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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날개]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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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쏘날개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Chapter 01

    청승이랄까, 곰상스러운 기운으로 내리던 주말동안의 가을비 이후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답답한 것을 질색하던 성미에 창문을 조금 열어둔 채 잠자리에 들었다가 종아리에 문득 스친 내 발바닥의 싸늘한 체온에 섬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

    그 멍청스러운 기상이 스스로도 어리둥절하여 깨어나서도 곧장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결에 추워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동굴 같은 이불 속에서 잠시 가만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얇은 여름용 시트 너머로 바삭바삭한 아침 햇빛이 비추어 들어오고 있었다. 면직물의 촘촘한 짜임새 사이로 아물아물 통과해오는 햇살의 빛살무늬 결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당장 오늘 저녁부터는 이불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꺼워진 이불을 무진이 싫어하진 않을까. 거추장스럽고 무거워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아.."

    터무니없이 뻗어나가는 생각에 그만 스스로도 질려 깨어나 처음으로 탁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본디 흐릿한 인간이 분분초초 발정하는 짐승과 조금 어울려 살더니 그 사이 그 색에 물들어 버린 모양이다. 곤란하다.

    그러나 썩 불쾌하진 않은 기분으로 길게 몸을 뻗으며 가볍게 근육을 늘어뜨렸다. 미련하여 추위에 어지간히 웅크리고 잤었는지 등줄기가 저릿저릿하였다. 그리고 또 문들 누운 곳이 무척 넓다는 생각이 든다. 시린 발끝을 좀 더 옆으로 뻗어보아도 닿는 것은 없다. 그제야 아침의 허기가 느껴졌다. 이마 위에서 이불을 거두자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환한 햇살이 곧장 위협적으로 미간을 짓눌러온다. 눈살을 찌푸린 채 앓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또 얼마 간 잠시 휑한 침대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쓸모 없이 넓은 침대다.

    어쩐지 목이 칼칼하여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답삭 덮은 채 드디어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먼저 열어둔 창문을 닫고, 고개를 좌우로 꺾어 늘이며 아래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에 나른히 기댄 채 생수를 통째로 들고 마시고 있을 때였다.

    괜스레 바빠진 마음에 얼른 마시던 것을 거두고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아침의 탁한 목청에 더해 급히 마신 것에 사레가 들어선 이상한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상대방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코웃음을 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 믿을 수 없을 만큼 청명한 목소리가 귀청을 환히 틔운다.

    [잘 잤니, 자기?]

    "예, 정혜주 씨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 뜬금없는 인사는 어니어서 이쪽 또한 무던히 대꾸를 받아 넘기자, 역시 수화기 너머에서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진다.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그 명랑한 기운에 절로 입 꼬리가 슬그머니 휘어진다. 그토록 멀고 먼 거리감이 전연 느껴지지 않는 안온함에 귓바퀴에 수화기를 꼭 붙인 채 나는 소파 위로 편안히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러자 곧이어 정혜주가 의뭉스런 어조로 물어온다.

    [응, 나도 안녕히 자고 일어나서 아침 운동 하고 들어오는 길이야. 그런데 자기 그 목소리 어쩐지 굉장히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밤에 창문을 열어두고 잤더니.."

    [에이- 난 또, 여승재가 간밤에 이런저런 험상궂은 일을 당하면서 엉엉 울어대서 목이 쉰 줄 알고 상상하느라 잠깐 즐거웠는데]

    "그런 거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언제나처럼 짓궂은 농담을 걸어오는 것에도 또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심드렁히 대답했더니, 수화기 너머에선 또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반지를 무진이 오해하여 덥석 물어 삼켜버렸다는 얘기를 할 수 는 없었다. 그랬다간 더 심한 조롱거리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대신 내 건망증을 내세워 대체 어디에서 흘려버린 것인 지 알 수 없다며 우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하자 그녀는 별 것 없다는 듯이 흔쾌히 '됐어, 뭐. 괜찮아' 하고 오히려 시무룩해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었다. 그러나 역시 별로 괜찮은 일이 아니었는지, 이후 이렇게 종종 전화를 걸어와선 난처한 기분이 들 만큼 몰아세우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정혜주 씨,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점점 김 실장님 닮아 가세요.”

    [어머, 여승재 너무한다. 그거 정말 불쾌하잖아? 나 반성해야 하니? 새로 태어나야 해?]

    “뭐 괜찮습니다. 주변에 온통 짓궂고 집요하게 구는 사람들이 많아서, 면역이 되는데요.”

    하지만 나는 정혜주에게 얼마든 놀림거리가 되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하루 중 얼마간이라도 쾌활하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역시, 간밤 내내 짓궂고 집요한 일을 당해서 그렇게 목이 상한 거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권무진 보름 전부터 남미 쪽 출장 가 있어요.”

    [아, 드디어 알아냈다. 그래서 여승재가 오늘따라 유난히 말대꾸 또박또박 해가면서 건방지게 구는구나? 외로움에 가시 돋은 꽃이란 말이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하하! 그렇지! 자고로 여승재는 그렇게 수줍은 듯이 말끝을 흐리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해 줘야 여승재지, 응?]

    이만하면 오해를 풀겠더니 하고 내세운 사실 앞에 정혜주는 오히려 또 멋대로 상상을 펼치고는 기어이 내 십팔번을 듣고서야 대어를 낚은 솜씨 좋은 낚시꾼처럼 호방하게 웃어젖혔다.

    졌다, 수화기를 귓바퀴에서 슬쩍 뗐다가 다시 붙이며 나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는 차츰 사그라지더니 정혜주는 이어 씁쓸한 기운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거기다 슬쩍 외딴 데로 눈길 떨어뜨리는 것도 봐줘야 하는데...아, 보고 싶다, 여승재 난감해 하는 얼굴.]

    “..거긴 이제 여름인가요?”

    그에 문득 온 몸이 크림처럼 녹아내릴 듯 하여 나는 소파 등받이 위로 기대고 있던 머리를 스륵 옆으로 돌려 길게 트인 창 밖 정경을 시린 눈ㅇ로 바라보았다.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흐렸다.

    [응, 여긴 봄이 가고 있네. 거기는 이제 겨울이지? 오늘부턴 창문 꼭 닫고 자라, 응? 아참, 오늘 말이야.]

    다정한 안부를 끝으로 이제 전화를 끊을까 했는데 깜빡한 게 있다는 듯 정혜주는 이어 목소리를 바꾸어 말을 붙였다. 예,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 주었다.

    [운동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거야. 돌아봤더니 동양인이 ‘정혜주 씨 아니세요?’ 하더라. 여기 시외라서 의외로 한국사람 잘 없는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한국분이세요?’ 하면서 인사 해 버렸다? 그리고 운동 후에 같이 음료수도 마셨어. 몸매가 어쩜 이렇게 근사하냐느니, 피부가 눈이 부시다느니, 얼굴이 조막만 하다느니, 오랜만에 찬양을 좀 받았더니 내가 오늘 기분이 썩 좋으네?]

    “그러셨어요?”

    들뜬 어조로 재잘거리는 말이 사뭇 어린 계집아이의 그것마냥 귀엽게 들려 나도 모르게 설핏 웃으며 달래는 투로 대꾸해버렸다. 그에 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는지 수화기 너무 정혜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평소와 같은 어조로 농을 걸어왔다.

    [어머나, 방금 자기 꽤 근사했다? 아아, 가슴 떨려. 여승재 은근히 선수란 말이야. 응?]

    고맙습니다. 웃으며 대꾸했다. 창 밖 너머 멀리 내다보이는 강물은 흐린 날씨 속에서도 번들거리며 햇빛을 반사하고 그 위로 그물처럼 엮인 고가도로에선 장난감처럼 보이는 차들이 쾌활하게 열을 지어 내달리고 있었다.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들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나는 ‘정혜주 씨’ 하고 그녀를 속삭여 불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시간은 훨씬 더 힘이 세요.”

    [한국 사람들이 냄비근성 있는 게 아니라?]

    “그것도 한 몫 하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운동 계속 열심히 하시고, 담배도 좀 줄이시고... 관리 잘 하고 계시라고요.”

    [김 실장 같은 소릴 하네? 싫어. 좀 더 여승재스럽게 해줘.]

    “...저도 보고 싶어요. 저혜주 씨.”

    그리고 보는 사람 없이 괜스레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눈길을 내리깐 채 고백해 버렸다. 그에 당장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선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끊긴 걸까 싶어 ‘정혜주 씨?’ 하고 부르자, 그제야 무척 아쉬운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곤 말을 이어왔다.

    [아, 정말 아깝다. 여승재 거기가 말린 멸치 같지만 않았어도 반디 잃어버린 대신 나한테 장가와야 한다 했을 텐데..]

    “이만 끊겠습니다.”

    번뜩 정신이 들어 나는 허리를 곧추 세우며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에 정혜주 역시 요란스럽게 웃으며 ‘자기 좋은 하루 보내라!’ 하곤 먼저 전화를 끊었다.

    “.....”

    뚜우- 길게 이어지는 통화 단절음에 잠시 얼이 빠져 수화기를 계속 귓바퀴에 붙여 놓고 있다가 뒤늦게 피식 웃으며 이쪽 역시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은 재떨이에 눈길을 주곤 멈칫 멈추어 서선, 결국 다시 무릎을 굽힌 채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누렇게 변색 된 담배꽁초가 까만색 도기 재떨이 위에서 처량하게 꼬부라져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이승현이 그의 트렁크를 가뿐이 옮기는 동안 무진이 잠깐 물고 있었던 담배였다. 그러니까 벌써 보름째 방치 되어 잇는 쓸모없는 꽁초다. 보기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고약한 냄새도 나서 버려야 하겠지만 행여 내가 없는 동안 청소 등을 맡아 해 주는 도우미가 치워버릴까, 아주머니가 오는 날에는 재떨이를 위층-그곳은 도우미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 두었으니-으로 가져가 따로 보관해 두기도 했었다.

    딱히 그 담배꽁초 하나에 먼 거리의 무진의 무탈한 운을 대입 시킨 것은 아니며, 당연히 나 또한 버려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보름 동안 그게 어떻게 생각만으로 그치게 되어 버린 것 이었다. 그리고 오래 두고 보니 나쁜 냄새도 다 빠졌는지 이제는 보기에만 흉측할 뿐 악취는 없다. 알고 있다, 단지 쓰레기일 뿐이다. 그렇지. 하고 테이블 위에 턱을 올린 채 뚱한 얼굴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름 동안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보고 싶다거나 하는 낯간지러운 통화는 소름 돋아 이쪽도 사양하지만, 하물며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정도는 흔한 동성 친구 사이에서도 별스럽지 않은 일 아닌가. 정확히 15일 째인 오늘, 그래서 오늘 도착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 그쪽에서 출발을 한다는 것 인가. 제대로 묻지 않은 이쪽도 문제가 있지만 그의 무신경함도 어지간하지 않은가.

    간단히 쓰레기통에 처박히지도 못한 담배꽁초, 무려 15일 동안 변색되고 허물어지기 시작한 그것을 빤히 노려보며 그에 대해 떠올리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한 손을 뻗어 차가운 질감의 도기 재떨이를 손가락으로 딱 튕겨내고 말았다. 그런데 충분히 무겁다 생각 한 것이 내 손끝에서 테이블 반대편으로 쭉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떨어져 깨어질 까, 화들짝 놀라 퍼뜩 몸을 일으키다가-

    “아...!”

    테이블 모서리에 턱을 찧고 말았다. 눈앞이 번뜩거리는 아픔에 또 급히 턱을 감싼 채 쪼그리고 앉았다. 다행히 재떨이는 아슬아슬 한 지점에서 멈추어 있었다. 아흐으, 턱을 문지르며 그것을 다시 앞으로 당겨왔다. 그리고 이번엔 아예 그 안에서 작게 쪼그라져 있는 꽁초를 슬쩍 집어 올려 보았다.

    그렇게 눈앞까지 가져 온 것을 턱을 문지르며 빤히 노려보고 있자니, 문득 고약한 의구심이 둥실 떠올랐다. 해외 출장이라곤 하지만 보름 정도나 필요한 걸까. 길어도 일주일이면 되었는데. 뭣보다 간부급이 되어선 그리 오래 본사 자리를 비워두어도 괜찮은가. 설마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아...”

    최악이다. 싸구려 상상력에 진저리가 쳐졌다. 자괴감에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퍼뜩 테이블 위로 이마를 쿵 박았다. 그럼에도 꽁초를 쥐고 있는 한 손은 여전히 신전을 떠받치는 듯이 꼿꼿하게 세워져 있다. 분명 내 것인 그 손을 힐긋 올려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아 쯧, 혀를 찼다.

    터무니없는 상상임을 알고 있다. 사실상 무진은 군내에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새마을운동 시대의 고약한 공장장처럼 굴었다. 엄연히 공식적 대표가 자리 해 있는 KM계열사 전체와 해외지사 상황까지 아울러 주어진 업무 외에도 탐욕스럽게 스스로 일을 벌이고 또 물어 오는 듯 했다. 물론 나 또한 기획사 일로 바쁘게 나다닌 탓도 있지만 한 집에 살면서도 하루에 잠시, 그러니까 현관 앞에서 스치듯이 ‘어’ 하고 짧게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이었다.

    ‘어쩔 수 없지. 까맣게 잊혀 져 있다가 불쑥 나타나선 본사 전무이사로 들어앉았어. 큰 형도 지금 내 나이 때 이렇게 갑작스럽진 않았으니까. 비꼬아 보는 치들 입 다물게 하려면 별 수 없어. 두 눈 부릅뜨고 직접 뛰어 다니면서 확실하게 이쪽 존재를 각인시켜 줄 필요도 있으니까 말이야.’

    피로로 까칠해진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그러나 곧게 쳐다보는 눈길만은 형형한 빛을 발하며 그는 말했었다. 그때의 그 목소리야 말로, 정혜주가 의뭉스레 떠올렸던 짐작처럼 야릇한 상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 이었다.

    그렇게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빠듯하게 시간을 쪼개어 서로를 탐했다. 그러니까 잠시 스치듯 마주친 현관 앞에서나 간신히 점심시간을 맞추어 함께 자리한 레스토랑의 문을 걸어 잠근 화장실 안에서나, 혹은 이승현을 잠시 내보내고 주차장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 간 자동차 뒷좌석에서, 필요이상으로 넓은 침대 위에서 정상적으로 몸을 섞은 것은 둘 다 피로감으로 범벅이 되어 비몽사몽인 채로 고작 손에 꼽을 만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손엔 보름 동안 삭고 있는 담배꽁초를 소중히 쥔 채 멍한 얼굴로 그 몇 번을 스스로도 뭐 이런 멍청한 짓을 다 하고 앉았나 싶어서 픽 웃고는 그만 둬 버렸다. 그러나 또 다시 꽁초를 눈 앞에 두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결국 입술 사이에 슬쩍 물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먼지처럼 바스라지고 흩어져 버릴 듯이 연약하고 퍼석퍼석한 질감이 느껴졌다.

    “청승이랄까...”

    조심스럽게 그것을 앞니 사이에 문 채로 혼잣말을 충얼 거리고 있자니 정말이지 불쾌할 정도로 궁상스러워져서 얼른 뱉어 내고 재떨이 째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쓰레기통 속으로 기울여 버리려고 했는데 문득 다시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었다. 역시 오늘 도착인가, 하는 생각에 순간 숨이 덜컥 멎는 듯 했다. 그리고 재떨이를 그냥 한 손에 쥔 채로 쭈뼛대며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이쪽에서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먼저 바쁜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어이, 여승재-]

    “아...예, 실장님.”

    긴장하여 바짝 치켜 올랐던 양 어깨가 스륵 풀려나다 못해 어쩐지 구부정하게 숙여지는 것도 같았다. 다행히 그런 내 나쁜 태도를 보지 못한 수화기 너무 김 실장이 곧이어 빠르게 말을 이어왔다.

    [너, 휴대폰 꺼져 있더라? 어쨌든, 지금 회사 좀 나올 수 있어? 너 오늘 쉬는 날 인 거 알지만 말이야.]

    무진과는 기획사 일을 계속 하되 이전처럼 활동 중인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해주거나 그 일원으로 어딘가에 얼굴을 내보이며 접대를 하는 것들은 않겠다는 반 협박성의 약속을 해둔 상태이긴 하지만, 사실상 이쪽 일이 얌전히 회사 내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거니와 나는 사무 쪽 과는 상관없이 굴러들어와 -실질적으론 정혜주에 의해 꽂아 진 것이지만- 뿌리를 내린 입장인지라 이제와 책상 한 자리만 차지하고 앉겠다고 버티는 것은 영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느새 나는 어느 시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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