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엘디아룬 - 6

127일전 | 21읽음

'



하지만 지지리도 말재간이 없는 그녀로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법.



"아시는 분입니까?"



필론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네르가 싱긋 웃어 보였다.(이 3년간 완전히 몸에 익어 버렸다.)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대답했다.



"그래. 너는 어떻게 만난 게냐?"



네르는 붕대를 감은 발목을 들어 보였다.



"온실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좀 다치고... 그 분이 데려다 주셨습니다."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얼굴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손과 다리도 긁히고 찔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미 덤불 속을 헤매고 다니기라도 한 거냐? 얌전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장미는 까시가 무지 많아요. 그래서 좀 아팠어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네르의 모습에 그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잘못 안 모양이구나. 그래, 이제 좀 괜찮니?"


"아니오. 당연히 아직 아픕니다."


"네르."


"네?"


"그럴 땐 '괜찮아'라고 하는 거다."


"... 나는 안 괜찮은데. 아, 나 이제 공주가 뭔지 알았습니다! 카잔이 가르쳐 줬거든요. 그리고 아빠는 왕이고, 엄마는 왕비고-이건 옛날에도 알았지만-, 오빠들은 왕자래요!"



천진한(상당 부분 '척'한 거지만) 네르의 말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공주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디 한 번 들어 볼까?"



'다행이다...!'



네르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런 불편한 분위기는 딱 질색이었다.



언제나처럼 필론은 거의 저녁이 다 될 때까지 머무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르는 방문을 열어주려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음... 저기요. 아빠는 카잔이 싫습니까?"


"... 아니."



다시 필론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네르는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고민하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또 봐도 되는 거죠? 글자를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네르는 필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싸늘한 그 얼굴에서 네르는 희미한 허락의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3년이나 봐온 사람의


얼굴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네르의 얼굴에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날, 네르는 곤란한 웃음을 흘리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 어째 제가 맘에 안 드시는 것 같군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네르는 속으로 절규했다.



'이렇게까지 매일 보고 싶다곤 안 했다구요, 아저씨!!!'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네르를 보며 카잔은 피식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래봬도 경험 있는 호위기사니까요."



네르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일, 별로 나쁜 일도 아니고 하니 지금은 필론의 눈치 없음을 탓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카잔 경."


"충심으로 모시지요, 네르웨 공주님."



어설프게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하는 공주에게 카잔은 완벽하게 우아한 동작으로 답례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에 이어진 말에 네르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런데, 공주님께선 정식 이름은 알고 계십니까? 제가 알기론 무지 길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보여주신 반응으로 보아선 아무래도...?"


"... 칫, 몰라요, 그래!"



***



카잔에 대해서도 상당히 할 말은 많습니다.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고 할 수 있겠죠. 한참 써놓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겁니다. 이래선 이야기 진행이 안 돼! 쓰면서 카잔이


점점 중요 인물이 되어 갔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한글로 60페이지 넘게 써 놓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처음부터 수정에 들어갔답니다. 이 장도 끼워 넣은 거죠.



설정이 없다는 것은... 무한 수정으로 치달리는 지름길입니다. 네. 그런 거죠.(먼산)




=+=+=+=+=+=+=+=+=+=+=+=+=+=+=+=+=+=+=+=+=+=+NovelExtra([email protected])=+=


1부 5장-한가한 날들 5장-한가한 날들 "그러니까, 그건 심기상의 문제입니다."



어린아이의 혀짤배기 목소리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나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필론 왕도 예외는 아니라서, 그는 피식 웃고 딸의 실수를 고쳐주었다.



"감정상의 문제겠지."


"앗, 실수... 음, 홀로 과자를 먹는 것과 여럿이 먹는 것은 마음이 틀립니다."


"마음이 아니고 기분이다."


"우..."



네르는 그만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필론은 미소 띤 얼굴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손끝에 닿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무척 맘에 들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널따란 방을 비추기에 충분했다. 하늘색 벽에는 신화에 나오는 일들을 연대순으로 조각한 백옥으로 된 돋을새김이


붙어 있었다. 돋을새김은 천장과 바닥 쪽에 한 뼘쯤 되는 넓이로 벽 전체를 둘렀다. 은실로 수를 놓은 푸른색 태피스트리가 한 쪽 벽을 덮었고, 그 맞은편에 화려한


황금 세공의 액자가 붙어 있었다. 액자 안은 밋밋한 흰 천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주위로 상아빛이 나는 작은 문 세 개가 나 있다.



방 가운데의 수정 샹들리에가 왕이 하사한 모빌을 매단 채 늘어졌고 그 아래 커다란 사각 탁자가 놓였다. 그 주위를 주홍색 천을 씌운 소파들이 에워쌌다. 바닥에는


하얀 장미가 어우러진 보라색 벨벳 카펫이 깔리고, 그 위에 갖가지 빛의 방석과 쿠션들이 널려 있다. 저 안쪽에는 고풍스러운 흑단 책상과 의자가 있고, 그 주위에 책장들이


늘어섰다.



나머지 벽의 한쪽은 희고 큰 여닫이문이 버티고 있었다. 문에도 간소하지만 고상한 새김이 되어 있고, 손잡이는 황금이다. 그 양옆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닫는 길쭉한


거울이 자리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벽 전체가 커다란 창문이었다. 남색의 긴 커튼이 양옆으로 걷어져 있다. 그 밖은 하얀 대리석으로 된 테라스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그 창문 앞에 등나무 의자 두 개를 놓고 필론과 네르가 앉아 있었다.



"... 오늘도 많이 실수했습니다. 네르는 바보예요."


"바보 공주는 병사들이 감옥에 가둬 버린다?"



필론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거울의 방안에서의 이러한 일상은 네르와 그만의 비밀 비슷한 것이었다. 네르는 이제 곧 네 살이 되는


아이라곤(이곳에선 만으로 나이를 세므로 한국식으로 치면 곧 다섯 살이 되는 셈이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했다. 요 몇 달 사이에 간단한 문장은 읽고 쓸 줄 알게


된 데다(이 나라의 문자가 표음문자-소리나는 대로 쓰는 글자-라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에 입으로 뱉는 말조차 어려운 단어가 간간이 들어가 있었다.



사실 네르-가은의 주위가 온통 어른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쓰는 말이 모두 격식체라는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아이가 하는 말이 이치에 맞고 합당한 데다 어색한 단어 사용을 빼면 흠잡을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네르는 그 무서운(?) 아버지를 상대로 또박또박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거짓말하면 안됩니다. 그럼 아버지도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 있습니다."



필론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네르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바보란 말이냐?"


"저번에 제가 쓴 글씨도 못 읽었으니 바보입니다."


"... 네 글씨가 악필이란 생각은 안 하는구나."


"악필,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너같이 글씨 못 쓰는 사람이나 굉장히 못 쓴 글씨를 가리키는 말이지."



네르는 그만 입이 한 자나 나왔다.



"... 유모와 리에나, 이모님, 하론, 카잔 경은..."


"그거야 나이에 비해 잘 쓴다는 말이겠지."


"아닙니다! 지금 보여 드릴 테니 잘 보세요!"



필론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이는 다다다다 방안을 가로질러 책상으로 뛰어갔다.



'그러고 보니 많이 예뻐지긴 했군.'



불그스름하던 머리칼은 이 년쯤 전부터 진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진한 적갈색으로 바뀌었고, 완전히 희게 바뀐 피부에 본디 뚜렷하던 이목구비가 더해져 확실히


예쁘긴 했다. 게다가 큰 키와 곧은 팔다리 덕에 네르는 거의 대여섯 살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성숙이 빨라도 나이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똑똑한 것이었지만 필론이


육아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 혼자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을 뿐 궁 안에 천재 하나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 보세요!"



어느새 수북한 종이뭉치를 들고 와 매달리는 네르였다. '쓴다'기 보다 거의 '그린다'에 가까운 글씨들을 보며 필론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네르는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잘 썼죠?"


"음, 악필이 이 정도면 거의 예술이지."


"예술?"


"굉장히 뛰어난 솜씨라고."


"'신기'랑 비슷한 말입니까?"


"그래... 어디 보자, 이건 네 이름이냐?"


"... 아버지 이름입니다.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그럼 나쁜 사람입니다."



종이를 넘기던 필론의 손이 멎었다. 청회색 눈동자에 다시 한기가 돌았다.



"나쁜 사람이라..."



네르는 움찔하며 필론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틀린 입매는 짙은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르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 아닙니다."


"아니, 난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했으니 이 아비도 나쁜 사람이야. 거짓말하는 놈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고, 네 아비는 세상에서 제일 거짓말을 잘 하는 놈이다.


, 너같이 착한 애가 나같이 나쁜 놈을 아비로 두면 쓰겠느냐? 썩 꺼져라!"



우지직하며 종이뭉치가 우그러졌다. 팔락팔락하며 흰 종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르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역정에도 눈을 크게 뜬 채 그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고통에 찬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스쳤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모빌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필론은 정신이 들었는지 흠칫했다.



"... 용서하세요. 앞으로 바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말도 않겠습니다."



그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딸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콱 막혀 왔다. 그 애는 단지 장난이었을 뿐인데, 그런데...



"... 그러니까 삐지지 마세요."



필론은 그 말에 일시에 긴장이 풀리며 허탈해졌다.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



네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이 발개지며 조그만 발을 쾅쾅 굴렀다.



"다른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웃으면 안 됩니다!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그래도 웃음소린 멎을 줄 몰랐다.



'망할. 남이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데 웃다니...'



가은은 입 속으로 투덜투덜하면서 소파에서 뒹굴고 있었다. 주홍색 쿠션이 무척 푹신해서 잘못하다간 구석에 처박힐 염려가 있다는 걸 제외하면 어린애가 뒹굴기


딱 좋은 크기였다.



'아무튼 그 아저씨는 나랑 있을 땐 왜 그렇게 화를 잘 내는지 몰라. 그것 뿐이야, 전엔 울기도 엄청 울었으면서... 요샌 내가 컸다고 안 우는군. 그래도 웃기는 잘 웃어서


다행이다. 왕이란 건 역시 힘든 일이야. 내가 공주로 태어나서 다행이지.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여자가 하라니. 체력 좋은 남정네들도 힘든 걸 말야...'



데구르르. 발이 등받이 밑에 박혀 버렸다. 가은은 낑낑거리며 발을 뽑으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았다.



'근데 어째 갈수록 그 아저씨는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나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역시 나이가 들면 신경질도 느는 걸까?'



겨우 발이 뽑혔다. 실크 양말이 발에서 저만치 내려가 있었다. 가은은 다시 양말을 한껏 끌어올리고 소파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버렸다.



'지겨워. 귀여운 척 하는 것도 지겹고,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아저씨 얼굴 보는 것도 지겹고, 이상한 애 취급받을까봐(이미 받고 있지만) 순진한 척, 아는 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지겨워. 말도 이젠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 혀 꼬아가며 하는 것도 지겹고, 맨날 코쟁이들 얼굴 보는 것도 지겹고,


까슬까슬한 옷(이곳과 한국의 면직 기술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입는 것도 지겹고, 인형 갖고 노는 것도 지겹고, 별로 재밌지도 않은 놀이 계속 해야 되는 것도 지겨워.


컴퓨터 게임도 못하고 책도 못 읽고 만화영화도 못 보고 만화책도 못 보는 것도 지겨워. 젠장할, 지겹단 말이야아아아!!!!'



가은은 주먹을 꼭 쥐었다. 분노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좋아.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것도 좋고 뭐든지 시중들어 주는 데다 천날만날 드레스에 최고급 요리 먹는 것도 좋단 말이다. 하지만!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잠도 지난 2년 간 질리도록 잤고 말 배우는 것도 필사적으로 배웠고 방긋방긋 웃어주며 살 터전도 닦았어! 시시껄렁한 애들 놀이는 이제 지겹다고!!!! 빌어먹을,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 있으면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돌아가고 싶어. 아니... 보는 것만이라도 좋아. 다들 어떻게 지내나 보고 싶고 듣고 싶어. 컴퓨터 게임도 한 번 해보고 싶고 읽던 책도 마저 읽고 싶어. 이런 곳은


이제 싫어...'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뜨거웠던 눈시울이 차츰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가은은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오른팔을 들었다. 황금 팔찌가 가느다란


팔을 따라 스르르 내려왔다. 얇은 황금 판에 피어난 한 줄기에 매달린 연꽃 일곱 송이. 연꽃의 뿌리 께에 작은 진주가 점점이 박혀 있다. 마치 물방울처럼. 작은 손가락이


팔찌의 표면을 훑어내려 갔다. 도톨도톨한 세공이 느껴진다.



'... 이곳은 집이 아냐. 이건 내 몸도 아니고.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일어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 있을 것이란 꿈은 3년이나 간직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정말로 게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말처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소환된


아직도 회의적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있던 세계완 전혀 다른 곳에 뚝 떨어져서 돌아갈지 어떨지도 불확실한 상황인 것 하나는 확실했다.



'솔직히 그렇게 좋았던 곳은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뚝 떨어지는 건 별로라구.'



게일을 만나면 꼭 물어볼 게 생겼다.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내 몸은 어떻게 된 거냐고. 다들 많이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냐고.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고 정을 붙여도,


이 세계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 누가 알았겠어? 그 극성맞은 동생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아무리 많이 떨어져 있어도 그놈들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녀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웬일로 한숨을 그렇게 쉬십니까?"



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기척도 없이 그렇게 물어오는 소리에 가은은 이미 익숙해 있었다. 이쪽의 아버지부터가 그랬으니까.(카잔이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고쳐 주었다.)



"간략히 말해서, 아버지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호오, 그럼 용서를 비셔야지요."


"했습니다. 그런데 막 웃으십니다."



대답은 없었다. 네르는 입이 잔뜩 튀어나온 채 반쯤 일어나 앉았다. 벽에 기대어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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