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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지] Diaphonic Symphonia 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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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우지]Diaphonic Symphonia 1.

    proligue.

    새벽 어느 순간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 비는 아침나절에 잠시 개는 듯했지만 오후에는 다시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고 내리는비는 바람과 함께 몰아쳐, 창유리엔 빗방울이 끊임없이 후두둑 들러붙었다 흘러내렸다. 요 얼마간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기온이 떨어져, 봄이 거의 다 지나간 이 무렵에도 추울 지경이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또 하루이틀 정도는 춥겠다.

    "오늘따라 유난하네……."

    안뜰로 이어진 거실의 유리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는 빗방울을 넋 놓고 바라보던 정태의는 문득 중얼거렸다. 며칠에 한 번씩 종종 비가 내리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거세다. 그러나 이것도 좋았다. 두꺼운 유리문의 바깥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이 안쪽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없이 유리문을 일렁이며 흐리는 물살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세상이 물에 잠긴 것 같다. 그리고 그 아래 깊은 곳에서, 조용하고 나른하게, 정태의는 누워 있었다. 소파 뒤쪽으로 풍성하게 드리운 커튼 아래, 사람들 눈에 좀체 띄지 않는 곳에.

    마침 화창했던 어제 빨아 보송하게 말려놓았던 커튼에서는 희미하게 풋풋한 내음이 풍겨나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바삭바삭 기분 좋은 내음이다. 정태의가 곧잘 뒹굴거리는 곳이었다. 비록 이제는 집안사람들 가운데 정태의가 그곳에 즐겨 눕는다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볕도 한가득 들어오고, 볕이 지나치다 싶으면 커튼을 당겨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는 딱 좋은 자리였다.

    처음에 리타에게 들켰을 때에는 그런 구석진 바닥에 누워 있지 말라고 두세 번 주의를 들었지만, 그 뒤로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 좁은 곳에서 몸을 구부리는 정태의의 모습을 한 번 목격하더니 나름대로 안쓰러웠는지, 혹은 한심했는지,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실소파 뒤 구석 자리는 정태의의 차지가 되었다. 만족스러웠다. 병아리처럼 폭신한 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유리문을 열어두고 미미한 바람을 맞으며 커튼 그늘에서 짧은 낮잠을 청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혹은 지금처럼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약간 서늘한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아련하게 들릴 듯 말 듯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았다.

    가끔 서재나 제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하고 있던 일레이가 나와 소파에 앉아서 신문 따위를 넘기며, 모른 척 소파 너머로 팔을 늘어뜨려 정태의를 꾹꾹 눌러대는 것만 아니면, 이 자리는 몹시 만족스러운 휴식 공간이었다.

    "좋구나……."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딱 좋을 정도로 안정된 날’이었다. 화창한 날처럼 마음이 둥실거리지도 않았고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불안스런 날도 아니다. 오늘따라 카일이 일찍 귀가한 터라 집에는 있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있어 빈자리가 없었다. 조급하게 해야 할 일도, 마음을 흐리는 사건이나 사고도 없었다.

    "좋구나, 딱 좋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렇게 팔자 좋은 더부살이가 또 있을까. 이제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더부살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이 집에서, 정태의는 태평하게 뒹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몇 년이나 이렇게 지냈다. 정태의는 몇년이나 이곳에서 이렇게 지내며 나날을 보냈다. 아주 가끔 맘먹고 휴가를 떠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그나마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경계는 이 부근 얼마간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정태의는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국제수배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 이 집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정작 악랄한 수배범은 오히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다니곤 했다. 뭔지는 몰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간혹 제법 멀리까지 나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정태의는 세상사의 불공평을 느끼지만, 그 역시 그렇게까지 마음 상하는 일은 아니다. 원래부터가 집안에서만 있는다 해서 그렇게 답답해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카일이 도와달라며 떠넘기는 일거리들은, 카일의 숙련된 보조자 제임스 같은 사람은 반나절만에 해치워버리는 일이라도 정태의는 그 몇 배나 되는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카일의 회사는 나날이 번창하는지 그 일감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게 뻔뻔한 더부살이는아니란 말야. 어쨌든 열심히 일을 돕고 있거든. 정태의는 어제도 밤늦게까지 처리해 오늘 아침에 제임스에게 건네어주었던 파일꾸러미를 떠올리며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때. 기나긴 인생, 한 몇 년쯤 감옥살이를 한들. 이렇게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감옥이 또 어디 있을까.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보고 싶을 때에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바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아주 드물긴 해도 그 중 누군가가 정태의를 찾아와줄 때도 있었다. ……2년 반 전에 와서 딱 하루 머물고 간 숙부라든가.

    정태의는 ‘그러고 보니 슬슬 그쪽도 휴가철일 텐데, 이번에는 이쪽으로 안 오려나’하고 생각하며 몸을 뒤척였다. 뒤척였다고 해봐야, 공간에서 몸을 약간 다른 방향으로 구겨넣었을 따름이었지만.

    "고양이도 아니고."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빗줄기가 물결무늬를 만드는 유리문 위에 그림자가하나 희미하게 비쳤다. 고개만 비스듬히 돌리자, 점심 무렵부터 방에 틀어박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그 악랄한 수배범,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일레이 리그로우가 거기 있었다.

    "보기만큼 그렇게 좁진 않아. 하긴 네가 눕기에는 좀……. 누울 수 있으면 누워 보든가."

    정태의는 자기 몸 하나 딱 붙일 그 공간에서 비척비척 몸을 뒤척여 자리를 좀 내어주는 시늉을 했다. 반 뼘도 채 안 될 그 구석진 자리로 무심한 시선이 말없이 내려왔다.

    "……,"

    "……."

    "그럼 어디 한 번 누워볼―――."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무심한 얼굴 그대로 진짜로 누우려고 한 걸음 내딛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재빨리 말하며 얼른 몸을 원위치로 돌렸다. 애초에 정태의보다 키도 몸둘레도 훌쩍 큰 그가 혼자서 눕기도 빡빡할 공간이었다. 농담을 할 셈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말을 꺼내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런 농담이 통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정태의가 잽싸게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깔고 누웠을 거다.

    절대로 비켜주지 않을 기세로 정태의가 드러눕자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딱히 정태의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지, 반시간쯤 전에 비닐로 포장되어 배달된 석간신문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흥미로운 소식은 있어?"

    "별로."

    짤막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정태의는 다시 몸을 굴려 바깥쪽을 향해 누웠다.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퍼붓고 있는 안뜰이 보였다. 바로 어제 페터가 곱게 다듬어둔 키 작은 나무들이 안쓰럽다. 고풍스런 철창으로 낮게 담장을 두른 안뜰에서는 바깥 거리가 내다보였다. 한적하고 널찍한 주택가에서도 골목 깊숙이 위치한 이 집은 그 위치 때문에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안뜰이 보일만한 곳까지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로 사람의 모습이라면, 두어 블록 떨어져 있는 저 앞의 조그만 교차로를 오가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날씨 때문인지 길을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날엔 누구든 따뜻한 집 안에서 차를 마시고 싶을 거다.

    "……."

    부침개라도 부쳐먹을까 싶지만 한두 시간만 더 있으면 저녁을 먹을 테니, 리타가 곱지 않게 쳐다볼 눈길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요전번에 공수해두었던 동동주도 얼마 전에 다 떨어진 참이다. 부침개랑 맥주는 나쁘진 않지만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정태의는 약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즈음이었다. 담장 너머, 거리를 빈틈없이 적시고 있는 빗속에서 어른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저만치 골목 끝의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그 인영은 점차 가까워졌다. 까만 우산을 바싹 낮추어 쓰고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는 훌쩍 키가 큰 남자였다. 세련되고 까만 양복에 까만 넥타이, 까만 구두. 아이보리색 드레스셔츠를 제외하면 온통 까만 복색인 그 남자는, 그럼에도 어둡거나 음산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렇듯 격렬한 폭우 속에서도 마치 산책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여유롭게 걸어오는 발걸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구나. 정태의는 이유 없이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손님이 오는 모양인데."

    혼잣말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소파 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못 들은 듯이 팔락, 신문을 넘기는 소리만 대신 돌아왔을 뿐이다. 그때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느릿하게 추가 흔들리며 낯익은 소리가 천천히 다섯 번 울렸다. 그 느린 소리의 우웅, 하는 여운까지 모두 그쳤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부엌 쪽에서 리타가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경비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그 손님은 곧 들어올 모양이었다. 손님이 왔으니 일어나는 편이 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계속 그 구석진 자리에 누운 채 미적거렸다.

    누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지금은 딱 기분이 좋은 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집의 손님은 다른 집의 손님과는 달랐다. 워낙 매일같이 손님이라는 외부인이 들이닥쳐 머무르다 가는 게 일상 생활이 된 집이라, 새삼스러운 마음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데 일어나야지. 정태의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막 배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얼굴 위로 신문이 날아왔다. 그새 석간을 다 읽었는지 일레이가 소파 뒤로 휙 집어던진 신문이 파스락거리며 얼굴을 덮었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종잇장이 훌훌 날려 머리에서 바닥까지 스르륵 미끄러지며 흩어졌다.

    "뭐하자는――――."

    "왔나?"

    그러나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위층의 서재에서 카일이 내려오는 기척이 났다. 삐걱, 삐걱, 희미하게 나무 계단이 삐걱거린다. 그가 계단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1층에 내려섰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여전히 소파 뒤의 바닥에 신문을 덮고서 주저앉은 채, 정태의는 물씬 풍기는 비내음과 함께 들어온 그 남자를 보았다.

    현관문 바깥쪽에 마련된 우산꽂이에 까만 우산을 꽂아넣고 들어온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일을 보았다. 뒤이어, 소파에 앉아 있는 일레이를. 담담했던 남자의 표정 위에 천천히 웃음기가 감돌았다. 눈매와 입가가 아주 약간 휘어진다. 그리고 그제야 정태의는 남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단단하다는 인상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차가운 돌처럼, 어디를 찔러도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갈 것 같다. 유일하게 조금 느슨해보이는 것이 그 웃음 진 얼굴이었지만 그 역시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카일의 친구나 그 외에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엔 저런 인간들이 가끔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녹록치 않겠다 싶은 인간. 저 남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거라면, 여태 보았던 다른 만만찮은 인간들에 비해 저 남자는 월등하게 인상이 좋았다. 장례식장에나 걸맞을 법한 저 시커먼 복색도, 다른 사람이 입으면 음산해 보이기 십상인데 저 남자에게는 세련되고 멀끔하게 맞아들었다. 저런 심상찮은 분위기로 저렇게 인상이 좋기도 쉽지 않은데, 거참. 정태의는 감탄스럽기까지 한 심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비록 지금 정태의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화분이며 수석 따위로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태의는 나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어서 오게. 오랜만이군. 빗길 오느라 힘들었겠어."

    "아닙니다. 비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서 일부러 저 앞 큰길가에 내려 왔는걸요.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두 분 모두?"

    "흠? 요 근래에는 비가 제법 자주 내렸던 것 같은데, 그쪽에는 비가 안 왔나?"

    카일은 남자를 거실로 안내하며, 일레이가 앉아 있는 카우치에서 직각으로 놓여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는 그 건너편에 앉았다. 위치상 더 이상은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된 정태의는 잠시 눈만 껌벅거리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두터운 소파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일레이와 등지고 앉아, 다시금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내다본다. 남자의 약간 느릿하고 독특한 말투에는 미묘하게 오스트리아쪽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그 외모에 썩잘 어울려 듣기 좋았다.

    "독일 동쪽구석이 그렇게 넓은지는 몰랐군. 이번 달 들어서 베를린에만 비가 네 차례나 크게 쏟아졌는데 드레스덴에서는 비를 구경도 못 했다……?"

    일레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하여간 고운 말 나오기 참 힘든 입이다. 정태의는 공연히 머리로 소파를 툭 두드렸다.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 말마따나, 베를린에서 2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동안 한 번도 비 구경을 못했다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니, 3월부터 리야드에 있었거든. 며칠 전에 막 돌아온 참이지."

    남자는 일레이와도 아는 사이인 듯 편한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정태의는 하품을 하다가 입을 턱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다. 리야드……. 그 뼈아픈 지명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바로 등 뒤에 앉은 남자가 국제수배 테러리스트로 승격되었던 사건이 발발한 곳이 아니었던가.

    "아하, 과연. 독일에 내린 비가 중동까지 가지는 않았을 테지."

    그러나 정작 테러범의 친형은 태연하게 말을 받으며 웃었고, 테러범 본인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리야드라. 그러고 보니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었지."

    카일이 새삼스러운 듯이 말하는 와중에 조그맣게 다기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약간 시간차를 두고 따뜻한 향기도 코끝을 스쳤다. 리타가 끓인 홍차다. 지금이라도 여기서 일어서서 리타에게 나도 한 잔 끓여달라고 하면……관두자. 시선에 찔려 죽기 전에.

    다들 동시에 차를 마시기라도 하는지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정태의는 아련한 홍차 향기만 한가득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때엔 카일에게 손님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일레이가 오늘은 어쩐 일로 그들과 차까지 함께 마시고 있다. 아니, 마시는지 아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면 카일의 손님이 아니라 일레이의 손님인 건가. 그러나 정태의의 의문이 결론을 맺기도 전에, 누구의 손님이든 그 미적지근한 침묵을 깨뜨리며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승계 문제는?"

    성가시니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남자는 그럼에도 어색한 빛은 보이지 않고 유유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정일까지 넉 달 조금 덜 남았어."

    "넉 달이라……. 이미 누가 될지는 결정이 난 것 같은데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뭐 그게 규정이니."

    약간 담담한 웃음이 섞인 이 목소리는 카일이다.

    "글쎄요. 끝까지 가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남자의 목소리도 한결같이 담담하다. 그 공손하고 웃음 띤 말투에서 정태의는 이 알 수 없는 대화의 한 가닥만은 잡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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