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과실]라스넬 - 10

190일전 | 485읽음

“ ...윽. 그 사람은 예외로 쳐야죠! 제국에서 알아주는 검사인데. 그런 사람과 싸우면 누구든지..”



- 태평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런 사람과 언제, 어떤 장소에서 만나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네가 가주와 붙는다면 밀리지 않고 대항할 수 있는 시간은 5분 정도다. 5분 후엔 네 마력과 내 마력, 둘 다 고갈될 테고.....그 뒤엔 네 목숨이 어찌 될 진 나도 모른다.



‘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시간이네.’




인페르노가 심각하게 말했지만 나에겐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난 싸우는 거 자체가 그리 내키지 않았고. 물론 누군가 나에게 칼을 휘두르거나 나를 죽이려고 하면 그에 저항할 것이긴 하지......어?




‘ ...그러고 보니 오늘 내가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지?’




일주일의 기초 훈련 성과라 보기에는 너무 훌륭한 대응이었다. 검은 기류를 휙휙, 피하고 자르고 용감하게 돌진하기까지 했다.




“ .....의외로 제가 검술에 소질이 있지 않을까요?”



- 갑자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



“ 하지만 오늘 일만 보더라도...뭔가 제대로 싸운 거 같지 않아요?”



- 제대로 싸운 거 같다고? ....자기 발에 꼬여 넘어진 멍청이가 누구였지?




싸한 눈길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쳇! 그런 건 좀 잊어주지!




“ ..,,,하지만 그래도 꽤 용감하게 잘 대처했잖아요! 저 칼 들고 누구랑 싸워본 거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구요.”



- 그건 내 영향을 받기 때문일 거다.



“ 영향?”



- 나는 베기를 목적으로 제련된 화염의 검. 누군가와 싸우는 것이 내겐 두려움이나 망설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이런 나의 애고는 나를 사용하는 자에게도 미약하게나마 전이되지. 그렇기에 네가 오늘처럼 어설프게나마 방어할 수 있었던 거다.




헤. 그렇구나. 어쩐지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이 충분히 설명되자 마음이 풀어진다. 그리고 눈이 조금씩 감겨왔다.




“ .....이제 잘래요.”



- 그래. 내일도 널 가르치는 인간들에게 혼날 테니 체력을 보충해 놔야겠지. 얼른 자라.




윽. 자기 전에 그런 무시무시한 악담은 피해주세요. 입을 삐죽이고는 이불을 덮었다. 인페르노가 화르륵 짧게 불타올라 사라지자 곧 어둠이 스며들었다.





다음날부터 또 빽빽한 일정이 시작됐다. 인페르노의 악담이 제대로 통했는지 저번 주보다 더 깐깐해진 선생님들에게 차례대로 볶아져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그야말로 탈진 상태가 되어 식탁에 엎드리고 말았다.




“ .....단기 특강도 정도가 있지....”




이대로 확 가출...아니 출가해버릴까, 심각한 고민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갈색머리를 깔끔히 틀어 올린 란위가 사뿐 안으로 들어왔다.




“ 라스넬님. 데리고 오신 파예가 깨어났습니다.”





“ ....아. 그래?”




심신이 고단했던 탓에 힘없이 반문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하루 만에 깨어나다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던 건가? ...끄응.




‘ 그래도 내가 데려왔으니 보러 가긴 해야 할 텐데..’




그러나 지금 당장은 너무 힘들어서 손가락 까닥 하기도 싫었다.




“ ......나중에 보러가도 되겠지?”



“ 네. 그럼...건강 회복을 우선으로 하라고 전할까요?”



“ 응. 그렇게 해줘.”




흐물흐물해진(?) 내 상태를 알아챘는지 란위는 더 이상 방해 않고 식탁에 널브러진 나를 부축해 침대에 눕혀주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반복되는 바쁜 일정에 나는 그에게 간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중간에 란위가 전해준 소식에 안심이 된 탓도 있었다. 블레이크가 밥도 먹고 몸도 움직이며 조금씩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블레이크를 만나지 않고 아카데미에 갔을지 모른다.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막 댄스 교습을 도망치다시피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은 날 팽이로 만들 생각이었는지 수업 내내 멈춤 없이 돌도록 시켰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돌고 도는 세상 속에서 정신을 가늠하지 못한 채로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낯선 길목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 ...여...여기가 어디지?’




새하얀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들만 보다가 회색빛의 작은 주거 형 건물들이 눈앞에 가득하니 당황스러웠다. 저택 안에 이런 곳도 있었다니, 새삼스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사람이 있으면 길을 물어볼 요량으로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한 건물에서 시종 차림의 남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잠깐, 이라고 외치면 그쪽으로 뛰어가려던 나는 순간 발을 멈췄다.



상...상당히 많이 나오..잖아? ....그래. 이건 좀 아니지! 얼른 등지고 있던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보같이 길을 잃었다고 하기엔 좀 그랬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귀족의 체통을 항시 잊지 말라던, 교양 담당 선생님의 혹독한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어? 저 사람은....블레이크? 근데...’




건물에서 나온 시종들은 삼삼오오 끼리 지어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점심시간이 끝나고 근무지로 돌아가고 있는 듯 했는데 그 무리에서 낙동강 오리알처럼 혼자 외로이 떨어져 가고 있는 검은 머리의 인영이 보였던 것이다.




‘ 분위기가 뭔가...이상한데..’




블레이크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거 같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블레이크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느낌이랄까?




‘ 여기에도 왕따, 은따가 존재하는 건가...’




이런 문화는 달랐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점심을 먹으러 별궁에 가는 대신 나는 란위를 만나러 갔다. 보통 때의 란위는 본관에서 가주의 시종 겸 비서로 일하고 있었기에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란위.”



“ 라스넬님.”




그러면서 빙긋 웃어준다.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잠깐 시간 있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아. 가주님께 이것만 전해드리고 오면 그 다음은 점심시간이라 괜찮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신가요?”



“ 응? ...아니. 전해드리고 와. 난 여기 있을게.”




란위가 서류철을 들고 일어서는 걸 보면서 나는 방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가주의 일을 보조하는 사람들이 사무를 보는 장소로 깔끔하게 배치된 책상과 의자들이 이전 세계의 사무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보르크 무가는 단순히 검술을 연마하고 기사단을 훈련시키며 제국의 서쪽 국방을 지키는 역할 외에도 그에 딸린 수많은 도시들의 행정을 가문 이름하에 관리해야 했다. 더군다나 마물의 숲이 안정기에 들어간 이래로 이어진 10년간의 평화시대에 맞춰 행정 관련 업무는 더더욱 비중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루에도 처리해야할 크고 작은 결재 서류가 본관 앞에 척척 상자 째로 쌓이는 것을 목격한 뒤로는, 나는 더 확고히 출가 결심을 다질 수 있었다.




‘ ....검술은커녕 서류 결재만 하다 죽을 지도 몰라.’




왠지 라이작이 조금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 라스넬님.”




언제 왔는지 봄 햇살이 가득 담긴 미소로 란위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따스한 느낌이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정말 그것만 먹어도 돼?”




잘 구워진 소시지를 포크로 쿡 찍으며 다시금 물어 보았다.




“ 네. 전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끄응. 나는 란위 앞에 놓인 찻잔을 보았다. 저게 한 끼 식사라니. 왕성한 식욕으로 매번 그릇을 가득가득 비워나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 ....혹시 파예는 다 그런 거야?”



“ 개인차가 조금 있습니다만 대부분 저와 비슷합니다.”



“ 흐음. 그럼 아예 일반 음식은 못 먹는 건가?”



“ 아니요. 먹을 수는 있습니다만 속이 편하진 않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니. 나랑 정반대네. 소시지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생각했다. 원래 이야기만 하려고 했지만 내가 점심 식사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란위가 알고는 이렇게 점심을 먹으며 대화하게 되었다. 한사코 옆에 서서 내 시중을 들겠다는 란위를 맞은편에 앉히고선.



대충 반 정도 먹었을 때, 나는 슬슬 이야기를 꺼냈다.




“ ....있잖아. 내가 데리고 온 파예 말인데..”



“ ....블레이크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놓인 주스로 목을 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혹시....성격이 좀 특이해?”



“ .....무슨 말이신지?”



“ 음..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하고 원활하게 지내기가...좀 어려운 성격이냐는 거지.”




내 말에 란위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아래로 깔았다.




“ ....파예가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주인님께 절대 복종을 한다는 건 동일합니다만 개인마다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블레이크는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입니다만 그렇다고 특별히 모나거나 튀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흐음. 그래?”




그럼 역시 그들이 고의적으로 따돌린다는 건가? 왜지? 시종들 대부분은 노예일 텐데....하급이라지만 그래도 파예가 일반 노예보다 더 높지 않나....?




“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고민하느라 끙끙거리는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란위가 침묵을 깨고 물어왔다.




“ .....그렇군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란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 예전에 파예는 주인님에게 종속되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걸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 말 그대로 저희는 주인님 곁에서 불편이 없도록 모시며 주인님이 내리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데 그 존재의 의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인님이 저희를 쓰지 않으시거나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 너희를 의미 없다고 하는 거와 같다고?”




착잡한 심정으로 물어보자 란위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저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주인님이 설사 저희를 부리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 또한 주인님의 뜻이라 생각하니까요. 다만...다른 이들에게는 저희가 필요 없는 존재라 판단되어 조금...”




왕따나 은따를 당합니다. ...대충 이렇게 말하려는 거겠지? 파예 입장에서 자신들의 대우가 어떠하다고 말하긴 좀 그랬던지 란위는 말끝을 흐렸지만....쩝. 나는 곤란해진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조금 무심했던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기에 편히 쉬도록 내버려 두려는 거였는데. 그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블레이크를 버려둔 거처럼 보였던 건가? .....끙.




“ ...내가 만약 블레이크를 여기에 두고 혼자 아카데미에 가면 어떻게 될까?”




가주의 최측근 비서로 일하고 있는 란위도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 라스넬님이 내리신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겁니다.”



“ ...내가 내린 명령?”




엥? 명령? 내가? ...언제?! 당황하며 물어보니 란위가 저번에 파예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리러 왔을 때 건강을 회복하라는 말을 전달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어렴풋이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물어보았다.




“ 만약 다 건강해지면? 그땐 어떻게 해?”



“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주인님 입장을 고려, 되도록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반 노예들처럼 저택에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란위와 헤어져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블레이크를 아카데미에 데려가는 건 내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카데미 안에서 ‘파예’의 용도(?)가 정말 정말 고개를 젓게 만들었고.




‘ 하지만 그렇다고 두고 가면 오늘 같은 일이..... 휴우우.’




시원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음에 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늦었을 수업에 걸음을 재촉했다.




모든 수업이 끝나자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시종장이 안내하는 파예가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내가 들어가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몇 번이나 접했지만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다.







[ 귀족에게 노예는 무릎을, 평민은 허리를 굽힙니다. ]




멋들어지게 휘어진 새우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알몬드 베트리모라는 43살의 하급 귀족으로 내 교양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동작과 함께 가르쳐주었다.




[ 하지만 황제 폐하 앞에 서게 되면 노예나 평민은 모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귀족은 이렇게, 제가 하는 거처럼 한 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이면 됩니다. 기사 작위를 받은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



[ 황제 페하 한 분한테만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아님 황가 사람들 모두에게 그래야 하는 건가요? ]




이렇게 질문하자 그의 매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첫날 그가 그랬을 때는 화난 줄 알고 몹시 당황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좋은 질문을 했을 때의 반응인 것을 알기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 황태자 전하께만 그리하면 되고 나머지 황가 분들에게는 그냥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 됩니다.]




복잡하면서도 나름 단순한 인사예절이 이해됨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저번에 란위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 ...파예도 노예와 같이 귀족에게 무릎을 굽혀야 하나요?]



[ 네. 같은 예법이 적용됩니다.]



[ 하지만 란위는 그냥 허리만...]




...숙였는데. 그렇다고 란위가 예법을 몰라 그렇게 했을 리는 없고. 뭔가 다른 건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입 밖으로 중얼거려졌는지 알몬드가 물어왔다.




[ 란위라면 가주님의 파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그렇다는 눈빛을 보내자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파예가 귀족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맞습니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파예는 자신이 모신 주인님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하며 주인님의 지위에 따라 예법이 조금 변화합니다. 가주님의 파예는 아마도 가주님께 인사는 간단히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고 그 명령은 가주님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두 적용됩니다. 가주님보다 높은 분이 이 가문에는 없으니 란위가 허리를 굽히는 것은 나름의 최대 예법입니다. ]



[ ...그렇구나.]




자신의 지위에 따라 파예의 지위가 달라지는 거라니. 이거 계급이 낮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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