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8

128일전 | 65읽음

풍월주로서의 위엄을 지켜내야 합니다.”







사내의 마음까지 가진 여인이라면 그 아름다운 미모는 눈부시도록 빛이 날 터,





청아는 그야말로 완벽한 풍월주의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미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던 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거역할 수는 없었다. 지고에게 있어 청아는 하나뿐인 주군이었다.





하늘의 신만큼이나 위대하고 왕보다도 대단한 존재,





청아가 풍월주가 된 순간 지고는 꼼짝할 수 없이 그녀의 운명에 묶여버린 것이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살포시 미소 짓는 청아의 표정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워서 지고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이라는 한 마디로 결정지어질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는 청아의 뜻을 받들겠다고 마음 속 깊숙이 다짐했다.





충성과 연모의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워진 나머지





지고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청아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그 순간 지고는 자신을 버리고 청아의 인생에 본인의 삶을 내던진 것이었다.





청아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하며 무릎 꿇은 지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사스럽게 웃고 있을 청아를 생각하며 지고는 살며시 눈을 감아버렸다.







무섭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여인.





피할 수는 없었다. 풍월주를 사모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부제의 의무이자 숙명이었다.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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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후의 손끝에 들린 붓은 유려하고 섬세한 화풍을 선보이고 있었다.





청아는 말없이 얇은 종이 위에서 재현되는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풍월주로서 배울 것을 전부 화랑들에게서 취하겠다는 청아의 태도는 바람직했으나





사실 그녀의 속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모와 명성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화랑들과





일대일로 마주하는 일은 청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청아의 눈은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난잡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다잡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연후는 여리지만 약하지는 않았다. 서슬 퍼런 명령도 번쩍이는 뇌물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뿐이었다.





청아는 산수화를 배우겠다는 핑계 아래 연후를 발화지의 숲 속으로 불러냈다.





궁정의 화가가 아니니 초상화를 그릴 일은 없고 불교의 탱화를 배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자연경관을 그릴 수 있는 산수화는 탁월한 결정이었으나 청아가 그 의견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연후와 단 둘이 방 안에 있어봤자 어색함만 더해질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든 숨통이 트이는 바깥으로 그를 불러내야 했다.







그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연후는 복숭아꽃을 살피기 위해 살짝 고개를 쳐들었다.





봄날의 부드러운 바람에 맞추어 꽃잎을 살랑대는 복숭아꽃은 연후와 꼭 닮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청아는 그 순간이 바로 침묵을 깨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다.













“이리저리 떠도는 풍문으로 연후랑의 그림 솜씨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으나 이 정도로





대단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무에 걸어놓기만 해도 벌과 나비가





떼를 지어 몰려들 거라 확신합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도리어 미천한 솜씨를 전수해 풍월주께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연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예의바른 어투로 겸손의 말을 꺼내놓았다.





청아는 왕실의 핏줄을 타고난 왕녀라 하더라도 연후보다 더 우아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늘이 실수로 여인을 사내로 만들어 보낸 것처럼





연후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는 순수한 미색과 꾸밈없는 맑음이 담겨있었다.





청아는 얼굴 한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친근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연후랑께서는 언제 화랑이 되셨습니까?”







“외람되오나 저는 동도(어린 화랑) 시절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17세에 화랑이 되었으니 올해로 3년째가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19세가 되시는 군요, 저와 나이가 같은 벗을 만나 반갑습니다.”







연후는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감히 풍월주와 벗이 되다니 분에 넘치는 말이었다.





하지만 청아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평도(18~19세의 화랑) 시절에 배운 그림이 이 정도 경지에 오르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서화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중요한 법인데 글에도 일가견이 있으십니까?”







청아의 예리한 질문에 연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사이에 감도는 침묵은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연후의 고요한 음성은 어두운 기운마저 단번에 깨트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상태였다.





그는 애써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본래 학문에 관심이 깊어 천상도문파에 뜻을 두었으나 이런 저런 연유로 예화가린파에





발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제 부모님들께서는 출세에 미련을 두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 결정도 기꺼이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연후의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 순간뿐이었다.





청아는 보일 듯 말 듯 입 꼬리를 올리며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연후랑이 천상도문파를 포기하고 예화가린파의 수장이 된 것은……”







연후는 조용한 동작으로 붓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 위로 가져갔다.







“…… 목운랑 때문인가요?”







연후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청아는 복숭아꽃을 향해있던 시선을 천천히 연후 쪽으로 돌렸다.





연후가 들고 있던 붓에서 흘러내린 먹물이 흠 잡을 데 없던 그림 위에 똑 떨어졌다.













“아……!”







연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하게 붓을 내려놓고 망친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아는 연후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요히 웃어보였다.





청아는 이제 화랑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조차 자유자재로 해낼 수 있었다.





사람의 약점을 파악해낼 수 있는 눈썰미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유용한 것이었다.





청아는 곧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연후의 그림 위에 비단 손수건을 덧대었다.





다행히 청아의 비단 손수건은 선명한 먹물의 흔적을 단번에 흡수했지만





그림에 표현되어 있는 혼란의 기미와 실수의 자취까지 완전히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미 망친 그림입니다. 풍월주의 손수건을 더럽히지 않았어도 괜찮……”







“당황하지 말아요, 연후랑.”







청아는 온화한 어투를 자아내며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신의로 벗을 사귀는 것이 화랑의 의무가 아니던가요. 사람이 사람을 연모하는 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요. 예화가린파는 믿음이 강하고 결속이 잘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연후랑처럼 현명한 수장을 맞아들인 덕입니다.”







“풍월주…….”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예화가린파를 지키고 연후랑을 보호할 것입니다.”







연후가 목운에게 빠졌다는 사실쯤이야 그의 눈빛만 살펴도 잘 알 수 있었다.





연후는 조그만 호의에도 크게 보답할 줄 아는 사내였다. 청아는 그런 연후의 특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신의가 두터운 것은 흠될 일이 아닙니다. 남녀의 애정보다 형제의 우애가 강할 수 있지요.





내 연후랑과 목운랑의 나이가 같은 것은 알고 있으나 그래도 하나 청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내 명에 의하여 두 사람이 의형제의 연을 맺는 것은 어떠합니까?”







청아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연후는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의형제의 연. 그것은 곧 두 사람을 연인 사이로 인정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당시 신라의 화랑들은 의형제란 호칭 하에 거리낌 없이 동성애를 나누곤 했는데





부인과의 사랑보다 의형제와의 우애를 더 중요시했을 정도였다.





의형제가 죽으면 그를 따라 목숨을 끊거나 의형제의 미모를 찬양하는 노래를 짓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안 될 말입니다. 풍월주께서 착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







“그의 앞길에 해를 끼칠 것 같아 걱정되십니까?”







청아는 풀숲에 깔린 부드러운 잔디를 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슬이 내려앉은 잔디는 상쾌하고 푸르렀다.







“내 명에 의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낭도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염문설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합당한 명분도 생길 것입니다.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도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겁먹지 마세요, 연후랑. 내가 그대들의 뒤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이렇게까지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한 유파를 책임지는 수장이 아니랄까봐 과연 눈치가 빨랐다.





청아는 불어오는 봄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연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청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우아하게 흩날렸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강렬하고 올곧았다.













“저 또한 그대들의 벗이 되고자 합니다.”







섣불리 야망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청아는 주의 깊고 조심성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들에게 조언을 얻으며 함께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목운랑과 저는 풍월주의 뜻에 따를……”







“저의 편에 서 주시겠습니까?”







충성심이 깊은 예화가린파다.





그들이 스스로 주군을 무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친근한 위치에서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아의 선택은 단 하나, 그들의 진정한 벗이 되는 것뿐이었다.







“사내들로 가득한 발화지에서 여인의 몸으로 그들을 통솔하려니 힘에 부치고 부쩍





외로워집니다. 다른 화랑들은 아직 어리니 그들에게는 강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습니다.





연후랑과 목운랑이 제 벗이 되어준다면 저 또한 그대들에게 기댈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이 의형제의 연을 맺고 우애를 자랑해야 저희들의 우정도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동정심 강한 연후는 청아의 말을 전부 믿는 듯싶었으나





사실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았어도 그 말의 모순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인 연후와 목운, 청아를 제외한 화랑들은 전부 18세, 평도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지고를 비롯하여 오원이나 사공은 동도 시절을 거쳐 왔기에 화랑으로 지내온 기간도 길었다.





청아가 상담을 요청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강파와 한파도 마찬가지였다.





사촌이라는 관계 속에서 청아는 그들에게 얼마든지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으나





그를 거부하고 연후와 목운을 택한 것이었다.





나이에 민감한 화랑들은 한 살 차이라도 민감하게 여기고 깍듯하게 대접했지만





실상 그에 대한 파급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청아는 나이를 예로 들며 예화가린파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연후에게 목운과 의형제 맺기를 요구한 이유도 그러한 특혜를 이용해 그의 충성을 끌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벗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자주 불러내 같이 시간을 보낸다면





제 아무리 주군을 굳게 섬기는 예화가린파라 해도 결국에는 청아의 손을 들어주고 말 것이다.













“풍월주와 벗이 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오나 정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언제든 응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형제 건은 거두어 주십시오.





목운랑은 저와 의형제 맺는 일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운랑이 연후랑을 아낀다는 사실이야 이미 유명하지 않습니까?”







화랑들의 동성애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청아였지만





연후와 목운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붙여놓기만 해도 신선이 노니는 듯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한 채 빛을 내는 자들이었다.





두 사람이 웃고 있으면 발화지 공간 전체가 다 환해지는 듯했다.







“신선처럼 모든 일에 무심하고 자유로운 목운랑도 연후랑의 옆에 있을 때는 다정하게





미소지어보이더군요. 연후랑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연후랑은 화랑을 모시는 낭도가 아니라 화랑을 지휘하는 수장입니다. 함께 헤쳐





나가면 안 될 일이 없는 법입니다. 저를 믿고 목운랑을 믿고 본인을 믿으십시오.”







바꿔 말하면 그 외의 것은 믿지 말라는 뜻이었다.





청아는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세 사람을 묶어나갔고 예화가린파의 충성을 강요하고 있었다.





연후와 목운이 갈라지는 결과는 바라지 않았다.





왕과 맞서는 반역을 꾀하려면 화랑들의 결속을 높이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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