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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즌]Drink me all 외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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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는 사람

    탁. 탁. 양손에 쥔 서류의 단면을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치며 한데 모은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사탕들도 손바닥으로 쓸어 모아 작은 바구니 안에 담았다. 탁상 위 전자시계가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다. 꼬박 10시간 남짓 묶여 있었던 것 같다. 인근 지역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급작스레 번지기 시작한 독감 때문에 아침나절부터 쉴 새 없이 환자들이 몰려들어 오늘 하루는 점심을 먹을 겨를도 없이 바빴다. 그럼에도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도운의 손길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거냐? 이 별종 자식아."

    종일 의사만 봐도 기겁 해대는 어린 환자들을 상대하고 나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베테랑 의사라도 녹다운이 되기 마련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기운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입도 뻥긋하기 싫어진다는 거다. 그러한 까닭에 의식을 잃는 것만은 가까스로 면하고 있는 자신과는 극히 대비되도록,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뒷정리를 하는 도운에게 기어이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갔다. 물론 아무리 핀잔하듯 말해도 고개까지 가볍게 흔들거리며 허밍으로 콧노래를 부르던 이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씩 웃어버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그 아무렇지 않게 짓던 미소로 사람 여럿 쓰러뜨렸던 사람이다, 도운은.

    소파에 널브러져 한숨처럼 길게 숨만 내뱉어대는 대학 선배-재민에게 입술을 찍 찢어 웃어 보이던 도운은 책상 위를 마저 정리했다. 그리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서 입고 있던 흰 가운을 홱 벗었다. 곧 옷걸이를 향해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진 흰 가운은 여지없이 옷걸이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며 도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재민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바닥에 떨어진 흰 가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겉모습만 말끔한 도운은 바닥에 떨어진 흰 가운을 다시 집어 옷걸이에 거는 수고는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진료실 문 바로 옆에 있는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지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그에게서는 콧노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평소에도 조금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상태에 있는 그였지만, 근래 들어서 부쩍 더 붕 떠 있는 것 같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붙어 있던 재민이 슬쩍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진료실 문을 열고 훠이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상태의 도운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한잔하러 갈래?"

    "배 나온 아저씨랑 한잔할 시간은 없는데."

    떠보듯 던진 질문에 도운이 평소처럼 장난하듯 가볍게 대꾸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여전히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다. 십중팔구다. 앞길이 창창한 미혼의 남성을 들뜨게 할 만한 것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소파 등받이에 배를 바짝 밀착시킨 채로 몸을 돌리고 앉은 재민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여자 생겼냐?"

    "음…… 비슷해요."

    "아니면 남자라거나."

    "뭐, 그것도 비슷하네."

    "뭐라는 거야, 대체."

    재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도운은 상대의 그런 반응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을 뿐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여러모로 알쏭달쏭한 인물이었다. 단정하고 말끔한 외모와 단아한 목소리, 늘 거리낄 것 없이 자연스레 짓는 미소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벽을 여실히 무너뜨리면서도 막상 제 벽은 허물지 않는 면이 특히 그랬다. 늘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들끓었지만 막상 그에대해 A부터 Z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은 그탓이다. 그와 10년을 부대끼며 지내온 재민으로서도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극히 적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누구나가 알고 있는 그의 이름과 출신학교, 표면에 들어나 있는 연락처와 거주지 정도가 다니까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가지 정도는 더 알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하나, 도운이 돌보고 있다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점. 때때로 도운이 도움을 요청해와 그에게 앰뷸런스를 보낼 때마다 그 앰뷸런스에 실려 들어오는 남자들의 범상치 않은 상처들만 보더라도 그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도운의 취향은 어쩐지 좀 유별나다는 것.

    "어떤 사람인데?"

    재민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물론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분명히 어떤 여자냐, 어떤 놈이냐 하는 질문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은 이미 초월했다는 거다. 도운은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꾸해줬다. 막상 물어보면 숨기려고 들지는 않는 타입이다, 그는.

    "곰이요."

    "……남자로군."

    "성차별적 발언이에요, 그건. 여자가 곰 같으면 안 되는 건가?"

    "어차피 남자잖아, 네놈 상대는."

    도운을 전에 없이 들뜨게 한 대상이 남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낸 재민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앉았다. 그런 재민을 골려줄 생각이었던 것인지, 도운은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는 나가려다 말고 잠시 멈추어 서서 괴상한 힌트 하나를 툭 던졌다.

    "그럼 전 이만 우렁이 각시 만나러 갑니다."

    탁. 옅은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던진 도운은 이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따분하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긁적이고 있던 재민은 잠시 멍하니 고개를 들어 닫힌 문 쪽을 바라봤다. 너무 피곤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곰 같은 사람인데 우렁이 각시라니 말이다. 아주 잠시간이긴 했지만 머릿속에 썩 유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홱홱 가로 젓는다. 밥상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얌전히 도운의 귀가를 기다리는 곰이라니. 정말 악질적인 상상이 아닌가. 분명히 피곤해서 도운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리라.

    도운은 숨 가쁘게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평소대로 느긋한 그라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엘리베이터의 운행이 중단되지 않는 한 구태여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오랜만에 층계를 뛰어오르자 심장이 뻑뻑하게 아려왔지만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커다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곧 만나게 될 누군가를 향한 앞선 반가움에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벌떡거리며 뛰어댔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던 층계를 끝내 모두 올라와서 집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또다시 도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가 집 안쪽에서 넘실대며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도운은 고르지 못한 숨을 한 번 크게 내뱉고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현관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구두 한 켤레가 보인다. 도운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고인다. 도운은 그 가지런히 놓인 구두 옆에 나란히 제 구두를 벗어두고는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도운이 들어오는 걸 알았는지 거실 소파 아래에서 놀고 있던 토끼가 타밧타밧 도운에게 뛰어온다. 도운은 녀석을 제 손바닥으로 받치듯 들어 올려 녀석의 보들보들한 이마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토돌아, 집 잘 보고 있었어?"

    토끼는 기분이 좋은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자코 도운의 손길을 느꼈다. 도운은 가방을 소파 어딘가에 홱 던지듯 내려놓고서 주변을 죽 둘러봤다. 역시. 이곳저곳에 굴러다닐 토끼의 콩알 같은 배설물도 보이지 않고, 아침나절에 아무렇게나 뒤집어놓고 나갔던 집도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도운이 구김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문손잡이에 걸린 자신의 흰 가운을 발견하곤 소리 없이 웃고 있을 무렵, 그의 등 뒤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임을 알 수 있게끔 묵직한 목소리로 인사말도 건네 온다.

    "지금 오십니까?"

    미남의 인사에 도운이 생글생글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미남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 정도까지 걷어붙여져 있어서 팔의 굵은 힘줄이나 근육이 한눈에 보였다. 손에는 국자 하나가 야무지게 들려 있다.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다. 미남은 자신을 지극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도운을 말없이 마주 보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식사 안 하셨으면……."

    "응, 나 지금 뭐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고파요. 밥 줘요."

    도운이 다소 묘한 뉘앙스로 대답한다. 미남이 서둘러 도운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치듯 부엌으로 들어간 것은 여전히 자신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운의 말이 제법 도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운은 그런 미남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토끼를 소파 위에 내려주고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겨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미남이 오지 않는 한 거의 쓸 일이 없는 식탁에 가서 얌전히 앉는다. 미남은 금세 저녁을 차려냈다. 작은 그릇에 한 번 먹을 만큼의 반찬들만 적당량 덜어내고, 정갈하게 수저도 놓아준다.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아래에 받침을 괴어 내놓고는 빈 잔에 친히 물까지 따라주었다. 그리곤 저만치 물러나 있는 것이다. 무슨 웨이터가 손님의 수발이라도 드는 것처럼. 숟가락 가득 된장찌개를 푸던 도운이 멀찍이 물러서 있는 미남에게 제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미남 씨도 앉아요."

    "……아니요, 전 됐습니다."

    그러나 미남은 2인용 식탁을 힐긋 한 번 보고는 바로 거절의 의사를 표시할 뿐이다. 만약 도운의 말대로 그 맞은편에 앉기라도 한다면 어김없이 두 사람의 무릎이 서로 엉기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다가 또 휩쓸려버릴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도운은 한사코 앉지 않겠다는 미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차게 얼어 있던 속이 뜨끈한 국물에 푸근하게 녹아드는 것 같다. 미남은 자신이 무엇을 내놓아도 반찬 투정하는 법 없이 맛있게도 그릇을 비워내곤 하는 도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운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맛있다는 말을 대신해 손을 들어 엄지를 턱 추어올려 보였다. 배고 고파서인지, 아니면 음식이 정말 맛있어서인지 있는 대로 음식을 쑤셔 넣어 볼록해진 그의 볼이 미어터질 것만 같다. 미남은 다시 도운에게 다가와 빈 잔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요새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응. 아무래도 시기상으로 바쁠 수밖에 없어요. 겨울이니까. 병원에 환자들이 많이 오는지 선배가 날마다 전화해서 좀 도와달라잖아요. 수혁이 새끼 문제로 매번 신세 지는 것도 있고, 주완 씨 공부 거들어주는 거 아니면 딱히 하는 일도 없고 해서 시간 날 때마다 나가서 도와주고 있어요. 남아도는 게 시간뿐인 잉여 인간이라. 누가 데이트 신청을 통 안 해서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열심히 밥을 입속으로 우겨넣으며 말하던 도운은 말미에 가선 슬쩍 미남을 올려다봤다. 통 데이트신청을 안 한다는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그에게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미남은 언제나 그랬듯 쉽게 넘어오는 법 없이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져 화제를 전환했다.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드십니까?"

    "미남 씨가 이렇게 챙겨주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막 굶고 다니진 않아."

    도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다가도 걱정할 거 없다며 손까지 휘휘 내저어 보인다. 그리곤 다시 열심히 식사를 해내간다. 걱정을 하지 말란다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어디에선가 의사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건강관리를 못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고, 도운의 집에 올 때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집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게 다반사니까 말이다.

    예전부터 늘 생각했지만 도운은 정말 화분 같은 사람이다. 스스로는 늘 티 없이 말끔하게 하고 다니지만 집은 매번 엉망이다. 집안일이라곤 영 소질이 없는지, 설거지라도 하겠답시고 팔을 걷어붙이면 그날로 접시 서너 개가 깨져나간다. 그렇게 성실한 타입도 아니어서 청소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하려 들지 않아서 토끼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토끼의 동글동글한 배설물이 굴러다니기 일쑤다. 끼니를 꼬박꼬박 챙기기는커녕 배가 고프면 영양성분 고려하지 않고 인스턴트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는다. 또 피곤함에 지칠 때까지 깨어있다가 겨우 잠들곤 하는지라 몸 상태는 좋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즉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미남이 특별한 수혁의 지시 없이도 도운의 집에 드나들게 된 계기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말끔한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처참한 상태인 집 내부의 모습을 보곤 저절로 팔을 걷어붙이게 됐다는 거다. 계속해서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주기적으로 도운의 집에 찾아오게됐다. 언젠가부터 그의 집 열쇠 하나는 당연한 것처럼 차키와 함께 키홀더에 걸려 있었다. 열쇠는 언젠가 도운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버리는 바람에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 얻게 되었다. 계속 돌려줘야지 생각했으면서도 여태 돌려주질 않았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게 된 거다.

    "잘 먹었어요."

    도운이 금세 비워낸 밥그릇을 들어서 보여주며 말했다. 미남은 도운이 거의 남김없이 비워낸 찬그릇들을 수거해서 싱크대로 가지고 갔다. 식사를 마치고도 식탁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도운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하는 미남의 뒤태를 빤히 보며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말했다.

    "미남 씨 요리솜씨는 갈수록 일취월장이네? 같이 살면 좋겠다."

    미남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마치 도운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그릇을 박박 닦아나갈 뿐이다. 도운은 제 말을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무뚝뚝한 미남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전히 미남은 달라진 게 없다. 좀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발을 빼버리는 거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괴롭혀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도 말이다. 이미 서로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다 아는 사이가 됐다. 그것도 벌써 꽤 오래전의 일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마음이 영 없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꾸 도망가려고 하기에 그에게 누누이 경고했던 대로 넘어뜨려 버렸다. 그리고 마음껏 잡아먹었다. 도운도 엄연한 남자이니 군침이 도는 상대가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참아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했었던 것도 같다. 아무리 도끼로 내리찍어도 굳건히 버티고 서서 흔들릴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 나무 같은 남자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다. 뜨겁게 품은 그의 체온이 몸속에서 다 녹아 사라지기도 전에 그가 도망치듯 가버린다고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남은 도망치지 않았다. 물론 더 나아진 것은 없다. 욕망에 처참히 무너져 도운을 책임지느니 마느니 떠들어놓고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뭐가 그렇게 주저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 그릇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설거지를 하던 미남이 갑자기 어깨를 움찔거리며 손을 멈췄다. 그는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자꾸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지만 허리에 무언가가 단단히 감긴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은 도운의 두 팔이었다. 도운은 제멋대로 미남의 허리를 얼싸안고는 그 드넓은 등에 제 고개를 툭 가져다 대며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같이 씻을래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나는 농담 아닌데." "……놓아주십시오. 설거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손 붙잡은 것도 아니잖아요. 해요, 설거지." "백 선생님."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놓아달라는 미남의 요구에도 도운은 제 볼을 미남의 등에 폭 가져다대며 고집을 부렸다. 미남에게서 제법 묵직한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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