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5

128일전 | 78읽음



청아는 일곱 명의 화랑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깍듯한 존댓말을 사용했으나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듯 의자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 청아는 그 쪽을 향해 농염한 시선을 자연스럽게 옮겨놓았다.





지고를 필두로 하여 오원과 사공, 연후와 목운, 강파와 한파가 차례대로 들어왔다.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던 방이 순식간에 따뜻한 훈기로 가득 차올랐다.





신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미모들 덕에 넓은 방이 화사하게 변하는 듯도 했다.













“즉위식을 마치자마자 이렇게 각 유파를 책임지는 수장과 화랑이 저를 찾아주셨군요.





제가 먼저 찾는 수고를 덜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의와 기품이 묻어나는 청아의 인사치레가 끝나자





이미 즉위식 이전에 절을 올린 지고를 제외한 화랑들이 전부 무릎을 꿇어 그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눈치 빠른 청아는 그 중 몇몇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청아는 그런 일을 문제 삼을 만큼 속이 좁은 여인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그들의 환심을 사고픈 생각은 없었다.





청아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마음을 활짝 여는 이보다 서서히 충심을 키워나가는 자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1년 안에도 청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랑이 있다면 그 때는 복수의 칼날이 그의 목을 향하게 되리라.







“수장과 화랑들의 절을 받으니 황송한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저는 인사를 받기 위해





풍월주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몸을 일으켜 주십시오.”







지나치게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청아가 마주하고 있는 사내들은 일반 화랑이 아니라 수장과 그들을 보좌하는 화랑이었다.





명령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일을 도모하고 의논을 나눌 동료인 것이다.





청아의 말을 듣자 그들은 곧 몸을 일으켰다.





풍월주의 지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 화랑의 특성이었다.













“전대 풍월주가 반역으로 처형된 후 급히 파견된 몸이라 그대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한 원화 제도에 대해 잘 아실 터이니 제 무지함을





관대하게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대들에 대한 것을 제게 알려주시겠습니까?”







전대 풍월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하지만 옆에서 그의 허리춤을 찌르는 사공 덕에 오원은 입술을 깨물며 앞에 나섰다.







“천상도문파의 수장, 좌방대화랑 오원이라 합니다. 총명할 오(晤)에 으뜸 원(元)을 씁니다.





좌삼부가 맡고 있는 도덕과 학문 분야를 담당하며 문사들을 지휘합니다.”







청아는 오원을 보자마자 그가 장래 재상이 될 재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현재 소항이 맡고 있는 상대등의 직책은 후대에 오원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오원, 부디 화랑들의 좋은 기강이 되어주세요.”







오원은 청아의 격려를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전대 풍월주인 여담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컸던 탓이다.





청아는 그런 오원의 반응조차 웃어넘겼지만 사공은 청아의 기분이 상할까봐 염려되었는지 급히 앞으로 나섰다.







“좌방화랑 사공입니다. 맡을 사(司)에 공 공(功)자로 공로를 세운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좌삼부에서 무예를 하는 몸이라 화랑들에게 무술을 연마시키고 있습니다.”







활달하고 맑은 사내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사공이었다.





사공과 같은 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었다.





청아는 사공을 향해 눈부시도록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방 안에 흐르는 기류를 살피던 연후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펼 연(演)에 따뜻하게 할 후(煦), 은혜를 베풀라는 이름을 가진 우방대화랑 연후가





새로운 풍월주께 인사 올립니다. 남들 앞에 내세우기는 아직 미약하오나 작시와 서화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연후의 말투는 청아보다도 나긋나긋하였으며 다른 화랑들보다도 더 예의 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청아는 계집처럼 고운 그의 자태와 아름다운 외모를 보며 감탄했다.





빛나는 미모에 대해서는 즉위식에서도 이미 목격한 바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또 다른 매력이 더해져 있는 것 같았다.





인사를 마친 연후가 살짝 옆을 돌아보자 설핏 미소 짓고 있던 목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춤과 음악 등 현묘 분야를 맡은 우방화랑 목운입니다. 화목할 목(穆)에 이를 운(云)자를





쓰고 있습니다. 풍월주께서 화랑들을 사랑하시고 화랑들이 풍월주를 존경하는 한,





예화가린파는 성심성의껏 풍월주를 모시겠습니다.”







목운의 이름자에 쓰이는 이를 운(云)은 구름 운이라 읽히기도 하는 한자였다.





청아는 하늘에 떠도는 구름의 이미지가 그와 꼭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풍월주가 화랑들을 사랑하고 화랑들이 풍월주를 존경하는 한 충성을 바치겠다는 전제조건을 붙였다.





청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을 전부 읽힌 것 같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보고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사내였다.





어차피 목운은 예화가린파의 수장이 아니라 연후를 보좌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처 연후가 소개하지 못한 예화가린파의 유파 이름을 언급하는 노련함을 보자





청아는 그가 얼마큼의 저력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화랑들이 조심스럽게 청아에게 인사를 한 것과 달리 강파와 한파는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청아는 본모습을 철저하게 숨기는 여인이었으나





같은 집에서 함께 성장한 쌍둥이 형제는 아무래도 그녀가 편안히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자오미강파를 책임지는 전방대화랑 강파입니다. 산천을 유람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 이름난 산과 큰 내)을





찾아다니는 화랑들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유화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전방화랑 한파입니다. 조정의 각종행사를 돕고 하늘에 올릴 제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한파는 강파와 청아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바로 끼어들었다.





그들은 본인의 이름자도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는 무례를 범했다.





강할 강(强)에 물결 파(波), 굳셀 한(?)에 물결 파(波).





쌍둥이 형제가 강하고 굳세게 자라기를 원한 수광이 지은 이름이었다.





청아가 그들의 이름자를 모를 리는 없었으나 그래도 은근슬쩍 친척임을 강조하는 그들의 태도가 거슬렸다.





수광 또한 이런 혈연관계를 생각하며 아들들에게 주어지는 이익을 취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아는 그런 허황된 기대에 부응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외숙부의 집에서 당한 무시와 박해를 되갚아주겠다는 유치한 복수심은 가라앉혔으나





보다 강한 풍월주가 되고자 한다면 그런 혈연조차 간단하게 버릴 줄 알아야 했다.





물론 실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자오미강파의 의미는 특별했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전술적 위치를 파악하고





나라의 주요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얻으며 하늘에 올릴 제사를 준비하는 것은





장래 옥좌를 차지하고자 하는 청아의 야심과 딱 맞아 떨어졌다.













“고여 있는 진흙탕 물은 그 속에서부터 고요히 썩어 들어가기 마련이지요.”







쌍둥이 형제의 예의 없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강파는 본인의 무례를 인정한 듯 고개를 숙였으나 한파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청아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선 화랑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꺼낸 말은 강파와 한파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풍월주를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고





풀어질 대로 풀어진 화랑의 규율을 탓하는 꾸지람이기도 했다.







“화랑이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풍월주로 있는 한, 지금까지의





문란한 생활과 방탕한 태도는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엄에 찬 청아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저는 나라가 원하고 왕께서 바라신대로 부드러운 태도로 화랑들을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화랑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생활에 희망을 품은 청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먼 훗날 꿈을 이룬 날보다 꿈을 위해 첫 발을 내딛은 현재가 더 의미 있을 것이다.













“그 어디든 어미가 있으면 아비가 있는 법이지요. 온화한 자가 있으면 엄격한 자가





있어야 올바른 규율이 바로설 수 있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말은 곧 유파의 수장들이 화랑들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청아는 본인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청아는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여 일반 화랑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면서





풍월주라는 이유로 그들의 존경을 차지하고,





바로 잡힌 규율과 허물어지지 않는 권위를 과시하며 얕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묘하게 본인의 뜻을 피력하는 청아의 마음을 간파한 오원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그를 나무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 사공의 표정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장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부제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어미라면,





아비는 바로 부제가 아니겠습니까? 부제께서 수장들을 다잡고 화랑들을 세워주셔야





저도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아의 눈이 옆에 있는 지고를 향했다.





지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한파는 욕심을 품고 매와 같은 눈빛으로 청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버지인 수광과 청아 사이에 권력에 대한 암묵적인 협의가 오갔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청아가 수광의 부탁을 무시하리라는 예상은 감히 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청아는 그런 한파의 짐작을 비웃듯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부제의 자리는 지고가 그대로 지킬 것입니다. 각 유파의 수장들도 이 조직의 형태를 유지시키겠습니다.”







“누님!”







“앞으로는 그 호칭을 삼가주십시오, 저는 왕의 어명으로 선정된 화랑들의 풍월주입니다.”







한파가 거세게 항의를 표하자 청아는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오히려 사촌지간이기에 남들보다 더 엄격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풍월주로서 청아의 자질을 의심하는 뒷말들이 계속 나오고 말 것이다.





표독스러운 얼굴로 소리치던 청아는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왜 그러십니까, 한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한파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강파가 부제가 되고 한파가 전방대화랑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추측은 그야말로 혼자만의 상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청아는 그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서약을 한 적이 없었다.





강파는 쓸 데 없는 행동을 삼가라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우에게 주의를 주며 청아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청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 넣어둔 부채를 활짝 펴들었다.





하얀 부채를 다루는 그녀의 손짓 자체가 매우 아름다워서 자리에 모인 화랑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청아는 곧 부채를 접어 바깥쪽으로 휘두르며 모두 나가보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다른 화랑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도 기분이 상한 한파는 입술만 꾹 깨물고 있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느라 인사할 시기를 놓친 강파의 시선이 청아의 눈길과 마주했다.





청아는 그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제나 강파를 꼼짝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표정 그대로였다.





강파는 청아의 미소를 그대로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쩌면 나는 정말 골치 아픈 여인을 연모하게 된 걸지도 모르지.





허나 권력을 잡고 싶어 그대를 탐낸 것이 아니니 그대의 명령이라면 몇 천 번이라도 받아들이겠다.





당신은 내 연모의 대상이며 새로운 희망을 쥔 풍월주이니 나 따위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당신은 알고 있겠지. 화랑을 품은 풍월주는 곧 신라의 주인이며 시대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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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원은 화가 난 듯 파란 의복의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거칠게 걸어갔다.





사공은 점점 재빨라지는 오원을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의 보폭을 더 늘려야만 했다.







“오원, 이야기 좀 해.”







“됐어, 난 이제 그만둘 거야.”







사공은 오원의 고집이 이런 극단적인 방향으로까지 치닫지 않기를 바랐다.





오원은 반듯한 용모와 빼어난 능력을 지닌 인재였으나





귀족 자제 특유의 교만함 덕분에 좋고 싫음의 구별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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