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11

190일전 | 220읽음

마주할 때마다 가슴에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진실을 가르쳐주어야 했으나





서로가 친남매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에게 상처를 안겨줄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오라버니!”







험준한 산을 오르느라 모화의 손을 꽉 붙잡고 있던 청아는 청운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모화의 손을 뿌리치며 앞을 향해 달려갔다.





청운도 환하게 웃으며 정자 아래로 내려가 청아를 향해 팔을 내뻗었다.





웬만해서는 아이 같은 행동을 자제하는 청아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근심을 잊고 청운에게 뛰어 들어 안기곤 했다.





모화는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왕을 아비로 두고, 귀족 가문의 여인을 어미로 두었으나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아이들.





수광은 대놓고 아이들을 핍박하며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왕을 위협하려 했다.





누구보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아이들이 왕의 약점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모화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헤쳐 나갈 험난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싶어 숨이 막혔다.





보름마다 만나는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여느 때처럼 조잘거렸고





모화는 망을 보듯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들을 지켜주곤 했다.













“오라버니,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될 것입니다.”







정자 위에서 아득하게 펼쳐진 넓은 대지를 굽어보며 청아가 입을 열었다.





청운은 온화함이 가득 담긴 눈길을 들어 단호한 표정으로 중얼대는 청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누구보다 잘 해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오라버니도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확신이 담긴 청아의 얼굴을 보면 그 누구라도 그녀의 말을 단번에 믿고 말 터였다.





청운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나의 누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울 수 있습니다.”







어리지만 품위와 기품을 지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이들이 신라를 이끌어나갈 미래의 기틀이 될 거라 예견했던 모화의 생각은 거짓이 아니었던 셈이다.







“기억하십시오, 누이. 제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 간에 저는 누이에게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누이를 도울 것이니 그 일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치 마십시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청아의 고집을 아무 말 없이 받아넘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청운 한 명 뿐이었고





묵묵하게 모든 고민과 걱정을 없애주는 청운에게 마음껏 기대는 사람도 오직 청아 한 명 뿐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정자 아래에 서 두 사람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모화는 서서히 피어오르는 달무리를 보며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수란 아씨, 무서운 능력과 아름다운 미색으로 미래를 이끌어나갈 저 두 사람에게 고난과 역경을 이길 힘을 주소서.














*














청아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갑작스레 전국을 뒤흔든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감소했다.





민심은 뒤숭숭하고 인정마저 각박해져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청아를 거들어주던 유일한 시녀인 모화마저 숨을 거두자





그녀는 외숙부인 수광의 집안에서 더더욱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모화가 앓아누운 순간부터 그녀의 시체가 다른 노비들의 시체와 함께 거적에 말려





산에 버려질 때까지 꼬박 일곱 번의 보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전염병을 예방하라는 외숙부의 명령에 따라 집안에만 갇혀있었던 청아는





청운을 만나기 위해 요산루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기근에 시달리던 신라의 국고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 꼬박 세 달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청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숙부인 수광에게 정식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비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십시오.”







수광은 청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인상을 찌푸리고 노발대발 화를 내었다.





청아는 그제야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화가 비밀리에 두 사람을 만나게 했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모화는 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희들을 내통시킨 것이냐? 이 집안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너희 두 사람은 피가 섞인 친남매가 아니니 정기적으로 만날 연유 또한 없다.





수란이 죽어 가는데도 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왕의 행동에 통탄을





금치 못했는데 어찌 너는 그 놈을 오라비라 철석같이 믿는단 말이냐! 놈은 천출(천한 출신)이다!





기생의 아이란 말이다, 섞일 수 없는 두 핏줄을 아우르는 불길한 사내란 말이다!”







청아는 그제야 청운과 자신의 관계를 완벽히 이해하는 동시에





한 집안에 두 쌍의 쌍생아를 들이고 싶지 않아 청운을 무참하게 내친 수광의 태도를 경멸했다.





수광은 예사롭지 않은 청아와 청운의 기운에 강파와 한파가 짓눌릴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작별인사만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래도 오라비로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작별인사도 없이 바로 끊어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놈은 죽었다. 전염병에 그 놈이 휩쓸려가지 않았다고 네 어찌 단정 짓는단 말이냐?”







태어나서부터 줄곧 곁에 있어주었던 모화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청아는 청운이 살아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가 죽는다면 그 누구보다 청아 본인이 가장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이 쌍생아로 살아온 자들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쌍생아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리 믿고 살아온 자들이었다.













열세 살의 여름, 청아는 보름이 되자마자 홀로 요산루에 올랐지만 청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청아는 그 날 가슴 속에 작게 품었던 희망을 내치고 독기 서린 행동으로 권력에 대한 탐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 즈음 발화지에는 목운이라 이름을 바꾼 한 동도(어린 화랑)소년이 등장했었더랬다.





예화가린파의 기둥이 되어줄 화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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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염병 환자가 나뒹구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나는 누이를 만나기 위해 매달 보름마다





요산루에 올랐습니다. 모화와 누이만은 살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였습니다. 하지만 열 번의 보름이 지나갈 때까지 모화와 누이는 보이지 않더군요.”







어쩌면 시간이 그리도 야속할까.





청아가 요산루에 오르던 때는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11번째의 보름이었다.





하지만 목운은 10번째 보름 이후로 요산루에 향하던 발길을 끊어낸 듯싶었다.





청아는 목운을 달래기 위해 떨리는 입술을 살며시 열었지만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외숙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친히 저를 맡겨둔 집안까지 찾아와 제 존재와 제 신분에 대해





똑똑히 알려주셨습니다. 모화가 죽고 누이가 저를 찾는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전해 들었으나





모든 진실을 알고 나자 누이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외숙부님은 제 기운이





어머니의 죽음에 한 몫 했다고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제 몸 속에 흐르는 비천하고 더러운





제 혈통이 대모(여성 후견인)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면 누이는 저 때문에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닙니까?”







“당치 않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청아의 맑은 눈에 걱정이 어리는 것을 보면서도 목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본인의 존재와 목숨까지 청아에게 온전히 바치리라 결심한 이상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숨기는 일이 없어야 했다.













“누이, 우리는 언제나 깊은 산 속의 정자 요산루에서 매달 보름에만 숨어서 만나야 했습니다.





당당하게 앞에 나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퍼지기 시작했을 때 외숙부님이 제게





다시는 누이를 만나지 말라, 그리 명하셨습니다. 저는 그 지시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피도 섞이지 않은 조카를 친분 있는 댁에 맡겨두고 키워주셨는데 차마 그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목운은 청아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청아의 마음속에서는 수광을 향한 증오가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광은 청아에게 청운이 죽었다 거짓을 말했으며 그와 동시에 청운을 찾아가 청아를 만나지 말라 명하기까지 한 것이다.





지켜주지도 못한 주제에 당연한 듯 청운을 향해 지시하는 그 태도가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자 도저히 그 집안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천덕꾸러기처럼





여겼던 그 집안의 어른이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저를 대접해주기가





힘에 겹고 벅찼던 게지요. 그 길로 집을 떠나…… 궁으로 가서 왕을 만났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아비를 말입니다.”







청아는 왕의 마복자였으나 그와 단둘이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큰 제사가 열릴 때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들 속에 섞여 멀리서 왕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왕은 청아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으나 수광이 그를 반대했다.





청아의 야심이 옥좌를 넘보는 반역을 저질러 집안 식구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요염하고 매력적인 청아의 기운이 왕을 사로잡는 것도, 전부 수광에게는 불길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신분을 하사해달라고 정식으로 부탁드렸습니다. 저는 인품이 높고





학식이 있는 귀족 집안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그 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화랑이 되고자 나섰습니다.





실현 가능성은 없는 일이었지만 막연하게 누이가 이곳에 발을 들일 것이라는 예감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누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청아는 목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흐르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청아는 청운이 죽었다고 생각한 이후로 그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청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세상이 두렵고 인생이 외로워져 잊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청아에게 권력에 대한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어주었지만





그녀가 강인해지는 일에 있어서는 어김없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청아가 청운을 잊으려 노력하는 와중에도 그는 목운이 되어 청아를 기다렸다.





목운이 청아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은 여기저기에 묻어있었다.







첫 번째로 그는 청아가 등장할 때까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 예화가린파를 택했다.





물론 목운은 기생인 어미 덕에 가무와 연주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나





마음속에 혈통에 대한 증오가 자리한 탓에 아무 저항과 억압 없이 예화가린파를 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로 그는 신선 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권력에 욕심 없는 모습을 내비쳤다.





그것은 목운의 천성이기도 했으나 청아를 위해 의도된 행동이기도 했다.





본인에게 행해지는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 결과 목운을 따르는 낭도는 그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결속이 단단한 예화가린파의 화랑들은 맹목적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목운이 반란을 일으키자고 제안해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자들이었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목운이 그런 제안을 할 때는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목운이 주군으로 삼는 자가 곧 그들의 주군이었다.





목운은 청아의 야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곧 그에 수긍하며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사람이었다.





청아는 본인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오라비를 세상 누구보다 아끼고 있었다.













“누이,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십시오.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모든 일을 제게 알려주십시오.”







따뜻한 목운의 눈길과 마주한 순간 청아는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청아는 마주앉아있는 목운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왕의 마복자라고는 하나 저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수십 명이 넘을 것입니다.





마복자 뿐만 아니라 그의 혈통을 타고난 왕자나 공주들도 십 수 명이니 총애를 받는 일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물론 그 분은 저를 잊지 않았다는 의미로 제게 풍월주의 임무를





내려주셨으나 머리 검은 짐승은 배신도 밥 먹듯 하는 법입니다, 오라버니.”







청아가 아무리 잔인하고 섬뜩한 말을 해도 목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지속되어오던 풍경이었다.







“저는 왕의 마복자이나 오라버니는 왕실의 핏줄을 타고난 그 분의 아들입니다.





저를 돕지 않으신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청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운은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주저나 의심 없이 계속 말을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사내와 혼인하여 다음 왕의 생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청아의 말을 듣고 있던 목운이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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