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7

128일전 | 69읽음










6.














이른 아침부터 체력 단련에 힘쓰는 화랑들의 위풍당당한 면모를 감상하는 것은 청아의 큰 기쁨 중에 하나였다.





대열의 앞쪽에서 무예에 몰두하는 화랑들을 지휘하는 사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사공이었다.





사공은 청아에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의지보다 벗에 대한 의리를 더 중시하는 사내이므로





사공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오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아한 내실 안의 창 너머로 화랑들이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는 연무장을 내다보고 있던





청아는 문 밖의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제 지고는 아침마다 청아에게 간단한 보고를 올렸으며 그녀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받들었다.





한지를 바른 문살 사이에 비치는 지고의 그림자는 언제나 듬직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부제, 들어오세요.”







청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고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고 청아는 당당한 자태로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지고는 모든 단장을 끝내고 단정하게 서 있는 청아를 볼 때마다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풍월주의 눈에 잠이 어린다거나 지친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쉴 새 없이 움직였고 행동했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고아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청아라는 여인이 가진 힘이었다.





여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발화지라 청아는 거들어주는 시녀 하나 없이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지만 실수를 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지고는 청아보다 더 일찍 일어나 화랑들을 관리하는 본인의 일상은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청아는 농염한 빛을 가득 담은 까만 눈동자를 들어 지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청아의 눈과 마주하게 된 지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풍월주와 눈을 마주쳐 무례함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아는 지고의 행동에 설핏 웃어보였지만 지고는 계속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 달 보름, 풍월주의 즉위를 축하하는 천화제(天花祭)가 벌어질 예정입니다.”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지고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아는 연무장으로 향해 있는 창을 닫았다.





그녀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조용히 걸어 비단 보료가 깔린 의자 위에 앉았다.







“보름이라……. 왜 하필 보름이지요? 여인인 내가 음의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제 아무리 침착한 지고라 해도 풍월주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고는 땅을 향해 있던 고개를 들어 청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냉랭했던 어조와 달리 그녀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음양의 이치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실 건가요?”







“풍월주, 이것은 당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라 일종의 관례와도 같은 것으로……”







“저에게 관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청아는 소매에 숨겨둔 부채를 펴들었다.





벚꽃 이파리가 그려진 하얀 부채는 청아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소지품이었다.







“여인인 제가 원화로서 임명되는 동시에 풍월주가 되었지요. 이제부터 제가 만들어가는





모든 것이 관례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 관례란, 정해진 행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새로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청아의 당돌한 주장에 지고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보름달이 뜨는 천화제에 있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뒤의 이야기를 건네기가 더 어려워지고 만다.













“부제가 무슨 말을 하실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천화제에서 시를 짓고 칼을 휘두르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제사를 받들어야 하겠지요. 화랑들 앞에서 풍월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그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천화제의 목적 아닙니까?”







“화랑들이 풍월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관례일 뿐이라는 말을 덧붙이려 했던 지고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청아는 앞서 관례를 따르지 않겠다는 의견을 내세웠던 것이다.





청아는 굳센 의지를 표명하듯 입을 굳게 다물고 먼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눈을 번득이는 사내들 앞에서 기생처럼 춤을 출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문란한 성생활이 난무하는 규범 속에서 청아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부제 지고가 그녀의 곁에 머무는 한 그 누구도 함부로 청아를 해할 수 없겠지만





청아는 본인의 위엄을 위협하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배제해버릴 작정이었다.







“천화제에서 재능을 드러내야만 화랑들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납득시켜 주십시오.





저에게 당신은 하늘의 신과 같은 풍월주이십니다.”







하지만 지고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말에 청아는 곧 놀란 표정을 지어보여야만 했다.





무뚝뚝한 냉정함을 자랑하는 지고가 하는 이야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풍월주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하는 부제의 표본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청아는 입을 앙 다물고 살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외숙부인 수광은 청아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청아는 언제나 강파와 한파의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고 무예를 깨쳤다.





시를 짓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혼자 힘으로 해냈고





하늘에 올리는 제사방식과 그 순서 또한 서책에서 읽어 외운 것이 전부였다.





쉽게 볼 수 없는 신분과 기 막히는 미모, 비범한 기운과 비상한 머리 덕에





화랑들을 책임지는 풍월주 원화로 선정되기는 하였으나





청아가 가진 재능은 각 유파를 책임지는 수장들에 비해 미미할 것이 분명했다.





청아는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를 내다보고자 노력 하는 여인이었다.





천화제에서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 웃음거리가 되고픈 생각은 없었다.













“각 유파의 대화랑들과 그를 보좌하는 화랑들은 각 분야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다른 화랑들을 교육하는 일까지 도맡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풍월주를 도울 것입니다.”







지고는 그런 청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청아는 정곡을 찌르는 지고의 지적에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기색을 감추기 위해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 능통해야 하는 풍월주가 한 분야에 치중하는 대화랑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본래 어려운 법입니다. 역대 풍월주 모두 천화제 이전에는 대화랑들의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이것은 관례가 아니라 풍월주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청아는 풍월주로서의 권위를 저버리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만큼 어리석은 여인은 아니었다.





어차피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화랑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벌써부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죄가 될 리는 없었다.





오히려 바로 이 순간 유대감과 친밀감을 형성해놓는 것이 더 현명한 짓일 수도 있었다.





성심성의껏 풍월주를 모시는 지고가 청아를 무시하려 꺼낸 말이 아니었다.





청아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린 뒤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며 부채를 거두었다.













“부제의 의견을 어찌 재고해볼 여지도 없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달 보름까지 20여 일간이 남아있었다.





다른 여인들보다 교양 있게 성장하려 무진 애를 쓴 청아지만





이왕 본인의 능력을 펼쳐보여야 한다면 완벽을 추구해야만 했다.





화랑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풍월주로 지내는 기간 내내 무시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천상도문파, 예화가린파, 자오미강파의 수장들에게 전해주십시오. 풍월주인 원화 청아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한다고 말입니다.”







풍월주의 위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청아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던 지고는 예상보다 온화한 그녀의 반응에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청아에게는 뛰어난 자기 통제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릇 풍월주란 화랑들 개개인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를 시기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청아는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다.





사내들의 무예를 배우는 일은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시를 짓는 일은 환경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웃어넘기기 힘든 제안을 받으면서도 청아는 매혹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지고는 가식적인 그 표정을 보며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청아는 본심을 숨기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지고가 제안한 일도 청아의 입을 거쳐 다시 나오면 그 즉시 명령이 되고 만다.





화랑의 세계에서, 발화지의 공간에서, 청아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고는 이제 청아를 보필하며 각 수장들과 그녀의 만남을 주선해야 했다.





예화가린파의 연후와 목운은 본래 충심이 깊은 인물들이라 군 말 없이 명령을 받들 것이고





자오미강파의 강파와 한파 역시 사촌 누님을 위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천상도문파의 수장 오원이었다.





오원을 설득하지 못하면 사공을 끌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무예야 적당히 지고가 상대해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학문과 도덕 분야는 달랐다.





화랑의 도에 대해서 가장 능통하게 꿰고 있는 사람은 오원뿐이었다.





그는 신라 최고 귀족 가문의 혈통을 지닌 대화랑이다.





그를 사로잡지 못하면 오원을 따르는 낭도들도 놓치게 되고 청아는 어엿한 풍월주로 대접받을 기회를 잃게 된다.





청아는 부채를 소매 속에 도로 넣어두며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오원에게 화랑의 도를, 사공에게 활솜씨를, 목운에게 춤을, 연후에게 서화를 배우지요.





강파와 천화제를 치를 장소를 물색하고 한파와 하늘에 올릴 제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충분합니다. 완벽한 풍월주로 인정받으실 겁니다.”







“하나가 빠졌지요.”







청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청아가 입고 있는 하얀 비단 옷자락이 허공에 가볍게 스치는 동시에 벚꽃 향이 지고의 코끝을 간질였다.







“완벽한 풍월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명한 부제입니다.”







청아는 지고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간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가 처연한 기색이 엿보여 사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나는 그대가 필요해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고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청아를 마주보았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청아가 그런 말을 꺼낸 데에는 필시 연유가 있을 것이었다.





청아는 지고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의 간격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청아는 지고의 옷자락을 붙들었고 지고는 당황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청아는 그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는 듯싶더니 매혹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권력을 탐하는 사내들의 야욕은 때로 무서운 데가 있는 법이지요. 그 때문에 사내의





충심은 때로 계집들의 연모보다 하잘 것 없어집니다. 부제가 나를 배신하리라





의심하지는 않으나 본래 완벽한 풍월주에게는 매력 또한 필요하겠지요. 바로 그것이





여인을 풍월주로 뽑은 왕의 뜻이니 부제께서는 나를 여인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야릇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청아를 보며 지고는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화랑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지고는 남녀의 정에 대해서 무지한 사내였다.





지고는 벗들과 함께 검을 휘두르고 글을 깨우치는 일에서만 즐거움을 찾아냈다.





워낙 과묵하고 침착한 성품이라 벗들에게도 야릇한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사공이 오원을 챙기는 것처럼 살갑지 못했고 연후가 목운을 따르는 것처럼 애틋하지 못했다.





목숨을 바쳐 모셔야 할 풍월주가 여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겸허하게 받아들였으나





그녀가 내세운 제안이 망측하여 지고는 쓸 데 없는 헛기침만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고도 요염한 눈길로 지고를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 뿐이었다.







“풍월주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부제와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일파만파 퍼져나갈 염문설의 주인공이 되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부제께서는 저를





사모해주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빛이 나고 향기로워질 수 있습니다.”







입술을 깨물어 신음소리는 간신히 참아냈지만 놀란 눈동자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지고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청아를 바라보았고 청아는 수줍은 기색 없이 웃어보였다.





여인은 연모의 대상이 될 때 가장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여인을 사모하는 이가 조직에서 가장 큰 힘과 권력을 소유한 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청아는 그 역할을 지고에게 맡긴 것과 다름없었다.





청아의 말에는 이기적인 태도가 그대로 깔려있었으나





지고는 감히 그 발언에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부제는 저를 사모하되 그 답을 바라지는 마십시오. 저는


RELATED 66 [청몽채화]화랑세기 - 8 128일전 62 [청몽채화]화랑세기 - 9 128일전 76 [청몽채화]화랑세기 - 10 128일전 91 [청몽채화]화랑세기 - 11 128일전 45 [청몽채화]화랑세기 - 12 128일전 37 [청몽채화]화랑세기 - 13 128일전 38 [청몽채화]화랑세기 - 14 128일전 36 [청몽채화]화랑세기 - 15 128일전 70 [청몽채화]화랑세기 - 16 128일전 39 [청몽채화]화랑세기 - 17 128일전
TODAY BEST 더보기 1336 [천연과실]라스넬 - 1 128일전 1154 [청몽채화]화랑세기 - 1 128일전 494 [아키즈키 코오] 후지미교향악단 3부 - 1 128일전 495 [떠오른구름]붉은장미꽃처럼 - 1 128일전 678 1.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 1 128일전 609 [에르아르]붉은 여왕red queen - 1 128일전 508 [아카네]The Rabbit Holic 1,2부 - 1 128일전 928 [진무이]엉겅퀴 - 1 128일전 426 [Hippocampus]메마른바다 - 1 128일전 588 블레싱. - 1 128일전 712 [레드럼] The game 4round - 1 128일전 632 [반] blue blue friday 외전 - 1 128일전 364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 1 128일전 866 [미코노스]2.복숭아는 맛있다 - 1 128일전 484 [voice]강수, 강공에게 걸려넘어지다-1부 - 1 128일전 1181 [헤이어]_내_침실에_원시인이_산다_내_정원~외전 - 1 128일전 605 [조흔이한]선생님 사랑해요 1,2부 - 1 128일전 279 [판타지]엘디아룬 - 1 128일전 740 [헤이어]닭뼈의 왕자님 - 1 128일전 465 3.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 1 128일전
다음 페이지
요청게시판 요청하기
진행중 자료 부탁드려요! 완료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