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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영]김개똥군의사정2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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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똥군의 사정 2권

    7. 그 이름, 김개똥

    김창완 아저씨가 노래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고무신은 소금 대신 하얀 서리를 잔뜩 뒤집어쓴 채 냉동실 안에서 꽝꽝 얼어 있었다. 그게 거기에 들어가 있는 사연에 대해 승리는 당연히 짐작하는 바가 없었다. 냉장실도 아니고 냉동실이라.... 설마하니, 고무신이 제 발로 냉동실 안으로 걸어 갔을 리는 없고. 이건 설마 치매련가?

    문득, 신발을 냉장고에 넣고 고등어는 신발장에 넣었다던 조기치매 환자 아줌마의 슬픈 경험담이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그 아줌마는 자기 신발이랑 고등어를 착각했을 뿐이지만, 승리는 자그마치 기억에도 없는 남의 고무신까지 주어다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웬지 변태가 된 것 같아."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이런 이상한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생소한 경험이 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황당한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이다.

    "어디에서 나온 고무신일까?"

    너무 얼어서 차마 손도 재지 못하고 그녀는 냉장도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채 이리저리 고무신을 살펴보았다. 깔끔한 흰색 바탕에 잡초인지 대나무인지 모를 그림이 그려져 있고, 한쪽엔 뭘 말인지 알아볼 수 없는 한시가 가득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바닥엔 삐뚤삐뚤한 한들로 써 있는 건........

    "레이몬드 아처 테넌트 주니어. 어라? 이거 레이몬드씨 이름인데?"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이것이 설마 레이몬드씨의 '그것' 이란 말인가? 그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문제의 '그것' 이 바로 이 고무신이었다고? 그 수십 억이 나갈지도 모른다는 그거?

    "에이, 설마."

    '설마' 하다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떠올린 승리는 다시 얼어 붙은 고무신을 노려보았다. 근데, 왜 갑자기 토끼가 떠오르는 거지? 언젠자 꿈속에서 보았던 커다란 코끼가 아마도 고무신을 신고 있었던 것 같아 그녀는 조금 아리송해졌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토끼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건방진 자세로 병나발도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호호' 웃으면서 푸른 들판을 달렸더랬다.

    "그랬던 것 같은데......"

    어째 긴가민가해 승리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고무신 옆에 아이스크림과 냉동만두를 집어넣은 다음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꿈은 그냥 꿈이고, 고무신은 고무신이지. 그리고 우린 벌써 헤어졌는걸."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헤어진 건 아니었다.

    각자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한 것뿐이다. 뭐, 결국은 그 말이 그 말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사흘간 그녀는 '초대형 국제 바람둥이 레이몬드씨와 연애를 할까, 말까.' 하는 문제로 고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은 그가 '생각해 봤는데, 역시 안 되겠다.' 라는 말을 하며 완전하게 포기를 선언하기를. 왜냐하면 그가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해야 했으니까. 그랬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승리는 진즉 그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의 침대에서 반라 상태로 눈을 뜬 순간 엄습해 오던 새카만 공포가 현실을 일깨워 준 덕분이었다.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봐, 그래서 엄마에게 실망을 주게 될까 봐 눈앞이 캄캄해졌었다. 그가 말하는 연애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승리는 그때 알았다.

    그것은 볼에 뽀뽀를 한다거나, 손을 잡고 가벼운 포옹을 해 주는 것들과는 아주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가정 시간에 배우는 '수정이 되는 과정' 과 실제의 '섹스' 만큼이나 달랐다. 그래서 순간 너무 무서워졌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 주제에, 그랬던 주제에 하경이 그의 애인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에 그렇게나 좋아 날뛴 것이다.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넙죽 받아먹었다. 뭐 이런 어이없는 승리씨가 다 있는 건가 그래.

    "휴우, 가방이나 챙겨야지."

    언제나 짊어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을 끌어다 놓고 승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일 시골집으로 내려가야 했다. 가면, 박샘의 말처럼 '선'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23살밖에 안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조차도 할아버지는 약간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게 어디인가.

    중간에 꼼짝없이 유부녀가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간을 준다니 다행이었다. 덕분에 대학 4년 동안은 나름 자유로울 수 있어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연애미수사건은 어쩌면 즐거운 '추억' 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 가출을 해 버릴까?"

    옷가지를 챙겨 넣다 그녀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말짱 헛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 힘들어질 엄마는 어쩌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지레 말라죽을지도 모르지. 그녀라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도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은 할아버지의 뜻대로 코가 꿰어 팔려 나가는 어린 소처럼 끌려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될 것이다.

    '쓸모없는 계집아이, 대학까지 보내 놓았으면 이제 제 몫을 다해 줘야지. 어린 승우 앞길 방해 말고 뒷바라지할 생각이나 해라.'

    지난 설날에 그런 말을 듣고 올라왔던 걸 떠올리며 그녀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됐지 뭐. 어차피 안 될 거였는데, 연애는 무슨 연애."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승리는 주섬주섬 가방을 채웠다.

    백화점에서 사 온 쇼핑백도 챙기고, 집 청소도 했다. 그러면서도 새벽이 올 때까지 그녀는 몇 번이나 냉동실 문을 열고 고무신을 확인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미처 떨쳐 내지 못한 미련한 마음 한 조각을 확인하듯.

    그녀가 마지막으로 챙긴 것은 그가 사 준 빨간색 원피스였다.

    선물이라고 했지만, 돌려주고 싶었다. 쓸데없는 미련을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러는게 좋았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다시 입지도 못할 텐데 무슨 소용이람.

    "차라리 추리닝을 사 주지. 그럼 매일 입어 줄텐데."

    그래, 마르고 닳도록 매일매일 입어 줬을 거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원피스 말고 그냥 저렴한 추리닝이었더라면, 그렇게 아무 표도 나지 않는 옷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원피스를 곱게 접어 쇼핑백에 챙겨 넣은 다음, 그녀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뜬눈으로 아침을 기다렸다. 그러다 아침이 오기가 무섭게 외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진 옷 중 제일 깔끔한 청바지를 입고, 제일 좋아하는 티셔츠와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목도리를 두르고 꼬불꼬불한 머리도 단정하게 잘 빗었다.

    "아, 머리! 할아버지가 보시면 뭐라 할 텐데......."

    파마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조금 걱정을 했다.

    하지만 좀 짧아지고 웨이브가 생긴 것뿐, 심하게 너풀거리지 않으니 운이 좋다면 그냥 어찌어찌 잘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늘 깡똥하게 묶고 다니던 것보다는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긴 하니까.

    "흠. 좋아, 괜찮아 보여. 이뻐. 끝내 줘."

    기합을 넣은 그녀는 미리 챙겨 놓은 짐 보따리들을 양손에 바리바리 든 채 곧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곤 문을 나서기 직전, 냉동실에서 여전히 꽝꽝 얼어 있는 고무신을 꺼냈다. 정말로 '그것' 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레이몬드씨의 이름이 쓰여 있으니 돌려주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가자."

    승리는 당차게 집을 나섰다.

    오늘은 레이몬드씨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었다.

    집을 나선 그녀는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추운 날씨 때문에 덜덜 떨면서 버스에 올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버스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한번씩 돌아보고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레이몬드씨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버스를 타고 그의 회사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분 남짓. 그 시간이 흡사 20년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극복해 냈다. 그리고 여전히 놓은 그의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살고 있는 펜트하우스로 올라가기 위해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거기 학생!"

    로비를 돌아다니던 경비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레이몬드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승리의 꼬라지를 본 젊은 경비가 물었다.

    눈으로 그녀의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은 다음 의심으로 눈을 번쩍 빛냈다.

    "방문 허락은 받은 건가?"

    "허락이요? 아, 그런 것도 필요해요?"

    "뭐? 이 학생이 큰일 날 학생이로구만. 여긴 아무나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야. 미리 연락해서 방문 예약을 하든지, 용건이 있는 사람에게 직접 마중을 나오게 해야지. 그나저나 누굴 찾아온 거야?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걸 보니, 아버지는 아닌 것 같고."

    당연히 아버지는 아니다.

    비록 10살이나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녀는 꿈에라도 레이몬드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백배 양보해서 아저씨라면 혹 모를까.

    '어쩌지? 전화를 해 볼까?'

    승리는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레이몬드씨의 번호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전화를 받아 줄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전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도로 가방에 처박았다.

    생각해 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더구나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가 내려온다는 보장도 없는데다, 굳이 얼굴을 마주한 채 확인사살을 당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거요."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경비에게 건넸다.

    "레이몬드씨에게 전해 주세요."

    "재, 재무이사님께? 이걸?"

    "네. 그분 물건이거든요."

    원피스가 든 작은 쇼핑백과 함께 승리는 꽝꽝 언 고무신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너무 얼어서 차마 손을 대지도 못하겠기에, 그녀는 신문을 묶는 노란 끈으로 굴비 엮듯 고무신을 꽁꽁 묶어 가지고 온 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 진즉에 꺼내놓고 자는 건데' 라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제 감정에 겨워서 그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뭔가.

    "꼭 전해 주세요."

    승리가 진지하게 당부했다.

    그때였다. 그 좋은 운을 어제 몽땅 다 써 버린 탓인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녀가 지나온 입구 쪽에서 갑자기 레이몬드씨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곤 느긋하게 로비 끝 펜트하우스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움직이는 거다. 마치 드라마처럼 극적인 등장이었다.

    "어? 이사님이시다."

    경비가 어쩔 거냐는 듯 승리를 돌아보았다.

    그땐 그녀도 막 그를 발견한 참이었다. 하지만 아는 척을 하는 대신 그녀는 재빨리 경비 아저씨의 등 뒤로 숨어야 했다. 왜냐하면......

    "조심해."

    "으응. 후후, 레이는 다정해서 좋다니까."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둘도 아니었다. 자그마치 셋이다. 레이몬드씨는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추울까 봐 뽀송뽀송한 이불로 꽁꽁 싸맹 아기를 소중하게 꼭 안고, 한 손엔 우유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엔 하경도 아닌, 처음보는 낯선 여자가 해맑게 웃는 얼굴로 나랑히 서서 걷고 있다.

    풍성한 코트에 감싸인 단아한 미모의 여자와 아기.

    조금 멀어서 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친밀함은 승리에게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아, 그랬구나. 충격이었다. 소리 없는 충격이 다가와 그녀를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애인이 없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애인이 아니다. 단지 레이몬드씨는 이미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쁜 사람."

    승리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경언니는 왜 그런 부탁을 한 것일까. 잘 부탁한다는 말은 잘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잘 놀다가 헤어져 달라는 뜻이었던 걸까? 나쁜 레이몬드씨,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으면서. 그건 단지 헤어지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나?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학생, 괜찮아?"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던지 경비 아저씨가 삐죽 돌아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거나 전해 주세요."

    "진짜 이사님 물건 맞아?"

    "맞아요."

    "어쩐지 아닌 것 같은데?"

    "진짜로 그분 것 맞아요. 여기 이름도 쓰여 있잖아요."

    "그, 그러네. 그럼, 전할 말이라도?"

    전할 말? 아, 그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줄 것만 전해 주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메모라도 한 장 남겨야 할 것 같다. 결국, 승리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메모지 한장을 대강 찍 찢어냈다. 진지하게 몇 마디 적은 다음 착착 접어 역시나 젊은 경비 아저씨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무조건 튀었다.

    "어, 학생!"

    그가 뒤에서 불렀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양손에 든 쇼핑백을 열심히 흔들며 후다닥 달려 나와 막 도착하는 버스를 잡아 탔다. 그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끝까지 울음을 삼켰다. 승리는 아팠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난 처음부터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레이몬드가 땅콩을 까면서 말했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칠 줄 알았으니까.]

    [뒤통수.....인 겁니까?]

    [그럼 옆구리에 칼을 맞았다고 할까?]

    [아, 아닙니다. 계속하십시오.]

    무표정하다 못해 아예 싸늘해진 낯짝을 확인하고 재석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요즈음의 레이몬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확하게는 사나흘 전부터다. 그는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손만 대면 피가 툭 튈 것처럼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어쩐지 아슬아슬해 잔소리거리가 아주 많은 재석도 잔뜩 졸아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그 10살이나 어리다는 애인이 불시에 칼침이라도 날린 걸까? 걱정스러운 그의 시선이 다시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또 폐인 꼬라지를 하고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낮엔 그나마 멀쩡하다는 것이다. 너무 멀쩡해서 레이몬드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넥타이까지 따박따박 매고, 비싼 구두도 신고 칼같이 출근을 해 죽어라 일만 했다.

    직원들의 농담을 받아 주거나,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놀러 다니는 일도 없고, 심지어는 온갖 회의며 출장도 직접 챙기고 다섰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결벽증이 도진 건지 그는 죽어라 청소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쓸고, 닦고, 정리를 한 건지 그의 사무실에선 번쩍번쩍 빛이 난다. 서류 한장까지도 무섭게 정리가 되어 흐트러짐이라곤 아예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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