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엘디아룬 - 5

127일전 | 28읽음

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ㅡㅡ;; 쓰면서 애들이 어떻게 되나 지켜보는 중입니다. 아, 그래도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쓰는 건 아닙니다!



기본 설정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쓰면서 캐릭 폭주가 일어나는 것이... 심상치 않더군요.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필론, 확실히 오버였습니다... 원래 그런 넘이 아니었습니다만, 쓰면서 멋대로 생각해 버렸지요... 이미 썼으니 할 수 없어요. 그대로 가야지... 이래서, 엘디아룬은 복잡야릇요상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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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4장-카잔 4장-카잔 오월의 따뜻한 햇살이 온실의 유리창으로 한껏 쏟아져 들어온다. 값비싼 대형 유리와 황금으로 도금한 창틀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높다란 천장 아래 사람의 허리 높이로 잘 손질된 장미나무의 행렬이 보인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 붉은 색, 보라색... 색색가지 장미들이 색깔별로 여기저기 일정한 순서로 무리 지어 있었다. 그 중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색의 장미까지 있었다. 예를 들자면, 파란 장미라든지.



"... 또 길을 잃었네..."



이곳에선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 언어였다. 혀 짧은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장미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화단에 가득 심어진 장미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붉은 것이 흘끗흘끗 보였다. 주변의 새빨간 장미 꽃잎에 비해 갈색의 어두운 색조를 띤 붉은 색의 정체는, 어른의 허벅지 중간쯤 올까말까한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아이의 적갈색 머리칼은 머리 양쪽에서 녹색 리본으로 곱게 매어져 있어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렸다. 에메랄드 그린의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뜬 하얀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여기 저기 나 있었다. 진녹색의 소매 없는 원피스 자락과 자수가 놓인 레이스가 달린 흰 블라우스의 소매 단에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했다. 마치 화단 속을 오랫동안 헤집고 다닌 듯.



아이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가도 똑같은 장미나무들 뿐이다. 다른 점이 있다만 여기서부터 하얀 장미의 행렬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 뿐. 빨간 장미와 하얀 장미의 경계 사이로 분홍색 돌로 포장된 산책로가 나 있다. 가에다 하얀 경계석을 놓고 그 옆에 연두색 돌을 깐 사치스런 도로였다.



아이는 빨간 장미나무들을 헤치고 나와 하얀 장미나무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길을 따라가선 안 된다. 그 길은 완전히 미로였다. 지금도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미아가 되어 버렸다. 차라리 한 방향으로 전진해 온실 벽에 닿은 다음 그 벽을 따라 가 출구를 찾아내는 게 나았다. 예전의 육체였다면 사정이 조금은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장미나무들보다도 키가 작은 지금은 완전히 갇혀 버린 꼴이었다. 그녀의 방향감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 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아얏..."



가시에 수없이 찔려 피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통통한 다리를 감싼 하얀 실크 스타킹은 이미 군데군데 찢겨지고 검붉은 물과 초록색 물이 여기 저기 번져 있었다. 아이는 방금 가시에 찔린 손가락을 쪽쪽 빨며 보람 없는 전진을 계속했다. 온실 벽은 아직도 너무 멀었다. 이렇게 헤맨 게 거진 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팔각형의 거대한 유리 지붕을 보자 지난 10분간 직선 거리로 겨우 20미터 정도 왔을 뿐이란 걸 알았다. 묵묵히 천장을 응시하던 아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화단을 더 지나서, 하얀 경계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놈의 궁은 얼마나 넓은 거야? 대체, 온실 하나가 월드컵 경기장 만하다는 건...'



언젠가 가본 월드컵 경기장 둘레가 이만했던 것 같다. 그땐 지금보다 키도 컸고 빠른 걸음이었는데도 굉장히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짜리 몽땅한 애 다리 갖고 이 미로를 헤쳐나가자니 1시간을 걸어도 끝이 안 나는 것이다.



그때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것이 갑옷을 입고 움직일 때 나는 쇳소리였다. 짐작대로 길 한 쪽에 은빛 사슬 갑옷의 기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초록색의 문장이 수놓아진 망토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금발을 단정히 깎은, 훤칠한 키와 갸름한 얼굴에 어딘지 슬픈 코발트 빛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허리춤에 푸른 색 검집에 담긴 검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아이는 황급히 일어나다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넘어졌다.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넘어지면서 돌에 쓸려 까진 무릎과 손바닥에 피가 맺혔다.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사가 달려왔다.



"괜찮니?"



그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그 손을 잡는 대신 혼자 일어나려다 여린 비명을 질렀다. 기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접질린 발목을 잡았다. 아이가 흠칫 놀라며 상을 찡그렸다.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기사는 혀를 차며 발목을 놓아주었다.



"길을 잃은 거냐?"



길을 잃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길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기사는 그 대답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밖으로. 그리고... 바빠요?"



기사는 그 질문에 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렇진 않은데."


"그럼 제 방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다리가 이래서..."



기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아이의 얼굴이 발개지며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투가 묘한 아가씨로군. 이름이 뭐지?"


"... 이름이 여러 개입니다. 아빠는 네르라고 부르시고, 엄마는 아마 필로네? 플로느인가...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게 한참 지났으니까요. 그 외에는 다들 공주님이라든가 공주마마, 마마, 그렇게 부릅니다."



순간 기사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네르가 올려다 본 그의 입가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공주님이라든가 마마라든가 하는 건 이름이 아냐. 실례지만, 몇 살이지?"


"세 살입니다."


"세 살? 그것 밖에 안 되었단 말이냐?"



기사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슬픈 얼굴이었다.



"그래... 3년이란 말이지.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 더 오래 지난 것 같았는데, 생각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 너는 이름이 뭐지요?"


"'너'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하는 거야. 일단 난 카잔이라고 불러라. 그런데, 넌 반말 쓸 줄 모르는 거냐?"


"알지만, 이젠 존댓말도 쓸 줄 아니까... 다들 나보다 어른이니까요. 무례한 것 같아서 안 씁니다."



카잔은 새삼 네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미소지었다.



"그거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시녀나 시종들에게도?"



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그가 미소지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 꽃구경?"


"방안에만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유모, 리에나, 하론이랑 같이 왔습니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됐어요. 너... 아니, 당신은요?"


"너랑 같아. 그리고 너처럼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을 '길을 잃었다'라고 하는 거고."


"그럼 공주님이라든가 하는 건 뭐예요?"


"그건..."



"그랬더니 아빠가 막 웃었어요."


"아하핫... 그럴 땐 그냥 '고맙습니다' 정도면 된다구."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했단 말입니다."



네르는 변명하듯 말했지만 카잔은 이미 실컷 웃은 후였다.



"... 왜 아무도 나한테 제대로 안 가르쳐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입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그는 어느새 알아채고 말했다.



"그거야 다음에도 그런 일로 웃어 보고 싶은 소박한 욕망들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결국 다시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네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소용없었다.



"말이 너무 어려워요. 쉬운 말로 해요."



네르는 투덜거리며 쥐고 있던 과자를 꼭꼭 깨물어 먹었다. 그 과자가 카잔이라도 된 양.



온실 출구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길로 거울의 방으로 돌아와 유모들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고 난 후 네르가 물었다.



"혹시, 아직도 안 바쁘시면 같이 차 드시겠습니까?"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들은 무척 친해져 있었다. 이것엔 카잔도 놀랐지만, 실은 네르-가은 자신이 더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주긴 했지만, 자신이 먼저 이것저것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죽어도 사교성이 좋다고는 말해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소녀들의 수다 따위는 그녀와 인연이 멀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아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하다니...



"그런데, 넌 인형이라든가 옷이라든가 하는 것엔 관심이 없는 거냐? 물론 난 네 주위 사람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별로 재미없을 겁니다. 내가 재미없으니까."


"어, 싫어하는 거냐?"


"그건 아니고... 너무 많이 갖고 놀아서 인형은 지겹습니다."



'2년 동안 온갖 인형이란 인형은 다 갖고 놀았으니까 질릴 때도 됐지.'



어쩌면 카잔이 그녀가 공주(이젠 그녀도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해했다.)란 걸 알면서도 편하게 대해줘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아랫사람을 험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유모나 주위의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깍듯이 모시는 것이, 어렴풋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친하게 지내기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사람이 사귀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아서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가끔씩 눈이 마주치거나 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웃는 일이 없는 데다,


무척이나 조숙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조용한 꼬마는 친해지기엔 너무 먼 존재였다. 보통 아이들처럼 좋다 싫다 표현하지도 않고, 그저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잘 하고 너무나 모범적인 '착한 어린이'인 공주는, 정말 그 신분만 아니라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었다.(요전엔 너무 온화해서 왕의 자식이 맞냐는 소문도 돌았다.)



네르는 예전에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곤 거의 보여준 일이 없는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온 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솔직히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눈을 뜨면 모두 꿈일 것만 같은, 그러나 그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말을 꽤나 잘 하는데, 글은 읽을 줄 아나?"


"아직... 안 배웠는데요."


"그래? 분명히 빨리 배울 거야."


"당연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네르는 거리낌없이 웃어대는 카잔에게 다소 심술이 나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멍하니 있다 크게 웃었다.



"이거 한 방 먹었는걸. 역시 똑똑해."


"... 방을 먹어요?"


"아아. 그러니까 이거 말야..."



그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네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거, 점잖은 대화에선 안 쓰는 말인 것 같은데..."


"뭐 어때? 때론 이런 말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필론은 깃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집무실 창문으로 불어온 산들바람에 책상에 올려 둔 서류 한 장이 팔랑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다 말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책상 옆의 이동식 테이블에 아직도 두 뭉치나 되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네르에게나 가볼까...'



그는 일어나 의자에 걸쳐 둔 짙은 자줏빛 망토를 둘렀다. 단을 따라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망토였지만 그 안에 입은 옷은 의외로 수수했다.



지금의 집무실만 해도 주인의 고상한 취미를 짐작케 하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을 뿐, 최근 유행하는 보석을 통째로 조각한 장식품이나 보석 모자이크는 이곳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왕비와 후궁들이 거처하는 궁들이 태양궁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주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듯 왕비의 백조궁은 대리석과 진주를, 세느웰의


월계수궁은 에메랄드와 녹옥을, 예니엘스의 장미궁은 루비와 핑크빛 묘안석을 주로 사용해 꾸며졌다. 반면 태양궁은 전대의 장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전보다


더 줄은 셈이다. 전 재상이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그런 것들을 경매에 내놓았던 것이다. 왕실로선 궁상맞기 그지없는 짓이었지만 왕 자신부터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기에


수많은 왕실의 보물들이 그때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태양궁은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 재상이 진짜 예술품들은 건드리지 않고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별로 예술적 가치가 높지도


않으면서 재료만 비싼 것들을 '왕실 소장품'이란 딱지를 붙여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은 수완을 두고 지금도 말들이 많았다. 그가 재상이 된 이후로 왕실 재정이 두 배로


늘어났단 소문이 있을 만큼.



필론은 방 한 쪽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걸어갔다. 마법석들이 뿜어내는 빛의 선 한가운데 서서 그는 약속된 언어를 읊조렸다.



"백은."



다음 순간, 그는 백은의 방에 서 있었다. 네르의 거울의 방은 복도 두 개를 지나야 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예를 표해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하고 거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울의 방 앞에 오자 그는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까르르하고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던 것이다. 그녀가 말수가 없는 얌전한 아이란 걸 아는 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파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도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등을 돌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 뒷모습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저 금발. 한쪽 어깨로부터 늘어뜨려진 초록색 망토.



금발의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갸름한 그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일시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자는 일어서서 필론에게 걸어왔다. 무릎을 꿇고, 주군에게 행하는 기사의 예를 차리며 그가 말했다.



"신 카잔 엘트 샤흔, 오랜 방황에서 돌아와 이제 당신을 충심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목소리였다.



필론은 말라붙은 입술을 열어 간신히 말을 꺼내 놓았다.



"... 허락한다."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지독하게 메마른 목소리였다. 문득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



침묵, 침묵, 침묵, 침묵.



네르는 온 사방에 '침묵'이란 글자가 떠돌고 있는 듯한 느낌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마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가 공연히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가, 다리를 앞뒤로 흔들다가(그러다 다친 발목을 부딪쳐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하며 필론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은 가련하기까지 했다.



필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는 손도 안 대고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은 멍하는 찻잔을 응시하고 있다. 네르는 왜 사람들이 이 아저씨를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 하긴. 저 아저씨 이상했던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잘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가끔은 소리를 죽여 울 때도 있다. 그러나 네르가 제대로 말을 하고부턴 절대로 울지 않았다.



'... 뭔가 말을 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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