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3

128일전 | 73읽음

공과 달리 지고와 오원은 여담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여담은 반역의 결과가 실패로 끝날 것을 잘 알면서도





집안의 기대와 낭도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개혁의 주동자가 되었는데





소중한 제자들만은 죽음의 덫에서 구해내기 위해 반란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스승의 뜻은 이해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엄격한 제 아버지보다





여담을 더 믿고 따랐던 오원은 그 사실에 매우 좌절하고 슬퍼했다.







결국 오원은 여담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 반란에 가담했다고 조정에 거짓을 고하려 했지만





그런 오원의 뺨을 때리면서 뜯어말린 장본인이 바로 지고였다.





더군다나 그는 새로운 풍월주를 모시는 부제의 임무까지 덜컥 받아들였다.





오원은 스승을 그처럼 매몰차게 버린 지고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공은 오원이나 지고 가릴 것 없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오원과 지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반란에 가담하지도 않은 네가 죽겠다고 덤벼드는데! 그 꼴을 지고랑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았어?”







오원은 분노에 가득 차 소리치는 사공의 모습을 보다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져서 사공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고를 용서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는 천상도문파의 수장이다. 반란에 대한





화제 계속 꺼내서 괜한 의심사거나 과거에 얽매일 시간 따위는 없어.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도 다른 사람이 엿들으면 굉장히 수상하게 여겨질 거야.”







“…….”







“정말 모르겠어? 여담을 진정으로 존경했다면 천상도문파를 잘 지켜 보이는 것이 네가





할 일이란 말이다. 여담도 한 때는 천상도문파의 수장이었으니까.”







결국 사공에게 설득당한 오원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천상도문파를 상징하는 파란 의복이 옅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가시지요, 수장. 우리에게는 새로운 풍월주인 원화 청아를 맞이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공은 마음을 다잡은 오원의 등을 떠밀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오원은 그 태도가 거슬리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굳이 불평불만 어린 말을 내뱉거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사공은 오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피식 웃어보였다.





허리춤에 매단 칼을 다시 한 번 정비한 그는 보폭이 큰 걸음을 내딛으며 오원의 뒤를 따랐다.














*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개한 꽃밭의 강렬한 색채가 연후의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싱그럽게 돋아난 느티나무의 초록색 이파리를 걷어내자 목운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 위로 들어 올린 목운의 손끝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기품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춤을 즐기는 목운의 표정이었다.







사선무(四仙舞), 네 명의 신선이 금강산에 올라 추었다는 그 춤은





본래 여러 사람이 어울려 추는 것이 관례였으나 목운은 혼자서도 눈부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춤추는 목운의 빼어난 선은 그의 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나





그 곡선미를 감상하는 것은 근방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뿐이었다.







“목운랑……!”







잠시 망설이다 부른 연후의 목소리에 목운의 눈빛이 천천히 그를 비추었다.





혼자 춤을 추다 들켰으면 금세 얼굴이 빨개질 법한데도





목운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 듯 티 하나 없는 맑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연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후는 그저 방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하고픈 일을 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일보다 서화나 작시에 치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대 풍월주인 여담이 반란을 일으켜 화랑의 개혁이 단행된 이후





예화가린파의 본래 수장도 조정에 나가 직책을 부여받으면서 화랑에서 물러났다.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을 꺼릴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연후가





억지로 예화가린파의 수장이 된 까닭은 목운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연후와 목운 두 사람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미모를 활용하여 낭도들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서툴렀다.





연후는 사람 대하는 일을 낯설어했고 목운은 저 좋을 대로 사는 인물이었다.





화랑이라기보다 예인에 가까운 자들이 예화가린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리고 선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믿음과 충심이 강해 단결이 쉬웠으나





그와는 별개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유파이기도 했다.





특히 목운같은 경우, 귀족 가문의 자제가 아니었다면 광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장, 무슨 일입니까?”







눈부시게 미소 짓는 목운을 보며 연후는 꽉 막힌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새로운 풍월주가 오십니다. 곧 즉위식이 시작되는데 목운랑이 보이지 않아……”







더듬더듬 설명하는 연후의 말을 듣고 있던 목운은 곧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면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가버리곤 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큰 결례를 범할 뻔 했군요. 예화가린파의 수장을 직접 움직이게





만들다니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본래 우삼부를 책임지는 우방대화랑의 직책은 당신에게 갔어야





했습니다. 예화가린파도 당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연후는 본인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목운은 연후보다 결단력이 있고 판단이 빨랐으나 권력에는 전혀 욕심이 없었다.





연후는 그의 천진난만함을 탓하면서도 목운이 화를 낼까 두려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목운은 아무 말 없이 연후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화가린파를 상징하는 분홍빛 의복은 두 사람이 서 있는 꽃밭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지독한 침묵에 숨통이 짓눌리는 것 같아 연후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한 말을 꺼낸 과거가 후회되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수장의 위치가 버겁게 느껴졌다면 연후도 그 직책을 거절했으면 될 일이다.













“죄송합니다, 연후랑.”







하지만 목운은 환하게 웃으며 연후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제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연후랑이 책임져야 하는 유파의 무게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하지만 연후랑이 누구보다 잘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제가 당신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목운랑은 저를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아니오, 할 수 있습니다. 연후랑은 수장의 자격을 전부 갖추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연후랑보다 수장의 임무를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봐온 연후랑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저를 믿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수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예화가린파의 수장은 연후랑이지만





제가 그 옆을 보필할 것입니다.”







연후를 무겁게 짓누르는 책임감을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달래주는 목운의 말이었다.





숨통을 조이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후가 아는 한 목운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개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목운은 검무를 추고 가야금을 연주했다.





은은한 달빛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가끔씩 본인이 연후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운은 알고 있을까.





연후는 목운이 머무는 비밀 장소 한 구석에 가야금이 놓여있고





검무에 사용되는 칼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는 풍경을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시지요, 풍월주보다 늦는 실수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기에 연후는 급히 돌아서서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예민해진 연후의 귓가는 목운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함께 뒤섞인 목운의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져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목운랑, 알고 계십니까.





학문에 더 관심이 깊어 천상도문파로 가야하는 제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화가린파를 선택했습니다.





저를 그 길로 인도한 이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지 못해 화랑이 될 수 없었다면





저 또한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낭도들 중에 한 명이 되었을 겁니다.





저를 이끌 수 있는 당신이 저에게 예화가린파의 수장을 맡아 달라 했습니다.





괜한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반해 화랑이 된 제가 당신을 지휘해야 하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고달픈 운명을 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제 저도 목숨을 다해 이 유파를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님, 당신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따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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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부 같은 년.”







한파의 잇새로 나지막이 새어나온 욕을 듣고 있던 강파는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자오미강파에 소속된 화랑들 전부가 두려워하는 엄격한 목소리로 아우를 꾸짖었다.







“우리와 피가 섞인 사촌누님이다. 그런 욕설은 삼가라.”







“대우해줄 필요가 없는 계집이라는 거, 형님도 잘 알잖습니까. 아버님이 그 년을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모르십니까?”







강파와 한파는 일각(一刻, 15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으나





한파는 언제나 강파에게 깍듯한 형님 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형제간의 서열을 따지는 귀족 가문의 자부심이기도 했고





자오미강파를 책임지는 수장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강파는 입술을 깨물며 아직 청아가 등장하지 않은 높은 단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즉위식을 위해 대열을 정비한 채 모여 있는 화랑들에게





새로운 풍월주의 위엄을 알려주려는 듯 청아는 입장 시각을 일부러 늦추고 있었다.













“오원이 여길 왔나?”







고개를 돌려 화랑의 대열을 훑어보고 있던 강파의 눈에 천상도문파의 오원이 들어왔다.





제사와 공사를 담당하는 자오미강파는 조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탐욕이 깊었고 지위에 대한 갈망이 높았으며 힘에 대한 집착이 강렬했다.





그런 자오미강파의 화랑들에게 천상도문파의 오원과 사공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들은 이미 조정에서 맡을 위치가 보장된 자들이었으며 따르는 낭도들의 수도 많았다.







“사공이 얼마나 어르고 달랬으면 오원이 여기까지 행차했겠습니까. 지고와 사공이 없었으면





오원은 전대 풍월주 여담과 같이 처형되었을 겁니다. 하긴, 뭐 수장이 저 모양이니





천상도문파도 이제 끝장난 거지요. 오래 못 갈 겁니다.”







한파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강파의 질문에 답해주면서도





오원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똑같은 외모를 소유한 강파와 한파였으나 그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강파가 우직하고 곧은 나무 같다면 한파는 이리저리 불어대는 바람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오미강파에게 주어진 초록빛 의복을 잘 소화하고 있었다.













“즉위식이 큰 행사이긴 한 모양입니다. 신선놀음하시던 도사님도 참여해주신 걸 보니.”







한파는 입 꼬리를 들어 올리며 턱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강파는 오원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아우가 가리키는 쪽으로 옮겨 놓았다.





황급하게 예화가린파의 대열 앞으로 들어오는 연후와 목운의 모습이 보였다.





한파는 목운을 신선놀음하는 도사님에 비유하며 대놓고 그를 비꼰 것이다.







“사내새끼들 진짜 생긴 거 하고는…….”







한파의 짜증 섞인 불만이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목운 뿐만 아니라 연후까지 끌어들여 비난하고 있었다.





예화가린파를 책임지는 연후와 목운을 향한 한파의 불평이 강파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아무리 화랑이라지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저건 완전히 계집들 아닙니까.”







꽃 화(花), 사내 랑(郞). 말 그대로 꽃 같은 사내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연후와 목운의 미색은 그 중에서도 특출 났는데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신라시대에 계집 같은 그들의 외모는 장점이면서도 단점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낭도들은 활짝 피다 못해 흘러넘치는 그 아름다움을 칭송했으나





화랑 내에서 그들을 노리는 사내들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목운은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타고 났으니 제쳐 두고라도 연후는 아니었다.





목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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