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2

193일전 | 899읽음

이 몸의 전 주인 라스넬 체 보르크라고. 이 멍청아! 도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하는 거야! 눈치가 그렇게 느려 터져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 누구보고 멍청이래? 다짜고짜 라스넬이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 무슨 소리야? 너 이미 이야기를 다 듣고 온 거 아냐?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소리에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몇 번을 말하지만 난 정말 니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넌 어떻게 내 머릿속에 있는 거야?”



- ...뭐? 너 차원의 관리자를 만난 거 아니었어?!



“ ...차원의 관리자?”




생소한 이름에 갑자기 머리가 징- 하고 울렸다. 정수리를 누군가 쪼개는 듯한 통증에 머리를 감싸 앉으며 주저앉았다.




- 뭐...뭐야, 왜 그래?!



“ ....아....아파! 머..머리가....크윽!”



- 어이, 이 봐! ....라스넬!!“



“ ...크으읏..”




머리가 하얘진다. 왠지..요즘 이런 경험을 자주 하는 듯한....




- ....안... 시간이... 얼마.......라스..!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것을 들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나는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창백해 보이는 푸른 물결이 발아래에서 요동쳤다. 바다 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들의 모습이 빛바랜 영상으로 나타났다. 서로를 보듬는 웃음과 정다운 손길들. 내 가족들이었다. 그곳엔 내가 없었지만 그들은 진실로 행복해 보였다. 그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영상은 어떤 아줌마가 나와 우유를 건네는 것으로 바뀌었다. 평범한 요구르트 아줌마는 아니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내 키보다 큰 거울이 하나 있었다.



아까보다 더 요동치는 회청색 바다 위를 걸어 거울 앞에 서자 내 나이대의 소년 하나가 보였다. 하늘빛의 머리와 눈.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손을 뻗자 거울의 그도 손을 뻗는다. 서서히, 그러나 침착하게. 마침내 그의 손끝과 내 손끝이 닿았을 때 바다가 큰 소리로 폭발했다.




- ...일어난 거냐.



“ ...가족들이...”




정리된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웃는 모습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 .....잘...기억나지...않아...”



- ....그래.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했지. 넌 이제 라스넬이 된 거니까. 괜한 혼란과 방황은 필요하지 않잖아. 그건 차원을 뛰어넘은 너를 위한 안배일 거다.



“ .........”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녀석 앞에서, 아니 속에다 두고 운다는 것이 쪽팔렸지만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럽고 슬픈 기분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 ...내 이름은 라스넬 체 보르크. 아까도 말했다시피 보르크 가문의 둘째 아들이다.




그도 내 감정을 느꼈는지, 눈치 챘는지 내 눈물에 대해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 쉐버린 제국에는 흔히 4대 무가와 3대 상회가 있다고 하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4대 무가에 대해서만, 아니 우리 보르크 가문에 대해서 그것도 내 입장에서만 간단히 말하마.



“ .....시간?”



- 그래. 내게도 이 육체를 떠날 시각이 정해져 있단 말이다. 사실 어제 모든 걸 얘기하려고 했는데 네가 꼴사납게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하루를 날려버렸어.



“ ....꼴사나울 거까지야....”




삐죽거리며 변명했지만 그는 간단히 내 말을 씹고는 말을 이었다.




- 보르크 가문은 무가 중에서도 검술이 월등히 뛰어나다. 대대로 가주에게만 전해진다는 폭풍검과 폭풍12검법은 너도 앞으로 못이 귀에 박히도록 들을 거야. 내가 비록 가주의 직계 혈통이긴 하지만 사실 보르크는 철저히 실력과 선택에 의해 지위가 정해지는 곳! 직통에 의한 대물림 전통은 거만한 에브게니 가문에나 어울리지.




에브게니?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별로 안 중요하다 싶어 넘어가고 더 궁금한 걸 물어봤다.




“ 실력은 알겠는데 선택은 또 뭐야?”



- 보르크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두 번의 선택이 찾아와. 하나는 17살, 성인식 때 평생에 친구가 될 자신의 무기를 무기고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5살이 되어, 가문을 떠날 것인 말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지.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능력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며 방계 혈족도 가주가 될 수 있고 폭풍검의 주인이 될 수 있어.



“ ...어쩐지 무섭네.”




어쩌다 무기 좀 잘못 고르며 끝장나는 거란 말인가? 실수를 용서치 않는, 살 떨리는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어딘가 상처 아린 목소리로 라스넬이 답했다.




- .....그래. 능력 없는 이한테는 참 잔인한 규칙이지. ...여하튼 .나는 직계임에도 빙족 출신인 어머니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아 이런 머리 색깔을 띠고 있어. 나중에 만나겠지만 보르크 출신들은 혈통이 순수할수록 머리카락이 태양에 가까운 붉은 색을 띤다.



“ ...아까는 실력과 선택에 의해서만 가주가 된다며? 그러면...사실 직계란 것도 별로 의미 없지 않나?”



- 물론 그 말이 맞다. 보르크는 철저히 실력과 선택에 의해서 이어지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력과 선택이 모두 직계의 자식들에게만 손을 들어줬지만.



“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닐까?”




깨끗한 척 할수록 더 속이 구린 법...이라는 내 멋대로 추측을 시작해 보는데 갸웃거리는 목소리로 라스넬이 물었다.




- 고스톱? 그게 뭐냐?



“ ....나도 몰라. 그냥 생각난 단어야. ...그럼 한 번도 방계가 가주가 된 적은 없어?”



- 아니. 딱 한 번. 제국과 함께해온 가문의 장대한 역사에 단 한번 방계가 가주가 된 적이 있었지. 뭐. 그것도 그린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 어떤 사람이었는데?”



- 궁금하냐? ...아쉽게도 이야기해주고 싶어도 시간이 없으니 네가 알아서 찾아 봐야 할 거야.



“ ....그래.”




아쉽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 중요한 것은 네가 앞으로 보르크 가문의 둘째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거다.



“ ...뭐?! ....아...그냥 나 기억상실인 척 하면 안 될까?”



- 어제 잘 대답해 놓고 갑자기 무슨 척을 한다는 거야!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바뀌었는데 널 잘 아는 사람들이 이상해하지 않겠어? 당연히 의심하지! 너무 위험하다고! 너인 척 연기하는 것은.”



- .....나를 의심할 만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은 없다.




싸늘한 대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가문의 둘째 아들인데...친하게 지내는 이가 없다니. 얼굴이 그렇게 밉상도 아니건만. 아. 여태까지 보여준 싸가지가 없는 성격이 원인인 것이 틀림..




- ...너 뭔가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왠지 노려보며 듯한 시선에 서둘러 시치미를 뗐다.




“ ....뭐..뭐라는 거야? ....으흠.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기어코 라스넬, 네가 되란 거지? 하지만 항상 긴장하고 살 순 없잖아. 25살까진 꼼짝없이 신세를 져야 하는 곳인데...어쩌다가 내 본 성격은 튀어나오면 어째? 누군가 의아함을 느끼면?”



- 벌써..출가하기로 결정 난 거냐?



“ 당연하지. 가주라니. 능력도 안 될 뿐더러 만에 하나 되더라도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거 하기 싫어. 돈만 좀 모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지.”



- ..........



“ ...왜? 너무....무모한가?”



- 아니. 그냥 넌 참...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내가 뭐냐고 물었지만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는 다른 말을 했다.




- 성격이라면 걱정할 거 없다. 넌 별로 나랑 다를 게 없어. (이 부분에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시간이 없다는 말에 꾹 참고 화를 삭였다.)



“ 그래도 주의할 것 좀 알려줘. 특별히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든가..널 미워하는 사람이라든가. ...음 좋아하던 사람이라든가.”



- 날 좋아하는....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죽었다.




짙은 슬픔이 깃든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문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기보다 다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무가에서 태어난 직계로 보기엔 한참 무리가 있으니까.



“ ..........”



- 무술에 재능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나는 연병장을 돌만한 체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일 년에 반은 아파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책조차 오래 보면 가슴이 아프지. 처음에는 다들 내가 어려서 그런 줄 알았지만 10살이 지나면서 다들 포기하더군. 그리고는 이 별궁에 버려두고 무관심해졌지. 그나마 나를 챙기는 것은 어제 보았던 훼이른, 가문의 총 집사뿐이다. 그는....다들 꺼려하던 우리 어머니도 참 좋아했지.



“ .....빙족 출신이라는..?”



- ...응. 어머니는 북대륙에만 산다는 빙족의 후예다. 내가 5살 때 돌아가셨지만 그래도...어머니의 빙족 특유의 서늘한 손은 아직도 잊어지지 않아. ....아. 미리 알아둬라. 내 형과 나는 어머니가 다르다. 형의 어머니가 죽고 내 어머니가 라이작과 눈이 맞아....그 뒤 내가 태어났지.



“ ...라이작?”



- 내 아버지. 라이작 체 보르크. 가문의 가주이자 현 폭풍검의 주인. 20대 후반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자.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충실한 가신.”




칭찬이었음에도 이를 악물고 하는 말투에 나는 왜 아버지를 라이작이라 부르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 그러고 보니 라이작과 마지막으로 대화해 본 것이 재작년 신년제일 테니 대충 2년 이상 말을 안 한 거 같군. 난 그가 묻지 않는 이상 말을 걸지 않으니 너도 만나면 대충 대답하고 넘어가면 된다.



“ .....뭐야 그게. 너무 무책임해!”



- 더 이상 뭘 말해 달란 거야?! 난 직계인 형하고도 별로 친하지 않고 만나면 고개만 숙이는 수준이라고. 방계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너도 나머지는 무시하고 지나치면 돼.



“ ....난 동방예의지국 사람이란 말이야....너 같은 철면피가..”



-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거야?!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했다. ...그래. 차라리 말 많고 사교적인 성격보다는 백배는 낫지. 납득하려 애쓰며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 이게..끝이야? 그럼 넌 이제 어디로 가?”



- 그건 나도 모른다. 나 역시 잘못된 육신에 있었으니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겠지. ....아. 그리고 아까 그 하인들. 내가 쓰던 얘들이지만 너니까 특별히 양보해 준다.



“ ...써? 뭐로?”




어제 비명을 지르며 방방 뛰던 3명의 소년들과 변태를 이야기 하는 건가?




- 뭐긴. 밤의 쾌락을 위해서지.



“ .....뭐어..?”




영혼 빠져나가는 물개마냥 멍청하게 되묻자 라스넬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 병약한 내가 침대에서 할 게 그런 거 말고 있겠냐? ...참고로 알아둬라 노란 머리는 허리 돌리는 기술이 일품이고 갈색 머리는 입과 혀가..



“ 칵!! 잠깐! 그만, 그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에 손으로 감싸며 소리를 버럭 지르자 핏,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다.




- 너 혹시 동정이냐?



“ 캭! 시끄러! 그런 거 묻지 마!! ....너, 솔직히 불어! 몇 살이야?!”




발랑까진 녀석!! 대충 내 또래로 보이건만. 아. 이 비뚤어진 청소년은 갈 데까지 가는 것인가.



...혹시 여긴 원래 이런 곳은 아니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그렇다면....차원이동에 대한 막심한 후회가 찾아오는데...




- 16살. 내일이면 17살이 된다.



“ 뭐야, 나랑 나이도 똑같고만!



- 당연하지. 괜히 너랑 나랑 교환되는 건 줄 알았냐?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육신으로 살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됐다. 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는 거냐? 너와 나는 다르지만 같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혼의 교환이라는 파격에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거야.



“ ...갑자기 잘난 척은....애로 소년 주제에..”




내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다시 한 번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알았어!




- 이제 정말 시간이 됐군. 침대로 가서 우유를 집어라.



“ ...우유? ...아! 관리자한테 받은 그것?”




설마하고 침대로 달려가 보니 우유팩이 보인다. 자세히 이리저리 돌려보자 깨끗한 옆면과는 다르게 밑바닥에 무언가 적혀 있다.




[ 차원계 1등급 영혼 정화 우유! ]



[ 100프로 유기농 천년정화 꽃만 먹여 키웠음. 안심 제품 ]




‘ 뭐냐. ...이건.’



의심스런 눈으로 아래를 좀 더 읽으니 ‘천계, 명계, 마계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라고 적혀있다.



‘ ........’



머릿속에서 ‘유기농이 뭐냐?’ 라는 질문이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하며 나는 팩 입구를 열었다.




- 그걸 마시면 나도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 ...왠지 좀...그러네. 더 있다 가면 안 되나?”



- 흥. 니가 아무리 그렇게 울고불고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을 놓치면 나는 또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니까.




누가 울고불고했다는 거야? 당장에 원샷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불쌍한 애로 소년하나 구제한다는 느낌으로 나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 ....뭔가 바라는 거 없어?”



- 바라면 니가 들어줄 수 있다는 거냐? 그럴 능력이나 있고?



“ 그건 앞으로 모르는 거지. 그래도 말해주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 ............



“ 노력한다니까. 나 이래봬도 한 번 말한 건 잘 지킨다고. 조금 게으른 면이 있지만.”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애원하는 입장이라니, 어쩐지 입맛이 썼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비뚤어지게 살아온 녀석 하나 구제한다는 느낌으로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래도 말이 없어서 부탁할게 없는 건가 싶어 우유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어머니의 시신을...빙족에게 돌려줬으면...한다. 북 대륙에 있는.



“ 그래. 알았어.”



- ....쉬운 일이 아니야. 빙족은 인간과 접촉하지 않으니까. 그들의 거처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어. 어머니처럼 스스로 빠져나와 인간세상을 구경하다 잡힌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알려졌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 ...하지만 어머니를 그곳에 데려다주고 싶잖아. 너의 어머니는...나의 어머니도 되니까...그러니까.. 동생 부탁하나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뭐.”




이렇게 말하는 게 건방지게 생각돼서 조금 머뭇머뭇 대답했더니 금세 쌀쌀 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건방지긴! ......내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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