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4

128일전 | 77읽음

연후에게 수장 자리를 넘긴 이유는





여리고 얌전한 연후를 사내들의 음흉한 시선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문란한 성 생활이 판을 치던 신라 시대,





그것도 사내들만 존재하는 화랑 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했다.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그들의 애정을 비난할 수 없었지만





한파는 이상야릇한 기운이 넘치는 사내들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 시절, 모든 화랑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염문설의 주인공들이 바로 목운과 연후였다.





목운을 연모하는 연후의 감정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으나





춤과 음악에 온 정신을 쏟는 목운의 감정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형님, 자오미강파에도 동성애 나누는 새끼들 있으면 우린 그냥 그 자리에서 죽입시다.”







“입 다물어라. 믿음으로 벗을 사귀는 것이 화랑의 의무다.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것이





네 천성이라면 너부터 베어주겠다.”







“형님도 참, 아우한테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그러는 형님도 이번엔 부제 자리를 노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청아 누님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지고를 몰아내고 형님을 부제 자리에





앉힐 겁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부탁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제 아무리 아버지에게 눈총 받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키워준 은혜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모른 척 하겠습니까?





지고가 천상도문파의 일개 화랑으로 돌아가고 형님이 부제 자리에 오르면 자오미강파의





수장은 제가 되겠지요.”







함부로 떠벌리면 위험해지는 추측들을 속삭이는 한파의 목소리는 낮고도 고요했다.





강파는 아우의 행동을 말리지 않고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강파는 떠나오던 순간 힐긋 자신을 바라보던 청아의 눈빛을 떠올랐다.





머릿속의 생각이 전혀 읽히지 않는 청아는 강파를 보며 한 쪽 입 꼬리를 틀어 올려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강파가 아는 한 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부모 없는 청아를 은근히 무시하고 구박했다.





요부 같은 여인이라 낙인찍힌 것도, 그녀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수광이 청아를 조금만 덜 두려워했다면,





청아가 야망을 누르고 평범한 계집 같은 수줍음을 내보였다면,





강파는 정식으로 그녀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귀족 가문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친척들끼리의 혼인을 권장하는 사회였으니





사촌 간의 청혼은 흠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청아가 너무 강한 여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강파가 청혼할 틈도 없이 떠나가 버렸으며





이제 강파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위를 획득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파가 청아를 탐내는 까닭은 다만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철없는 소년 시절부터 강파를 미치도록 들끓게 만든 것은 바로 지독한 연모의 감정.





심각하게 잠이 오지 않았던 어린 날의 달밤,





강파는 정원에서 산책하는 청아를 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옛일을 회상하는 강파의 귓가에 경직되는 주변의 기운이 느껴졌다.





강파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보였다.





강파의 마음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존귀할 수밖에 없는 청아가 즉위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상도문파의 오원과 사공, 예화가린파의 연후와 목운, 자오미강파의 강파와 한파.





그 뒤를 이은 200여명의 화랑들과 수천 명의 낭도.





뒤에서 그녀를 보필하는 부제 지고까지.





사내들만 존재하는 공간, 발화지에 있는 모든 화랑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대열을 바라보던 청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청아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인이었기에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버렸다.





청아는 사각대는 비단 옷자락을 가볍게 이끌며 단상 한가운데로 발을 옮겼다.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화랑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새로운 풍월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과 같은 소년들의 주인이라, 청아는 그 단어가 주는 생소함과 거대함에 잠시 몸을 떨어야 했다.





외숙부의 집에서 언제나 천덕꾸러기로 자라왔던 청아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화랑을 책임지는 풍월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신라의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화랑의 특성 상 조정에 나가면 화랑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나





풍월주라는 위치는 청아의 야망을 이뤄내는 데 있어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17세에서 19세까지의 소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큰 공을 세울 만한 일이 없기는 했으나





그 능력과 영향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청아는 미래의 재상과 충신, 장래의 장군과 병사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청아는 파란의복을 입은 소년들이 모여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쓱 훑어만 봐도 그 유파에 소속된 화랑들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아의 눈길이 천상도문파의 대열 앞에 서 있는 오원과 사공에게 머물렀다.





꽉 다문 오원의 입가에는 절대로 청아를 믿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는 흙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온순하지 못한 짐승은 본래 길들이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청아는 묘하게 웃으며 오원의 반 발자국 뒤에 위치한 사공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허리춤에는 무서울 정도로 큰 검을 차고 있었는데





사공은 무예를 연마한 손을 사용해 그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자였다.





지고와 마찬가지로 무예를 연마한 화랑들은 꽤 쓸모 있는 존재였다.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운데 대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예술분야를 배우는 일에도 큰 힘을 쏟았던 청아지만





사실 그녀는 춤이나 음악을 즐기지도 않았고 서화나 작시에 관심을 지니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가하게 시를 읊고 춤을 추는 일련의 행동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한가하게 삶을 즐기는 그 태도는 청아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예술을 담당하는 예화가린파는 그 숫자가 적었으며





부드럽고 여린 유파의 특성을 드러내듯 복숭아 빛 의상을 입고 있었다.





청아는 한심한 표정을 지워내려 노력하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예화가린파를 살펴보았다.





대열의 맨 앞을 차지하고 있는 우방대화랑 연후는 마치 계집처럼 곱고 창백한 낯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아는 오히려 저런 사내들을 다루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탐욕에 물든 돼지들보다 연한 버들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연후는 청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낸다 해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볍게 한숨을 쉰 청아는 그 뒤에 있는 목운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한 그의 시선이 청아에게 와 닿았다.





청아는 갑자기 불편해지는 심기를 다잡을 수 없어 눈썹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는 듯 태연하고 무심한 그의 시선은 모든 분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어 풍월주를 배출한 횟수도 가장 적은 유파지만





누구도 그들을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어여쁜 미색을 선보이는 동시에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라





가끔 사내 기생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지만





청아는 그들의 충성심이 누구보다 깊고 견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풍월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기로 유명했다.













연후와 목운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청아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록빛 의복을 입고 자오미강파의 선두에 선 두 젊은이는 청아에게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집안에서 지겨울 만큼 마주하던 강파와 한파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아는 고지식한 강파의 성격을 비웃었으며 권력을 좇는 한파의 특성에 동질감을 느꼈다.





강파는 타협이 불가능한 인물이었지만





한파는 권력을 들이미는 순간 그 누구보다 다스리기 쉬운 사람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청아는 강파를 향해 강한 눈빛을 보내며 수줍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연모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종류의 인간이었으니





청아는 강파를 어떻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쨌건 섣불리 화랑들에 대한 판단을 마칠 필요는 없었다.





청아는 오늘 막 풍월주 자리에 올랐을 뿐이며 앞으로 지겹도록 화랑들과 마주한 채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청아가 대열 전체를 한 번 훑어보았을 때 상대등 소항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며 발화지 전체가 울릴 법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대들의 풍월주, 원화 청아가 왔네!”







소항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열을 지키고 있던 화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청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청아의 꿈은 왕후도 아니고 부귀영화도 아니었다.





성골(신라 골품제도 중 최고의 신분층) 출신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의 벽을 타파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본인이 선택한 남자와 혼인하여 장래 신라를 다스릴 왕의 생모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핏줄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가족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생모가 되어야만 수렴청정(왕실의 여자 어른이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관장하는 정치형태)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작은 세상에는 만족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계집의 몸으로 그녀가 권력을 잡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반역죄로 죽어간 전대 풍월주 여담의 경우와 달리





청아는 뱀처럼 간교하고 여우처럼 총명하게, 그러나 곰처럼 느긋하게 옥좌를 차지할 것이다.







바로, 화랑들을 이용함으로써.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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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발화지 안에 위치한 청아의 공간은 내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호화로운 방이었다.





사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고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방은





청아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졌다.





청아는 이제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 된 방 안에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외숙부인 수광의 집에서는 무슨 짓을 하던지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밥만 축내는 버러지처럼 전락하고 싶지 않아 자진해서 하인들처럼 일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일하면서도 청아는 본인이 귀족이라는 자부심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침실과 방 안의 경계에 하늘하늘하게 걸쳐진 하얀 비단 조각은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우아하게 흔들렸다.





탁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는 좋은 향기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청아는 찻잔보다 그 옆에 있는 인부(도장), 검장(칼), 부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즉위식에서 소항에게 건네받은 세 가지의 상징물을 가지고 있는 한





청아는 언제까지나 풍월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풍월주의 임기는 따로 주어지지 않은 바지만 역대 풍월주는 보통 3년이 지나면 자리에서 물러나곤 했다.





3년, 청아의 야망을 달성시키고 원하는 바를 이룩시키기 위해서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있을 찰나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위협적이지 않은 깔끔하고 예의바른 사내들의 기운,





세 가지 유파를 책임지는 화랑들이 청아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각 유파의 수장인 대화랑과 그들을 보좌하는 화랑들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지고의 목소리에 청아는 몸을 더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즉위식을 무사히 마쳤으나 가까이서 그들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개개인들과 상대할 때는 또 그에 걸 맞는 예법이 필요한 법이다.





일반 화랑들과 달리 유파를 통솔하는 수장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본래 풍월주는 각 유파의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 모든 일은





그들을 따르는 낭도들을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했으므로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청아는 수장을 바꾸어 괜한 분란을 초래하거나 예기치 않은 적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즉위한 직후부터 발화지를 시끄럽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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