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9

127일전 | 60읽음


목운과의 의형제 제안, 너그러운 이해, 외로움의 표출, 벗에 대한 갈망.





청아는 연후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여린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수법을 전부 동원해보인 것이다.





청아와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연후의 표정이 어느 새 부드럽게 녹아내린 상태였다.













청아는 연후의 가까이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는 놀라서 몸을 뒤로 젖히는 연후의 행동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벼루 위에 조용히 놓인 붓을 망설임 없이 잡아챘다.





연후가 그린 복숭아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청아는 복숭아꽃이 핀 가지를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청아가 그린 복숭아꽃 가지는 웬만한 유혹에도 꺾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단단해보였다.





그 복숭아꽃 가지는 풍월주가 된 청아의 각오와 다짐을 반영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후는 청아의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화풍에 넋을 잃은 듯 잠자코 그림만을 바라보았다.





연후보다는 덜한 실력이었으나 청아의 그림에는 쉽게 흠 잡을 만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청아가 복숭아꽃의 가지를 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은 순간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든 연후의 눈에 청아를 데리러 온 부제 지고의 모습이 보였다.







지고는 천화제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풍월주를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청아 대신 각 유파의 수장들에게 간곡하게 가르침을 청한 것도 지고였다.





연후는 전날 풍월주에게 서화를 가르쳐달라며 고개를 숙이던 지고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청아를 위해 부탁하던 지고는 평소의 위엄과 무게를 전부 다 집어던진 채였다.







“풍월주, 가셔야 할 시각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연후는 지고의 딱딱한 음성에서 가득 묻어다오는 다정함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연후가 목운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고도 청아를 사모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고는 다음 대 풍월주가 되어도 아깝지 않은 사내였다.





연후는 화랑 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지고의 존경을 얻은 청아가





여러 모로 대단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아는 지고의 말에 옷자락을 움켜쥐며 일어났다. 그 고아한 자태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연후랑, 풍월주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고의 예의바른 인사에 답하기 위해 연후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섰다.





연후는 옷섶을 여미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풍월주를 위한 일이니 화랑들이 힘을 모아야겠지요.”







깍듯한 인사치레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청아는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지의 행색을 하고 있어도 청아의 위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청아는 눈부신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후랑, 곧 그대를 위한 명을 내릴 것입니다. 우리의 서약이 끝까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연후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청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청아는 요염한 눈빛을 자랑하며 고요하게 웃어보였다.





연한 버들, 하늘에서 내려온 듯 고운 미색과 우아한 자태를 가진 꽃 한 송이.





예화가린파의 수장 우방대화랑 연후가 청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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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지가 풍성하게 늘어진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는 발화지의 꽃 천지는 목운만이 드나드는 비밀장소였다.





아름다운 장소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나 그 정원을 가꾼 이가





바로 목운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그 곳을 넘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목운은 그 곳에서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달빛과 같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자연을 벗 삼아 노는 신선과도 같아서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고도 했다.







과묵하고 무심하기로 봤을 때 화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고조차





느티나무 아래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목운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청아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지고지만





연주에 몰입하는 목운의 집중력을 단번에 깨트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가야금을 뜯던 목운이 낯선 사람의 기척을 느낀 듯 살며시 눈을 떠보였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가야금의 선을 매만지고 있었다.





꼼짝없이 훔쳐보는 꼴을 들킨 것만 같아서 지고는 헛기침을 하며 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풍월주께서 찾으십니다.”







지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에야 목운은 가야금을 뜯던 손을 서서히 멈추었다.





예화가린파에 소속된 화랑들은 예인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묘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하기로 치면 목운이 으뜸이었다.





목운은 유하고 부드러운 듯싶으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화랑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지고조차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목운을 어려워했다.







목운은 어떤 인물입니까,





목운을 찾아오기 전 청아가 내던진 질문에 지고가 답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매섭고 단단해 마치 철의 여인 같던 청아도 목운과의 대면에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단코 목운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못난 행동을 일삼은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를 즐기면서 아름다운 풍경과 동화된 듯 세속의 때를 묻히지 않았을 뿐이다.







“풍월주의 부름이라면 없는 시간이라도 내야겠지요.”







목운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복숭아빛 의복을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처럼 고운 자태를 내보이는 연후와 달리 목운은 사내다운 기개와 계집 같은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목운랑의 능력으로 풍월주에게 도움을 주셔야 하는 것도 사실이나 그분은 당신에게





따로 지시하실 일이 있는 듯싶습니다. 부디 풍월주의 뜻을 헤아리고 그 명령을





받들어주십시오. 여인의 몸으로 사내들을 통솔하니 힘에 부치실 일이 많을 겁니다.”







목운이 아는 한 지고는 분별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 사내가 아니었다.





풍월주의 뜻을 먼저 내보이는 행동은 하극상이라 볼 수도 있었으나





여인의 몸으로 발화지를 다스리는 청아를 걱정하는 지고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분을…… 연모하십니까?”







“부제인 제 의무입니다.”







지고는 장난스럽게 건넨 목운의 질문에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곧바로 대답을 꺼내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성급함이 더 미숙해보였기에 목운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낱 수장도 아닌 제가 조언을 해도 부제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겠는지요?”







목운은 언제나 은은하게 웃으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망하는 사내였다.





어린 시절부터 화랑 생활을 해온 지고와 목운은 마주칠 기회가 잦았으나





서로 충고를 해주고 조언을 구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고, 오원, 사공과 마찬가지로 동도(13~14세의 어린 화랑)시절을 거친





목운은 그들보다 더 일찍 평도(18~19세의 화랑)가 된 인재였다.





물론 한 해 일찍 태어난 자들의 당연한 특권이었으나 선배는 선배였고 평도로 살아온 기간도 지고보다 길었다.





연후는 동도 시절을 거치지 않았으니 제쳐두고





현재 발화지 내에 존재하는 평도 중에서는 목운이 가장 오래된 인물일 것이었다.







전대 풍월주였던 여담의 난이 준비되던 시기에 평도가 되어





시끄럽고 음험한 기운이 감돌던 발화지를 경험한 지고와 달리





목운은 여담이 다스리던 평화로운 발화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반역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오원과 달리





목운은 반역에 참여할 것을 제의받은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여담과 그의 친우들은 반역의 성공을 위해 수많은 낭도들을 지닌 목운을





계획에 동참시키려 했으나 목운은 그 때도 차분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그는 살아남았고 본인을 따르는 낭도들의 목숨도 살려낼 수 있었다.







예화가린파의 화랑들은 권력을 떠나 있으니 그저 가만히 버려두시지요,





수장도 아니었던 목운이 당시 거절의 뜻을 밝히면서 그렇게 답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정말 단지 그뿐일까, 맑고 깨끗한 목운의 성정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지고는 왠지 모르게 피어오르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지만





모든 일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목운의 속마음을 알아채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연후만이 그를 이해하려 무진 애를 썼을 뿐이다.













“조언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심려치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여인이라는 이유로 풍월주를 쉽게 보지 마십시오. 부제께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힘을 품고 계신 분입니다. 부제께서 풍월주를 안전하게 가둬두려 하신다면 오히려





그 분을 잡아두는 족쇄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찬 여인에게 한계가 존재하리라 보십니까?”







목운은 이미 청아라는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지고는 조언을 듣고 나서야 ‘여인으로 만들어 달라’던 청아의 명을 제대로 이해했다.





앞에 나서서 지켜달라는 뜻이 아니라 뒤에서 단단히 받쳐달라는 의미였다.





지고는 풍월주의 기품과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는 부제였다.





청아의 명령을 깨달은 지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같잖은 조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목운은 지고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청아가 있는 내실로 다시 발을 내딛었다.














*














“가무를 연습하시는 것도 좋으나 사내들의 힘에도 부치는 춤들이 많습니다. 춤을 추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신다 해도 욕할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야금 실력을 선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목운이 청했다.





청아는 목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창밖 풍경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고는 목운의 권유에 의구심을 가졌다.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춤이 아닌 가야금을 권하는 목운의 태도는 방금 전 청아가 가진





여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역설하던 때와 달리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목운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풍월주를 우습게 보는 그의 행동을 지적하고 나섰겠으나





지고는 청아를 믿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창 너머의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화랑들을 바라보고 있던 청아가 천천히 목운을 향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평소와 달리 청아의 눈빛은 날카롭지 못했고 총명한 기운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무감정하다 못해 혼탁해보이기까지 하는 청아의 눈빛을 발견한 지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려던 순간





청아는 몇 번 고개를 내저으며 표정을 다잡았다.





냉정함이 흘러넘치는 이성으로 다시금 스스로를 중무장시킨 청아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할 수 없다는 연유로 대충 넘겨버리는 것은 질색입니다.”







청아는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던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검무를 출 것입니다. 준비해두십시오.”







당시 검무는 사내들이 추는 춤이었다.





청아는 여인으로서 사내들이 추는 춤을 소화해내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었다.





목운은 청아의 대답에 야릇하게 미소 지으며 거 보라는 듯 지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대하고 배포가 큰 청아의 성격을 지고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가야금을 권한 모양이었다.





청아가 다칠까 염려스러워 그녀의 선택을 말리려던 지고는 어쩔 수 없이 허탈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목운이 이야기 했던 대로 청아는 한계가 없는 여신의 현신(현세에서의 몸)이었다.







“느티나무 아래에 검이 있으니 곧 가져 오겠……”







목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아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연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거친 태도에 지고도 당황할 지경이었다.





연후에게 서화를 배울 때 청아는 줄곧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지만 목운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너무나 평범하게 청아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따로 목운랑에게 할 말이 있으니, 부제.”







명령을 내리는 순간 청아의 어조는 낮고 간결하며 단호했다.





지고는 본인의 직책을 힘주어 발음하는 청아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지시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청아는 연후와 목운의 의형제 건을 제안하기 위해 지고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지고는 목운 대신 검무에 사용될 검을 가져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바르게 서서 청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내실 밖으로 나섰다.







목운은 고개를 돌려 아직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청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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