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11

193일전 | 759읽음

서러운데 파예마저 서러워져야 하다니. 계급 제도의 잔인함(?)을 느끼며 고개를 드는데 알몬드의 볼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뭐...뭐지? 저 세간에서 홍조라 부르는 괴현상은?!



충격으로 가득 찬 하늘빛 눈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지 그는 평소답지 않게 약간 격양된 어투로 물었다.




[ 란위를 실제로 만나보신 거죠? 정말 소문만큼 아름답습니까?]



[ ..어? ....예. 뭐...그..그렇죠.]



[ 그렇군요. 그렇겠죠. ...아. 정말 가까이서 한 번 보며 대화라도 나눠봤으면...]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건지 이제 눈빛이 아련해지기까지 한다. 도..대체 뭐 때문에..? 물론 란위가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저건 꼭, 아이돌을 실제로 만나고 싶어 하는 팬의 모습 같잖아?!




[ 란위가...유명해요?]




째릿!



히익! 안 그래도 매서운 눈이 희번뜩 하니 완전 무섭다! 마치 ‘ 같이 살면서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이냐!’라는 책망 가득한 눈빛에 나는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나의 무지(?)를 한두 번 봤냐는 듯 자포자기한 얼굴로 설명을 늘어놓는다.



란위는 고급 파예 중에서도 그 인기도가 남달랐다고 한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말투, 훌륭한 밤일( 이 부분에서 나는 왠지 우울해졌다.) 거기에 똑똑하고 빠른 일처리 솜씨까지. 따라서 돈 좀 있다는 귀족들이 란위의 경매 당시 돈을 뿌려대며 각축을 벌였는데, 라이작이 1000 금화를 부르자 경매장이 고요해졌다고 한다. 보통 고급 파예가 100금화에서 200금화 사이에서 팔린다고 볼 때 그 가격은 파예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고 흥분해서 설명했다. ( 금화 하나면 보통 평민 가족의 일 년 생활비가 된다.)





요전번의 신선했던(?) 교양 수업을 떠올리며 나는 무릎 꿇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왼쪽 맨 뒤편에 익숙한 색의 머리가 들어왔다.




“ 블레이크.”





천천히 고개가 들어졌다. 살아있음이 완연한, 흑빛의 푸른 눈과 부딪치자 왠지 가슴이 찡했다.




‘ 뭐랄까. 죽을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느낌?’




비유의 적절성을 따지기도 전에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 예. 주인님.”




캭! 주인님이라니! 오랜만에 솟구치는 전신 닭살에 나는 호칭 변경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 지금 바빠?”



“ 아니요.”



“ 그럼..”




얼굴이 저번에 봤을 때보다 확실히 좋아져 있었다. 도드라졌던 광대뼈도 거의 사라졌고 파리했던 안색도 제 빛을 찾아 건강해보였다. 뭐, 몸이야 옷에 가려져 있어 확신할 순 없지만. 치료사에게 전해 듣기론 마법 공격으로 인한 상처와 거친 목소리는 완전히 회복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상처는 알고 있었지만 목소리라니, 놀라서 반문하는 내게 그는 독으로 인해 성대가 다쳐 목소리가 저렇게 끔찍한(?) 톤으로 변했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 끔찍할 정도는 아닌데.’




내 다음 말만을 기다리며 지고지순하게 쳐다보는 그를 보았다. 란위처럼 미소를 띤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담담한 얼굴이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 나랑 잠깐 놀러갈까?”




평온했던 청 빛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지는 것을 보곤 왠지 모르게 조금 유쾌해졌다.








“ ...후우. 여기서 좀 쉬자.”




놀러가자는 말과 다르게 얼마 못 가 별궁 후원에 딸린 의자에 앉아야 했다. 말과 다른 내 행동에 스스로 쪽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지금 마이너스 체력이니까.




“ 어디 아프신 건..”




아까와 달리 살짝 굳어진 얼굴에 고개를 도리도리 하고는 그에게도 앉으라고 했다.




“ ...하지만..”



“ 괜찮아. 앉아.”




그래도 망설이는 동작에 쳐다보느라 목도 아프다고 하니까 결국 주저주저하며 내 앞에 앉는다. 훼이른의 고집으로 결국 두게 된 하녀, 샐린을 불러 차를 내오고는 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블레이크.”



“ 네. 주인님.”



“ .....저기. 일단 그 호칭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



“ .....?”



“ 그냥 이름으로 불러.”



“ 네. 라스넬님.”




음. 확실히 아까보단 낫군. 난 만족스러워 하며 생각해 놓았던 긴장풀기(?) 질문을 던졌다.




“ 몸은 좀 어때?”



“ 괜찮습니다.”



“ 어디 아픈 데는 없고.”



“ 예.”



“ ....지내기는 괜찮아?”



“ 예.”



“ ...뭐 힘들거나 고된 일은 없고?”



“ 예.”




나는 말을 멈췄다. 뭔가...대화가 이상해, 아니 삭막해! 꼭 내가 블레이크를 심문하는 사람이 된 요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가 싶어 질문을 되짚어봤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결국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 ....혹시 내게 화났어?”




무관심했던 나를 원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더니, 블레이크의 눈이 아까 놀러가자고 했을 때보다 더 커졌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에 도리어 찔린 내가 우물쭈물 먼저 말을 꺼내놓았다.




“ 아니..그게 대답도 왠지 짧고....얼굴도 묘하게 피하는 거 같고....해서..”



“ 제 목소리가 듣기 싫지 않습니까?”




엥? 느닷없이 웬 목소리 타령? 황당하다는 듯이 블레이크를 바라보자 굳어진 얼굴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 아니. 괜찮은데.”



“ .......죄송합니다. 제가 지레 짐작해서...”



“ 뭐 죄송할 거까지야. ....그럼 말을 짧게 한 건 그 탓? ...혹시 사람들이 싫어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밀려드는 씁쓸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보는데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안도감 같은 것이 돌고 있다. .....잉? 저 반응은 뭐지?




“ ...라스넬님께서 싫어하지 않으시다면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 ...그..그래.”




갑자기 쏟아진 유창한 말에 나는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유화된 분위기에 나는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있잖아. 음... 사실 내가 어디를 멀리 가야하거든....한 2년 쯤.”




하루 종일 고민했었다. 과연 블레이크에게 가장 좋은 대안이 무엇인지. 제인의 잘 부탁한다는 각별한 말도 있었지만 나도 내심 그가 많이 측은했다. 되도록이면 그가 편한 곳에서 몸 건강히 지냈으면 좋겠다.




“ 그런데 너를 데려가기가 조금 곤란해서...”




내 조심스러운 말에 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 ...괜찮습니다. 저는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아니...그러니까...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 내가 결국 생각한 대안은 블레이크를 나보다 더 좋은 주인에게 다시 보내는 거였다. 그를 아껴주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로. 물론 쉽지 않겠지만 훼이른에게 부탁하면 분명 적당한 사람을 찾아줄 것이다.



스스로 대안에 만족해하며 말을 했으나 블레이크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 ....어라? 이..이게 아닌데..’



“ ....저를 다른 주인님에게 보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 ...으..응. .....그..그러니까 나보다 더 좋고 괜찮은 사람에게로 보내면...너에게도 좋고..그리고 편하고...그렇게..하는 게....좋지 않을....”




으윽! 내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블레이크의 얼굴은 그에 비례해 갈수록 침울해졌다. 수습이 되지 않음에 망연자실하게 그를 보는데 그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알겠습니다.”



“ 진짜 진짜 좋은 사람에게 보낼게! 내가 꼭 확인할게! 약속해!”




란위에게 듣기론 대기상태에 들어가면 전 주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진다고 한다. 그의 이름도, 직업도, 신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태도 정도는 기억난다고 한다. 따라서 나는 블레이크가 다시 학대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믿어달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눈은 오히려 더 깜깜해졌다. 충격과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괴로움이 가득한 눈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알겠습니다.”




고통을 참으며 쥐어짜듯이 내뱉는 한 마디에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건 명백한 거부의 의미다.




“ 블레이크. 정말 솔직히 말해야 돼. 알았지? 그래야 너의 의사를 알지.”



“ ..........”



“ 너. 다른 사람에게 가기 싫어?”




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진지한 물음에 굳게 닫힌 입술이 열렸다.




“ 제가 이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란 걸 알지만, 네. 싫습니다.”



“ ....왜?”



“ 전 라스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뭐? 나는 멍청하게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모시고 싶다니? 나를? 왜? ...내..내가 좋은 사람 같나? ...물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내가 만만해서? ...끄응. 설마 블레이크가 인페르노 같은 성격도 아니고. ....아니, 파예는 다 이런 식으로 아부하는 것일 수도...’




블레이크가 나를 모시고 싶어 하는 진정한 이유를 뭘까 고민하느라 얼굴이 조금 찡그려졌던지 그가 어두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허리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제 입장을 망각하고서는.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아니...그게 아니라 네가 왜....나를 모시고 싶어 하는지 잘 몰라서..”




혹시 너는 아니? 알면 좀 가르쳐줘 라는 뜨거운 눈빛을 보냈지만 블레이크도 설명하기 어려운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이익! 그게 뭐야!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다고!’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지만 블레이크는 당황할 뿐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결국 이 상황에 두 손을 든 것은 나였다.




“ 알았어. 블레이크. 널 보내지 않을게.”




순식간에 굳어져 있던 얼굴이 대번에 환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 싫었던 거구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하루 종일 생각했던 내 대안이 쓸모없는 것이었다니. 허탈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 땜에 다시 무를 수는 없었다.




“ .....근데 진짜 2년 동안...여기서 지내도 괜찮아?”



“ 네. 괜찮습니다. ....저, 근데 어디가시는지 여쭈어 봐도..”




조금 망설였다. 내가 제국 아카데미에 가는 것이 가문 내에서 기밀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왕 블레이크를 내 파예로 하기로 한 이상, 숨기는 건 좀.... 그리고 블레이크가 그런 걸 막 떠들고 다닐 타입도 아닌 거 같고.




“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에겐 말하면 안 돼. 난 제국 아카데미에 가게 돼.”



“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는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요.”




또다시 얼굴에 들어찬 어둠에 나는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예가 아카데미 안에서 선호되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으니까.




“ 도움이 안 되서가 아니라 나 혼자 가는 게 편해서 그런 거야.”



“ ...........”



“ 진짜라니까!”



“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미 저를 보내지 않기로 하신 결정만 해도 제게는 과분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라스넬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느새 담담한 얼굴이 되어 말하는 그를 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내 한숨에 그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 ....너 사실 꾼이지? 이런 연기 전문이지?”



“ ....네? 그게 무슨...?”




마치 난 밤일에 능력이 없으니 못 데려간다는 걸 이해한다, 는 뉘앙스라니. 저 순진한 표정을 보니 의도하지 않은 건 확실해 보이지만. ‘....그래, 내가 졌다. 니가 짱 먹어,’ 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나를 보며 블레이크가 어쩔 줄 몰라 했다.




‘ .....이것도 인연일라나?’



냉정하게 뿌리칠 수도 있다. 모른 척 보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 ...같이 가자. 제국 아카데미에.”




더 이상 커질 수 없다는 듯이 커진 흑청빛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조금은 허탈하게, 그러나 확실한 미소를 지었다. 선선한 저녁 공기가 부드럽게 밀치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작에게 다시 내가 파예를 데리고 간다고 하자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내 변덕스러운 결정이 그리 맘에 들지 않았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준비하기도 마땅찮은데 따로 생각해놓은 파예라도 있는 거냐.”



“ 블레이크를 데려갈 겁니다.”



“ 그 시체 말이냐?”



“ ......안 죽었다니까요.”




그러나 그는 내 꿍얼거림은 신경 쓰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중하게 내 말을 고려하는 그 모습에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보호자인 그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블레이크를 아카데미에 데려갈 수 없었으니까.




“ 좋다. 데려가는 걸 허락하지.”




다행이다! 기뻐하며 알았다고 한 뒤 나가보려는데 갑자기 그가 조건을 붙였다.




“ 단 시험에 합격한다면.”



“ .,...네?”




시험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 설마 지금 상태로 아카데미에 가서 네 시중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위장할 신분과 우리 가문에 대한 지식, 그리고 혹시나 있을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지 내가 직접 시험하겠다.”



“ ...잠..잠깐만요! 저..삼일 후에 입학인데요?!”




언제 외우고 준비해서 시험을 보느냐는 의미였다. 다급한 내 물음에 그가 살짝 입가를 비틀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 ....그렇지. 그러니 네가 구해온 파예가 쓸 만한 녀석이길 빈다.”










“ ....성격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지! 그게 거절하는 거랑 뭐가 달라...! ...치사해서..”




투덜대며 방으로 돌아왔다. 기껏 블레이크에게 데려간다고 말해놨더니 이런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딪칠 줄이야. .....아무래도 힘들겠지? 블레이크의 상태는 내 처음 상태와 다를 바가 없을 테니. 나도 이 정도 알기까지 이주일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공부했는데 하루 만에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걸 다 공부한단 말인가! 더구나 라이작, 본인이 직접 시험을 주관하겠다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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