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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기란 3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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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란 3

    지은이: 비연

    출판사: 파란

    출판년도: 2004년 9월 14일

    차례

    29. 별리의 시간

    30. 냉궁, 잊혀진 여인들

    31. 바람

    32. 애

    33. 흥진전

    34. 매요와 홍사

    35. 금림

    36. 소소

    37. 의혹

    38. 몰락

    39. 각자의 정의

    40. 숲

    41. 종

    42. 락

    작가후기

    29. 별리의 시간

    귀청을 찢는 비명이었다. 서촉의 양민국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냉궁에서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을이 지나고 삭풍이 휘몰아칠 때쯤 들렸던 비명 소리는 아직까지도 서목리의 귀에 선했다. 사람이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몰랐다. 상처 입은 짐승이 막바지로 몰려서 내는 단말마의 비명. 마치 그의 일부분이 죽어 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는 비명이었다.

    가슴이 미어지던 비명 소리가 그치자 폭우가 쏟아졌다. 양민국의 죽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은밀히 들렀던 영춘궁 초시인 미초가 만족스런 얼굴로 떠난 냉궁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도록 스산한 기운만 감돌던 냉궁은 초여름이 훌쩍 지나도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오늘도 남몰래 냉궁을 살피고 있던 목리는 뜨거워진 여름 태양을 피해서 담벼락 그늘 사이로 들어갔다.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술주정뱅이 아비에 여동생 둘이 딸린 그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만일 그가 비 오는 날 뚱뚱한 남자의 시체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모두들 객사한 시체로 생각했을 때, 의문점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의문점을 형부의 관리들이 무시했다면? 목리는 목 뒤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어쨌든 기회를 잡았으니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더구나 황제와 거래하게 되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 없다.

    황제. 목리는 조심스레 황제라는 단어를 혀 안에서 굴렸다. 그러나 단어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조심! 목리는 그늘 속으로 더욱 깊숙이 숨었다. 냉궁을 잘 살피면 상을 줄 것이고,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부모 형제부터 죄다 죽이겠다고 말했던 차갑고 냉정한 남자는 황제다. 황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나 세상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목리는 확신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민과 후회 같은 감정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이해타산적 이성으로 뭉쳐져 있는 존재였다. 일말의 고민 없이 사람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남자는 냉궁을 바라볼 때만 감정을 드러냈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격정어린 눈으로 하염없이 냉궁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던 그 남자는 바로 황제다.

    생각에 잠겨 있던 목리 앞으로 영춘궁 초시인 미초가 지나갔다. 목리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평범하게 생긴 미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날의 처참했던 비명 소리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미초의 얼굴도 잊을 수 없었다. 미초가 냉궁을 찾는 이유는 한 가지. 또 다른 불길한 소식을 냉궁에 전하기 위해서다. 소름이 돋았다. 목리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마도 곧 있을 황제의 혼인에 대해서 말해 주러 가는 것이리라. 목리는 귀를 막았다. 두 번 다시 그 끔찍한 비명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며칠 동안 악몽을 꾸게 만들었던 지독한 비명 소리. 그러나 냉궁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의 혼인 축하를 하기 위한 불꽃놀이로 황도가 떠들썩할 때조차 냉궁은 죽은 자들의 궁인 양 조용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천하가 황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가운데 홍미룡의 셋째 아들인 홍서노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백성들은 황제의 결혼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미래와 관청에서 제공된 공짜 쌀과 음식들에 눈이 멀어서 관심 두지 않았지만, 홍미룡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황궁 밖에서도 세력이 탄탄한 효열이나 유친왕과 달리 자불이 기대고 있었던 것은 황궁장악력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버팀목은 혈육인 황제의 존재였다. 그 황제가 등을 돌리자 자불의 세력은 삽시간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당사자인 자불이 기력을 상실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기에 미룡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혈육을 버리는 황제의 냉정한 처사에 대해서 수군거렸지만 대세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날이 냉정해져만 가는 황제는 대귀족들을 억압하면서 이친왕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서노가 죽던 날은 매우 화창했다. 여름의 끝물이 묻어나는 공기 속에서 서노는 형리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하동 홍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서노는 황제의 놀이 친구로서 자불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부모의 지나친 애정과 어린 시절 황제의 친구였다는 특권 의식이 불러다 준 결과는 처참했다. 사사로이 아비의 권력을 휘두르고, 양가의 여식들을 빈번하게 납치해서 첩으로 삼은 죄와 암염상과 결탁해서 나라의 조세를 어지럽힌 죄가 가중되어서 사형당했으며, 시신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형장에서 열흘 이상 공개되었다.

    미룡이 겨우 찾은 서노의 시신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전, 자불이 아닌 효열의 생신에 맞춰서 과거제가 열린다는 황제의 성지가 발표되었다. 과거제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자불은 병상에 누웠고, 미룡은 소복과의 연계 사실에 대해서 수사를 받느라 반대 의사를 표시할 기회조차 없었다. 더구나 효열과 유친왕이 찬성 쪽으로 돌아서자, 대귀족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찬성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형부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자는 형부솔랑 서문곽도였다. 그리고 황제에게 병부를 내놓은 유친왕은 흥진전을 중심으로 황궁 안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곧이어 과거제에 의해서 등용된 하급 관리들이 조정의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렸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도 자리에 드러누운 자불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미룡이 형부의 소환으로 전전긍긍하는 동안에도 자불은 넋 나간 사람처럼 침상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미룡은 형부에 하옥되었다. 예부시랑의 직위를 이용해서 재물을 불렸다는 죄목을 중심으로 군주를 업신여기며 전횡을 한 점, 패거리를 지어 정사를 함부로 처리한 점, 암염상과 결탁하여 나라의 조세를 어지럽힌 점 등을 이유로 멀리 북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룡의 막대한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

    사람들은 미룡의 재산이 몰수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몰락을 믿지 못했다. 미룡 역시 형부의 관리가 성지를 발표하는 순간에도 연방 문 쪽을 흘깃거렸다. 금방이라도 자불이 성초를 이끌고 기세등등한 고함을 지르면서 등장할 것 같았으나, 나타난 것은 스산한 초겨울 바람뿐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던 겨울 어느 날,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내가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든 정보를 뱉어 내고 가치가 없어진 백소복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옥화유는 이성을 잃고 발악하는 백소복의 마지막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뻘건 핏물이 튄 자리 위로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죄지은 자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출 무렵 유친왕부에 큰 화재가 났다. 다행히 유친왕과 후계자인 어린 아들은 흥진전에서 황후를 만나고 있던 중이라 화를 피했으나, 다른 가족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유친왕부의 비통한 참사에 황제는 왕부를 새로 짓는 동안 유친왕이 황궁에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그리하여 슬픔에 잠긴 유친왕과 그의 어린 아들은 흥진전에서 생활했다.

    격동의 겨울이 지나고 잠잠해진 황궁은 다음 해 8월에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 때문에 잠시 시끄러워졌다. 돌풍이 휩쓸고 간 영춘궁의 정원에는 붉고 노란 꽃잎들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알록달록한 꽃잎들이 초록 잔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영춘궁을 형형색색 수놓았다. 돌풍에 부러진 나무들은 치우게 했지만, 정원을 가득 덮은 꽃잎들은 그대로 두라고 명한 효열은 며칠간의 비바람으로 기세가 꺾인 태양을 마주한 채 정원에서 차를 마셨다. 간만에 영춘궁을 찾은 능봉은 시큰둥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태후 마마, 휘에게 시랑 자리를 하나 내어 주셔요. 휘도 이름만 멋진 왕이 아니라 제대로 한자리를 차지해야지요.”

    “이름만 멋진 왕 노릇도 꽤 편하단다. 얘, 능봉아. 저 꽃들을 좀 보렴. 저렇게 떨어져 있으니 목이 뎅겅뎅겅 잘린 여인들 같지 않니? 그래, 저 장미꽃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서귀인을 닮았구나. 홍등을 걸었다면서 어찌나 잘난 척하던지. 그런데 2년 후에 퇴수사로 쫓겨났지. 그때는 참으로 유쾌했었다. 그날 내가 하도 웃어서 아랫것들도 많이 놀랐단다. 그래, 저기 저 부용을 보니 황귀빈이 떠오르는군. 참 멍청한 년이었지. 절로 년이라는 욕이 나오는 인간이었어. 감히 내 앞에서 권력 다툼을 하려 했었단다. 부용 같은 자태가 아름답다는 칭찬을 한번 듣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 대다가 결국 다른 후궁들과의 다툼에서 져서 목을 매고 자살했지. 그때 태종이 뭐라고 한 줄 아니? 그런 후궁이 있었냐고 물었단다. 멍청한 년. 흥! 부용 같은 자태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게 자기 혼자인 줄 알아?”

    효열은 떨어진 꽃잎들에 과거 태종의 후궁들을 대입하면서 즐겼지만 능봉은 답답했다. 양귀인이 쫓겨나고 현인이 입궁했는데도 효열은 느긋하기만 했다. 심지어 휘의 혼인 문제도 내켜 하지 않는 효열을 볼 때마다 속이 터졌다. 그녀는 밤마다 사내들에게 몸을 팔면서 대사를 도모하는데, 효열은 매일같이 꽃구경이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휘에게 정당한 자리를 되돌려 줄 수 있겠는가.

    “태후 마마, 휘의 혼인 문제를 고려해 주세요. 형부시랑의 딸은 어떻습니까? 나이가 좀 많은 것이 걸리지만 왕부를 다스리려면 어느 정도 연륜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이귀비도 있었지. 그년은 존재감도 없는 것이 잘도 귀비까지 올라갔었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년이었는데, 어느 날 유화궁의 유귀빈을 칼로 찔러서 죽였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세상이 미웠다고 하더구나. 아니, 세상이 미우면 태종을 찔러야지 왜 죄 없는 유귀빈을 죽여? 아니, 아니다. 유귀빈이 죄가 좀 있긴 했었지. 유귀빈은 자신이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가 텅 빈 다른 비빈들이 몸으로 농밀한 애교를 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단다. 유귀빈은 자기 혼자만이 홀로 고고하고 우아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선녀라고 믿었지. 언젠가 태종이 그녀의 숨겨진 매력을 알아주리라 믿는 미친 여자였어. 유치한 시나 쓰고 어설픈 그림이나 그리는 주제에 스스로를 재녀라고 생각했었지. 걔가 쓴 시가 얼마나 유치했는지, 아무리 기분 나빠도 유귀빈의 시만 읽으면 열흘 내내 웃을 수 있었다니까. 소위 예술 한다는 년들은 주제를 몰라.”

    “태후 마마, 휘가 잘되어야 우리 가문이 크게 번창할 것이 아닙니까.”

    “너도 기분이 나쁘면 유귀빈의 시를 읽어 보렴. 아니, 아니..., 그냥 네가 쓰고 웃어도 되겠구나.”

    “태후 마마, 제발 휘의 문제를 신경 써 주세요! 형부시랑과 공부시랑의 딸 중에서 누가 좋을지 알아봐 주셔야죠.”

    “능봉아 소리를 지르면 일찍 늙는단다. 그러니 조용조용히 이야기 하려무나. 그런데 내가 왜 휘에게 신경 써야 하지? 내가 휘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니?”

    “태후 마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넓디넓은 진에서 마마의 핏줄이라고는 휘와 저, 달랑 둘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어찌 이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핏줄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고 너희들에게는 내 피보다 다른 인간들의 피가 더 많이 들어갔지. 게다가 휘는 휘종의 아들이니 자불의 손자이기도 하지. 그런데도 내가 휘를 위해서 힘을 쓰리?”

    “마마!”

    “그만두어라, 능봉. 너의 그 무슨 당이더라? 그래, 자국당이 나날이 커져 가고 있는데, 굳이 내가 거들 이유가 없잖니. 매번 찾아와서 ‘마마, 이거 해 주세요. 마마, 저거 해 주세요.’ 시끄럽고 짜증난다는 말을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아듣겠니. 사내놈들이 네 치마폭에서 노니까 모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서라.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라니요. 무슨 주제 말입니까? 원래 모두 제 것이었습니다. 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빼앗아 간 겁니다. 아버님은 좋은 분이셨고....”

    “내 아들은 무능한 황제였어. 그러니 독에 당했지.”

    “네, 아버님은 무능했고 저는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태후 마마를 찾아오지요. 하지만 태후 마마도 저희가 아니라면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저희들만이 태후 마마의 핏줄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좋은 분이셨다고요. 그런 분을..., 독으로 살해한 자불에게 천벌을 내려야 합니다!”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인 능봉은 분함과 억울함에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러나 효열은 능봉의 팽팽하고 윤기 나는 뺨에 집중했다. 살짝 자신의 뺨을 만진 효열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능봉의 젊음을 훑어보던 효열의 입술이 움직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유쾌하게 움직이는 효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잔혹한 진실이었다.

    “그래, 내 아들은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멋진 남자도 아니었고 훌륭한 황제도 아니었지. 그리고 얘야, 핏줄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죽었는지 안다면 내가 그 말을 이리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게다. 어쨌든 잘해 보거라. 그런데 반역을 꿈꾸기 전에 휘를 설득하는 일이 먼저 아니니? 네가 실수로 아비도 알 수 없는 사생아를 품기 전에 말이다. 또다시 사생아를 왕으로 만들기는 힘들 테니까.”

    “태후 마마!”

    더 이상 참지 못한 능봉이 큰 소리를 내었으나 효열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요즘 너는 점점 조귀빈 같아지는구나. 조귀빈도 홀로 독야청청, 오만방자한 꿈을 꾸고 있지. 감히 태후를 넘보다니. 귀빈까지 올라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거늘. 하긴 여태까지 쉽게 올라왔으니 또다시 쉽게 올라갈 수 있을 줄 알고 있겠지. 하지만 황궁은 괴물들이 웅크리고 있는 곳. 더구나 황제가 황후와의 합방 전에는 어떤 여인과도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으니.... 현인을 제칠 가능성은 아예 없는 셈이구나.”

    “그건 윤이 양귀인을 잊지 못해서 내놓은 협상책일 뿐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남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인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18세가 지날 때까지 합방하지 않겠다니요! 그야말로 후사를 둬야 하는 황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지요. 유친왕도 그렇지요. 어떻게 자기 딸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그런 불합리하고 모욕적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수 있답니까!”

    “유친왕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설마 현인이 윤의 아이를 낳기를 바라니?”

    “마마!”

    “나는 요즘 조귀빈의 실망스런 한숨 소리를 들으면 웃음부터 나더구나.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비빈들과 만나는 자리는 늘 현인이 아프다고 불참하니 혼자서 나갈 수도 없는 노릇. 참으로 고소하고 유쾌하구나. 매일같이 짜증만 내고 있다지? 한때 천한 신분이었으니 아랫것들 말이 순식간에 퍼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도 입단속을 할 줄 몰라. 하긴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은 금방 잊기 마련이지.”

    “마마, 천박한 조귀빈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마시고....”

    “천박한 조귀빈? 너도 조귀빈에게서 꽤 많은 돈을 받아쓰고 있다던데?”

    효열의 지적에 능봉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두들 조귀빈이 천박하고 야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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