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6

163일전 | 137읽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어리광은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한 과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화랑 내에서 적어도 학문에서만큼은 오원을 이기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사공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유혹해 함께 무예에 힘을 썼다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건방짐과 황소고집이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상대할 가치도 없는 여인이야! 난 이제 화랑 따위 그만둘 거라고!”







잠시 동안 청아와 시간을 보낸 오원은 화랑을 그만두겠다고 바락바락 우기고 있었다.





청아의 나긋한 행동에는 강인한 의지와 타오르는 야망이 숨어 있었다.





화랑으로 선발될 때는 그들의 사교성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 화랑들의 수장인 오원은 사람을 한 번 보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오원뿐만 아니라 청아를 알현한 화랑들 모두 그 정도는 쉽게 읽어냈을 것이다.





청아는 의도적으로 본인의 권력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뒤로 돌아선 오원의 붉어진 얼굴을 본 사공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전대 풍월주 여담이 사라진 이후 아무에게도 애정을 쏟지 않는 오원이었다.





굳이 청아가 아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오원의 반응은 진작 예견된 행동이었다.





사공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대며 도전적인 눈길로 오원을 바라보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벗을 어르고 달래는 이런 짓이 즐거울 리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이런 상황은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다.





사실 본인의 화를 이기지 못해 붉어진 오원의 얼굴 표정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화랑을 그만둬? 한 번 해 봐, 그러면 네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까?”







흐음, 짐짓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대며 말하는 사공을 마주하자 오원은 잠시 당황하는 듯싶었다.





괜한 분노에 치밀어 또 주체하지 못하는 말을 내뱉은 것이 분명했다.





사공은 그런 오원의 반응을 눈치 챘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외아들이 화랑을 그만둔다, 너희 아버지께는 그만한 수치가 없을 텐데 말이야.”







약점을 건드린 것은 미안하지만 사공은 오원이 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아들을 향해 호통 치고 윽박지르는 행동만을 일삼는 오원의 아버지는





왕실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지만 서열싸움에 밀려 아쉽게 옥좌를 놓치고 말았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노력을 쏟는 그 열정을 이해하면서도 오원은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또 그만큼 부끄러워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처럼 아낌없는 애정을 베풀어주던 여담에게 더 집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도(13~14세의 어린 화랑) 시절은 이미 지났어. 우리는 이제 열여덟 살의 평도(18~19세의 화랑)다.





의무적으로 3년의 수련기간을 거치겠다고 서약한 몸이야. 좋든 싫든 견딜 수밖에 없어.”







사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이렇듯 사공의 꼬드김에 못 이긴 척 넘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의 뜻을 꺾지 못한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약한 모습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지만 오원은 그렇게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 못난 모습은 여전하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공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간신히 오원을 어르고 달래 놨는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누군가의 발언이 반가울 리 없었다.





화랑 내에서 오원을 당당하게 무시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무시무시하게 변한 오원의 얼굴을 보며 사공은 절망했다.





울상이 된 사공이 뒤돌아보자 부제 지고가 한껏 날이 선 오원의 눈빛을 받아내고 서 있었다.





지고는 오원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맞받아치지는 않았으나 그를 무한정 봐주지도 않았다.





사공은 제발 나 좀 살려달라는 표정으로 지고를 바라보았으나 지고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지고는 짜증스러움이 가득 담긴 손짓으로 검 집 위에 손을 올려두며 오원을 바라보았다.







“그만두니 마니, 화랑은 그 정도의 각오로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원과 사공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지고는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풍월주의 성실한 개가 여기까지 행차하셨어? 엿듣는 일이 풍월주가 내린 첫 임무인가?”







“그러는 너도 전대 풍월주의 개였지.”







화난 표정으로 튀어나가려는 오원을 중간에서 막아선 사람은 사공이었다.





사실 오원이 지고에게 덤빈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지고의 발도술(칼을 뽑아 바로 공격하는 것)은 신통하고 기묘한 데가 있어 사공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정도였다.













“너희들 왜 그래, 나 좀 봐 줘. 나 이 싸움 말릴 자신 없다.”







“대답해 봐, 지고. 만약 네가 모셔야 하는 이번 풍월주마저 반역을 저지른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 때도 모른 척 입 다물고 풍월주가 처형당하는 꼴 보고 있을래?”







사공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는지 오원은 위험천만한 질문을 던져놓았다.





다른 이가 듣는다면 바로 풍월주를 모함한 죄를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잠시 오원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던 지고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화랑들과 달리 부제의 역할을 받아들인 시점부터 나의 주군은 오직 풍월주뿐이다.





나는 무조건 풍월주의 뜻에 따를 거고 그녀의 명령을 받아들일 거야. 왕보다도 풍월주를





먼저 모시는 것이 부제의 임무니까.”







“스승인 여담이 죽어갈 때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던 주제에 뻔뻔하게!”







“그 때는 너도, 나도, 사공도 부제가 아니었어! 일반 화랑들은 풍월주를 존경하지만





그 풍월주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때만 그 공식이 성립해. 하지만 부제는 다르다.





전대 부제는 풍월주의 반역에 반대했지만 그와 함께 처형당했어! 그를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어렸을 때부터 화랑으로 성장한 네가 고작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잖아!”







오원의 눈에는 여담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사공은 지고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오원을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 담긴 몸짓이었다.





지고는 사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았는지 곧 입을 다물었다.





오원은 금방이라도 지고에게 달려들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원.”







하지만 그를 붙들고 있던 사공이 부드럽게 한 마디 내뱉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뒤로 돌려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사공은 멀어져가는 오원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지고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간신히 참고 있는 애 좀 자극하지 마.”







지고는 사공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 쓸쓸한 눈빛에 사공도 차마 더 이상의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자오미강파의 한파가 끈질기게 오원을 의심하고 있어. 책잡힐 행동하면 버티기 힘들 거야.





오원이 쓸 데 없는 행동이나 헛소리 못하도록 네가 조금 더 신경 써 줘.”







결국 지고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는 오원에 대한 걱정이었다.





사공은 냉정함을 가장하는 지고나, 대책 없이 흥분하는 오원이나





참으로 번잡스러운 벗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원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최고의 화랑이다. 그는 성장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 같은





고집과 쓸모없는 오기를 버려야 해. 그게 그의 과제야.”







사공은 물론 지고의 말에 동의했지만 오원을 거칠게 다잡는 것이 최선의 방법만은 아니었다.





성장하는 동안 엄격한 부친 덕분에 수없이 울고 괴로워한 오원이었다.





사공은 그런 오원을 조금 더 활기차고 부드럽게 감싸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고는 그런 다정함이나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지고와 사공의 눈길이 오원이 떠난 쪽을 향해 망연하게 머물러 있을 때였다.













“천상도문파 화랑들끼리 비밀 회합이라도 가지시나?”







나란히 등장한 강파와 한파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공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권력에 목을 매는 자오미강파는 화랑 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자오미강파는 조정의 모든 잡일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높은 지위의 권력자를 배출하는 천상도문파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가뜩이나 한파는 믿음으로 벗을 사귀라는 화랑의 규율을 가끔씩 잊고 시비를 잘 걸어대서





그와 마주치게 되면 여러 모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과묵하고 무게 있는 강파가 한파를 다잡을 때는 얌전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부제와 수장 자리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라. 청아 누님은 반역자를





가만둘 정도로 관대한 여인은 아니니까. 눈치 잘 보면서 엎드려 있는 것만이 네 놈들이





살 수 있는 길이란 말이다. 오원이나 잘 살펴라. 그 새끼가 여담의 뜻을 받들어서





반란의 싹을 키우면 그 때는 네 놈들이 감싸줄 수도 없을 테니까.”







사공은 한파의 말에 반감을 가지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지고는 그 어떤 불편한 기색도 내보이지 않고 무표정만을 유지했다.





사공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애써 장난처럼 말을 걸었다.







“비밀 회합을 가지는 건 오히려 그 쪽인가 본데. 어떻게 네가 풍월주의 마음을 알고 있지?





굳이 친척이라는 사실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더 불리하다는 거 머릿속에 똑똑히 인식되어 있으니까.”







한파의 말은 결국 청아를 욕보이는 결과만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강파는 청아를 정에 휩쓸리는 평범한 여인으로 묘사한 한파의 말을 되새기며 날카롭게 아우를 노려보았다.





한파는 작게 욕을 읊조리면서도 강파의 행동에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풍월주는 그런 분이 아니다. 말 한 마디에 휘둘려서 풍월주를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사공은 어차피 싸우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한파를 바라보던 지고도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강파는 본인이 가만히 있었다면 지고가 한파에게 주의를 주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풍월주는 올해로 19세. 우리보다 한 살 많으시니 예를 다해 모셔주길 바란다.”







고작 한 살 차이라 해도 나이로 정해지는 서열 체계에 엄격한 화랑이었다.





사공은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 강파의 이야기를 듣더니 뒤를 가리켰다.







“풍월주는 물론이고 다른 형님들에게도 예를 지켜야겠지. 저기 19세 형님들 두 분 더





오시는데 한파 너부터 성심성의껏 인사 올리지 그래?”













마치 구름 위를 걷듯 고요한 걸음걸이로 그 장소에 다다른 이들은 바로 연후와 목운이었다.





사공은 한파가 공공연히 예화가린파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청을 한 것이었다.





연후와 목운은 19세, 청아와 같은 나이였다.





한파는 어쩔 수 없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이에 다가온 연후와 목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파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강파, 사공, 지고도 그들을 향해 아는 체를 했고





연후와 목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그에 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여유로움과 예의는 다른 화랑들보다 많은 나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여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헌데 오원랑은 보이지 않는군요.”







“오원랑은 학문에 힘쓰느라 저와도 잘 어울려 주지 않는 몹쓸 벗입니다.”







사공은 목운의 인사치레를 농으로 받아치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연후와 목운은 그 미소에 답하듯 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설핏 웃어보였는데





그 순간 주변에 광채가 비치는 것 같아 한파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연후와 목운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유세를 떨지 않고 언제나 깍듯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 태도는 그들이 무시당하는 원인인 동시에 칭송받는 까닭이 되었다.





목운은 자연스레 무리에서 빠져나왔으나





유달리 수줍음이 많은 연후는 우물쭈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은근히 본인을 노려보는 한파의 눈빛을 느낀 탓이었다.













“연후랑, 함께 가시겠습니까?”







연후는 목운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저도 이만.”







연후는 복숭아 빛 의복을 단정히 여미며 고운 자태로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목운의 뒤를 따랐다.





화랑들은 연후보다 목운에게 수장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목운은 지나치리만큼 연후를 신뢰한 채 그를 돕고 있었다.







발화지에 모여 있는 화랑들의 머리 위로 벚꽃 이파리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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