내는 것도 잊어버리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면서도 억울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에 잔뜩 열이 났는지 몸에서 위협적으로 불길을 뿜어냈다. 이미 근처에 있던 나무는 재가 되어 사라졌고 강철도 본래의 색을 잃고 빨개지며 흐물흐물 녹아 내려갔다. 얼마나 뜨거운지 공기마저 공중에서 타탁, 타들어 갔고 빠르게 숨 쉬는 것도 답답해졌다.



..산..산소가....타들어가는 걸까?!




- 감히 나를 두고 다른 검에 눈을 돌리다니! 그것이 네 의지라면 나는 이 방의 무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녹여버리겠다!!




어쩜 성격도 말투도 저렇게 불 같이...응? ...가만. 나를 두고 라니. ‘무슨 말인지.. ’ 하고 질문하려던 나는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 혹시 본인이 검....이에요?”




물어보면서도 떨떠름했다. 설마 검이 사람 모양을...




- 아까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느냐!! 그세 내 이름을 까먹었단 말이냐!!




으아악-! 다시 넘실대려는 불길에 나는 얼른 좌우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 기억해요! 인페르노, 화염검 인페르노잖아요!”



- .....흠. 당연히 기억해야지.




오만하게 답했지만 그의 불길이 잦아들었음을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근데 검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내가 언제 저 사람 모양의 검을 선택(?)했다고? ...으아. 말하면 화낼 거 같으니까 참자. 산..산소도 줄어들고 있으니....




“ 숨을 못 쉬겠어요! 이제 그만 태워요.”



- 흥. 겨우 이정도 불길에 허덕이기는. 허약한 인간답구나.




공간이 폐쇄적이라 어쩔 수 없잖아요! ...하고 받아치고 싶었으나 그러면 또 화낼 거 같아 묵묵히 있자 대번에 불길이 사라진다. 그저 환한 빛 무리만 남은 채로 그는 내 곁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뜨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는데 그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얼른 그의 손을 잡자 다행히 서늘한 감촉만이 느껴졌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뒤 바닥을 기어 다니느라 엉망이 된 옷을 털었다. 그러나 몇 백년간 숙성된 먼지는 오히려 의복을 더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다.




‘ 윽. 훼이른이 신경 써서 챙겨준 건데. 화내면 어떡하지? 옷도 비싸 보이는데...설마 내게 물어내라고 하진 않겠지?’




옷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내 뒤통수를 쓱쓱, 쓰다듬었다.






- 생각보다 더 작구나.



‘ 뭐야, 그게. 욕인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분노는 어디 갔는지 자못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내 얼굴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있다. 잠시 합죽이를 만들었다가 찹쌀떡처럼 늘어보기도 하고 쿡쿡 여기저기 찔러 본 뒤, 그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얼빠져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 여기 평생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 아니..그게...저...”




정말로 무기를 가져가야 했다. 이 사람이 화염검, 인페르노라는 화려한 명칭을 가진 검이라고 해도 나는 가문 사람들 눈앞에서 흔들어 보일 평범한 무기가 필요했으니.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그의 눈이 다시 붉게 타들어갔다. 나는 깜짝 놀라 손을 휘저으면 그를 저지했다




“ ..잠...잠깐!!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 뭐냐! 또 시답잖은 단검이야기라면..!



“ 그러니까 난 인페르노를 선택했어요! 그쵸?”




제발 아니라고 부정해줘, 라는 내 강렬한 눈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는지 그는 ‘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구나.’ 하는 무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다른 이유를 생각해 냈다.




“ 하지만...인페르노는.....저기 예쁘고....아름다워 보여서..휘두르기는 좀...그러니까 그냥 싸구려로 보이는 검 하나가 필요..”



- 너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나 외엔 다른 검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태도에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 하지만 당신을 휘두를 순 없잖아요! 제 키만 한 당신을 어떻게 휘둘...악! 아파요! 왜 때려요!”



- 너는 지금 내 모습이 진정 화염검의 모습이라 생각하느냐? 무슨 그런 황당한 생각을...



“ ....그럼 검으로 변신도 해요?”



- 변신이라니! 다만 외형이 바뀔 뿐이다. 내 본질은 그대로다.




그게 변신이지, 뭐. 라고 작게 투덜거렸지만 무슨 검이 그리 귀가 좋은지 듣고선 다시 나를 불타는 눈으로 노려봤다. 으으. 일일이 신경 쓰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무시하자. 무시.




“ ...그럼 단검으로도 변할 수 있어요?”



- 그건 너의 의지에 따라 달렸다. 너는 나의 주인이니까.




...이상하게 그쪽이 주인인 듯한 착각이 들어서요. 속으로만 궁싯거리며 나는 솔직히 말했다.




“ 뭔가..대단하네요.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검의 크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죠?”



- 대단하네요..라니!! 그런 단순한 표현으론 한참 부족하다!! 나는 명계의 불길로 만들어진 화염검. 나의 불길은 천계의 환궁도 지옥의 마궁도 태울 수 있으며 신의 육신마저 상처 입힐 수 있다!




...뭔가 대단히 위험한 칼이라는 거겠지? ....근데...어쩌다 검술의 ‘검’자도 모르는 날 선택했을까? 말만 거창하고 실은 사람 볼 줄 모르는....




- 뭐냐, 그 불신의 눈은!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 아니, 아니...그게 아니라요. 왜...절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 그래. 그건 나도 의아하다. 어떻게 너 같이 볼품없고 능력 없는 인간이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볼 수 있는지. 간혹 가다 내 목소리를 듣는 인간은 있었지만 태어난 이래로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네가 처음이다.



“ 언제 태어났는데요?”



- 삼만 년 전쯤.




무지 오래됐구나. ...옛날 세계에선 오래되면 구식 취급을 받는데 여기는 오래 될수록 더 좋은 걸까? 그렇게 엔티크한 느낌이 나지는 않는...




- 어쩐지 불쾌한 사념이 느껴지는군.




오래 살면 마음을 읽는 능력도 생기나? 당황한 나는 얼른 생각을 바꾸며 그에게 검으로 변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당당한 요구에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가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쩌다가 너 같은 것에...



“ 네? 안 들려요.”



- 시끄럽다! 나의 본신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는 녀석 따위. ....잔말 말고 내가 화염검으로 바뀌고 나면 그것을 잡아라. 그 뒤 네가 바라는 검의 크기를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검이 되면 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미리 알려두마. 물론 미천한 너와 달리 모든 걸 들을 수 있다.



“ 흐음. 그렇구나.”



- ...그리고 너 없이 내가 이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한정되어 있다. 너의 마력을 빌리면 오래 유지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 않고 무엇보다 지금의 네 마력으론 택도 없으니. ....그러니 스스로 마력 충전을 위해 내가 잠을 자는 경우에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미리 알아둬라.




새삼 검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전신이 빨갛게 타들어갔다. 뜨겁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와 다르게 그는 정말로 요염하게(불의 요정이 있다면 아마 그와 같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불기둥이 솟구쳤다. 그 넓은 무기고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 어떤 것도 태우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다는, 오만하면서도 농염한 선홍빛의 넘실거리는 불길 속에 그가, 아니 화염검 인페르노가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투명한 검신. 한쪽 날 끝에는 루비보다 더 붉은 보석이 밝혀 있었고 반대편 손잡이 부분은 은색으로 빛나는 금속과 붉은 보석으로 멋들어지게 장식되어 매혹적이면서도 귀품 있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불길 속으로 발을 옮겼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불길이 꼭 나를 감싸 안아준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불길 속에 떠올라 있는 검의 손잡이를 천천히 두 손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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