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몽채화]화랑세기 - 10

163일전 | 127읽음

듯 가냘픈 허리에 여러 겹 싸맨 의복이 하늘거려서 꼭 한 마리 새와 같은 모습이었다.





청아는 의자에 앉아있는 목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간 지고가 내실에서 멀어졌을 즈음에야 청아는 반대편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목운은 그런 청아의 모습을 빈틈없이 살피고는 피식 웃어보였다.







“풍월주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화랑들이 동요하는 법입니다. 언제나 위엄에 찬 표정을





유지하셔야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가 실수를 지적하는 일에 민감한 청아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시 공허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목운에게 고정시켰을 뿐이다.













“부제를 내보내셨다는 것은…… 이미 알아채셨다는 뜻이겠지요.”







웃음기가 사라진 목운의 말에 청아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총명하신 줄은 진작 알았으나 이렇게 빨리 깨달으시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아무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외숙부님은 당신이 죽었다고…… 죽었다고……”







목운은 다시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그 미소에는 씁쓸한 기운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청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오자 목운은 급히 입을 열었다.







“저 하나 때문에 흘리실 눈물이 아닙니다. 제가 없어도 당신은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제 마음을 다 터놓은 이가 당신뿐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시는 분이 어찌!”







청아는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무심한 시선과 자유로운 기운이 풍월주의 권위를 위협할 것 같아 마음의 들지 않았던 목운의 정체를





서서히 눈치 채게 된 것은 세 개 유파의 수장들과 그를 보좌하는 수장들을 따로 만난 이후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미묘하게 청아의 기억을 건드리던 목운만의 자태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찌 제게 당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오셨습니까……?”







청아를 약자로 만들 수 있는 사내였다.





하늘 아래 청아의 본모습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 자가 바로 목운이었다.







“괜히 앞에 나서는 바람에 당신에게 누가 될까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참고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진골귀족 수광의 조카, 자오미강파





강파와 한파의 사촌누님, 청아가 풍월주 원화가 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제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 이해 못하실 겁니다. 이렇게 빛나게 성장하시리라 예상했습니다.”







청아는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막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청아의 추악한 내면과 더러운 독기까지 간파한 목운은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목운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청아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고 본인의 인간성마저 포기했다.





처음에 목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까닭도 청아 기억 속의 사내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알게 된 사이인 만큼 열렬한 애인도 아니었고 연모하는 연인도 아니었으나





적어도 외숙부에게 눈치받고 핍박받는 삶을 살아온 청아에게 있어 목운은 부모이자 가장 소중한 벗이었다.













“이름을 바꾸신 겁니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화랑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목운은 미소에 남겨진 씁쓸함을 거두려 애쓰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높은 포부는 아직 여전하신지요? 당신을 돕기 위해 여담의 난에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떠나 예인으로서의 삶만을 추구하는 기생과도 같은 몸이나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 꿈마저 버리겠다고 맹세한 어린 날을 잊을 수는 없지요.”







“기생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청아는 목운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나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당신은 나의……







“쌍둥이 오라버니.”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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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란아, 내 너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수란은 겁먹은 눈동자를 들어 올려 왕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는 굳게 결심한 듯 임신한 수란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네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계집이든 사내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를 마복자(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로





삼을 것이니 너도 내 부탁을 꼭 들어주어야만 한다.”







마복자는 신라만의 독특한 풍습으로 이미 임신을 한 귀족 여성이 그보다 더 높은 신분의





남성과 잠자리를 함께 하여 장차 태어날 아이와 양부-양자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수란은 임신한 상태로 남편을 잃었기에 아이의 위치를 공고히 해줄 대부(남자 후견인)가 꼭 필요한 상태였다.







“아이의 생부가 살아있다면 그와 내가 함께 아이를 지킬 것이나 아이의 생부는 죽고 없지 않느냐.





네 아이는 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는 왕이다. 네 어미가 왕족이었으니 너는 나와 동침할 자격이 있다.





만약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는 네 아이를 친자식처럼 거둘 것이다.”







호탕하고 쾌활한 왕의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그 날의 서두는 길었다.





수란은 점점 그 부탁의 무게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라비인 수광의 조언에 따라 아이의 대부로 왕을 선택했고





그것은 축복과도 다름없었으나 수란의 마음 한 구석은 못내 불안하고 답답했다.













“내 한 달 전에 얻은 사내아이가 있다.”







왕은 어렵게 운을 떼었다. 수란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의 말을 경청했다.







“내 그 아이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







“왕족의 핏줄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 숫자가 많을수록 복된 것인데 왜 숨기려 하십니까.





왕비님께서는 그런 일로 화를 내실 만큼 아량이 좁은 분이 아닙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을 먹은 이유가 고작 이런 일 때문이었나 싶어





수란이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으나 왕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문란하고 방탕한 신라의 성 생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 시대의 일상이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 왕과 관계를 맺어도, 왕비와 신하가 내통을 해도 욕보일 일은 아니었다.







“아니, 문제가 될 것이다. 내 기생과 함께 하여 그 사내아이를 얻었다.”







달빛을 머금은 신라주를 한 잔 삼켜내며 왕이 씹어 내뱉듯 비밀을 꺼내놓았다.





당시 왕실의 복잡한 성생활이 용납된 이유는 성스럽고 고귀한 핏줄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왕과 기생의 아이는 신성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품은 미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수란은 은은한 달빛에 비친 왕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수란아, 그 사내아이를 네가 낳았다 해다오. 지금 네 뱃속에 품고 있는 아이가 쌍생아(쌍둥이)라고 거짓을 말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내가 후원할 아이들이니 네가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두 아이를 함께 키우며 네가 어미 역할을 하면 되지 않느냐.





왕의 피가 섞인 사내아이를 기루에서 키울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귀족인 네가 내 아이의 대모(여성 후견인)가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 될 일이 아니냐.”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찜찜한 기분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란은 뱃속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며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왕의 표정이 곧 부드럽게 풀어졌다.







“네가 아이를 낳는 날, 나는 기루에 남겨진 내 아들을 네가 있는 곳으로 옮겨둘 것이다.





너는 큰 기운을 품고 있는 쌍생아를 출산한 것이라고, 우리 그리 해두자.”







수란은 만삭이 다 된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촛불에 어른거리는 수란의 붉은 뺨이 너무나 탐스러워 보여서 왕은 수란의 어깨를 짓누르며 그녀를 침상 위로 눕혔다.













사흘 후, 수란은 특별히 왕이 하사해준 궁 안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수란이 낳은 아이들은 사내와 계집, 쌍생아로서 왕명에 의해 지은 그들의 이름은 청아와 청운이었다.





수란이 숨을 거둠으로써 모든 비밀을 아는 자는 세상에 단 세 사람,





아이들의 아비인 왕과, 기루에 있던 사내아이를 몰래 데려온 수란의 오라비 수광, 수란을 충성으로 모시던 그의 시녀 모화였다.














*














“빨래는 제게 맡겨 두시래도 왜 말을 안 들으십니까?”







모화는 청아의 손에 들린 걸레를 빼앗아들며 곱게 눈을 흘겼다.





열 살이 된 청아의 눈에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크면 뭇 사내들을 울릴 수 있을 정도로 고운 미색이 벌써부터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아직 어리지만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청아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움을 피워낼 것이다.







“손이 고우셔야 듬직한 남편을 얻고 예쁜 아이들을 낳으실 수 있습니다.”







“듬직한 사내를 얻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 뭐해? 내가 먼저 강해지면 될 일 아니야?”







“아기씨도 참, 계집은 강해질 수 없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모화의 말을 듣고 있던 청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독기서린 청아의 눈빛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온 특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약하고 여린 수란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아비와 어미는 약해서 죽은 거야. 하지만 나는 왕의 마복자니 절대 약해지지 않을 거야.





내가 크면 권력을 사로잡을 거야. 그러면 내가 가장 강해질 수 있지 않아? 나를 깔보는





외숙부님도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거야.”







모화는 청아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소름이 끼쳐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청아의 표정을 천진난만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보름이니 곧 아기씨의 쌍둥이 오라버님을 만날 수 있겠네요.”







세상 모든 것을 몰인정하게 내칠 수 있는 청아지만 그녀의 잔혹한 법칙에도 예외는 있었다.





청아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머니뻘인 모화의 뺨도 강하게 내리치는 아이였으나





쌍둥이 오라비인 청운 앞에서만은 순수하고 맑은 아이로 되돌아가곤 했다.





말없이 모든 일을 웃어넘겨주는 청운의 깊은 속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관대했다.





자연 풍경과도 위화감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청운은





고귀하고 신성한 기운을 품어내면서도 가끔 색기 흐르는 표정으로 춤을 추곤 했다.







“모화, 그런데 왜 청운과 나는 같이 살 수 없는 거야? 외숙부님은 왜 나만 거두신 거지?”







모화는 재빨리 입가에 두 번째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내보였다.





수광은 여동생인 수란의 아들, 딸인 청운과 청아를 동시에 거두었으나





1년 후에 부인에게서 쌍둥이 아들인 강파와 한파를 얻자마자 청운을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한 집안에 쌍생아가 둘이나 있으면 자신의 아들들이 기를 받지 못할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청운은 수광이 잘 아는 귀족 집안에 맡겨진 상태였으나 구두쇠인 그는 청운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청아나 청운은 다른 이들에게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모화는 두 아이들이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교육을 받으면 태산보다 높게 성장할 남매들이었다.





비록 청아와 청운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몸이지만 서로 각별한 정을 자랑했으며 기묘한 정도로 습득력이 빨랐다.





수광은 청운을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만





모화는 청아와 청운을 주기적으로 만나게 해줌으로써 그들의 우애를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숙부님께는 오라버니와 보름마다 만난다는 말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왜?”







“나랏일에 바쁘신데 괜히 신경 쓰게 해드릴 필요는 없지요.”







청아는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가 또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어떤 트집을 잡을까 두려운 나머지 모화는 재빨리 청아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청아와 청운은 그들이 사는 대가 댁의 중간 지점, 낡은 정자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모화는 그들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는 접선자였으며 그들을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해가 지기 전에 두 아이들을 만나게 하고 다시 돌아가야 수광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정자 요산루(樂山樓)는 자연의 풍광을 한 눈에 담고 있었다.





뒤로는 푸른 녹지와 가파른 산새가 보였고 앞으로는 뻥 뚫린 하늘과 대지가 펼쳐졌다.





모화가 청아를 데리고 요산루에 도착했을 때 청운은 이미 정자 위에 단정하게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해사한 그의 얼굴 위로 맑은 햇살이 알알이 부서져 내렸다.





모화는 청아와 청운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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