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이]엉겅퀴 - 9

163일전 | 238읽음

물건 몇 개만 제자리에 넣고 나니 한 시간 만에 정리는 끝이 났다. 전에 살던 선생이 미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대개의 살림살이들을 두고 가서 새로 살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청결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지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가 대단했고 특히 싱크대 쪽은 심란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먼지를 걷어내고 반짝반짝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쾌한 냄새가 날 정도로 청소하는 데만 물경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욕실이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냄새와 바닥에 가득한 물때와 곰팡이를 보는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끙’ 하는 신음이 올라왔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필요한 세제를 전부 빌려주었기에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청소할 수 있었다.



냉동실에 넣어 둔 생수를 꺼내 마시며 재이는 청소를 끝낸 방을 둘러보았다. 먼지도 싹 제거되었고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쾌적한 모습이 매우 흡족했다. 재이는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전부 벗어 세탁기 속에 던져 넣고 창문을 닫은 후 롤 스크린을 내리고 에어컨을 켰다. 그리고 깨끗해진 욕실로 들어가 첫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이 닿는 순간 피부에서는 오소소 잔 소름이 돋았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베르가모트 향이 나는 바디 샴푸로 거품을 잔뜩 내 몸에 묻은 더러움을 닦아내고 머리까지 깨끗하게 감은 후 수건으로 허리 아래만 두른 채 방으로 나왔다.



"아, 좋다."



깨끗한 시트로 감싼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던졌다. 보송보송한 시트의 바삭한 냄새가 개운했다. 재이는 몸을 스치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즐기며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환하지만 강렬하지 않고 부드러운 햇빛, 새하얀 롤 스크린 뒤로 수줍게 몸을 숨긴 격자의 은은한 그림자, 모든 게 평화스러웠고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줬다.



"일 년, 일 년이겠구나."



단지 안정적으로 몸을 기탁할 숙소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기엔 스스로도 야릇할 만큼 편안하고 아늑했다. 고등학교 때 두 번의 여름 방학을 바르셀로나에서, 그리고 대학 때는 일 년 간 마르세유에서 보낸 적이 있었지만, 이곳처럼 완전히 마음이 놓이며 익숙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복잡하고 불친절하다고 지옥이니 뭐니 투덜댔지만 DNA 속에 기억된 고향이란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당연히 존재하는 느낌.



"그래서 다들 돌아가는 것일까……, nest, 음, 보……금자리, 그래, 보금자리."



정확한 단어를 기억해낸 스스로가 대견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사에 청소에 혼신을 다했더니 피곤함이 서서히 어깨를 내리 눌렀다. 마침내 머무를 둥지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긴장도 탁 풀렸고. 재이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리다 베개 옆을 더듬어 리모컨으로 에어컨 바람을 수면으로 조정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목을 굴려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때는 방 안에 어스름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어디선가 아련한 음악소리가 흘러들어와 재이는 눈을 껌뻑이며 목덜미를 긁었다.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베개를 끌어안고 다시 누웠다. 잠시 멈췄던 음악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재이는 그것이 자신의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으……."



광고전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핸드폰을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들 알고 이따금 한 번씩 광고전화가 왔다. 한국은 개인정보보호 정책이 너무 허술했다. 하지만 스쿨에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재이는 성가신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액정 위에 ‘박지업’과 함께 열한 자리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재이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서 알게 된 두 사람 중 유일하게 연락이 가능한 사람의 전화인데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색하는 마음 안에 숨겨진 진실은 하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 조에게서는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지업에게 번호를 물어봤을까, 물어봤으면 전화하지 않았을까, 아직까지 아무 소식 없는 거 보면 물어보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니 물어봐서 알고 있다 해도 바로 전화할 필요는 없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 오늘요. 오늘 이사했어요. 예, 스쿨 근처에요. 지업 씨는 오늘 어땠어요?"



어쩐지 좀 허전하다 했더니 허리 아래에 둘렀던 수건이 자는 동안 풀어져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다. 돌돌 말린 수건이 침대 구석에 어렴풋하게 보였다. 전화이니 상대는 볼 수 없겠지만 민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이는 옷장을 열어 팬티와 반바지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 신사동이요? 헤에, 오늘 나 신사동으로 무브했는데. 그럼 가까이 있는 거네요?"



전화를 받으며 한 손으로 옷을 입으려니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여 한 다리씩 꿰어 집어넣고 한쪽씩 낑낑대며 올려 간신히 옷을 입었다. 지퍼까지는 올렸는데 단추가 여간 잠가지지 않아 포기하고 물이나 마시려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어? 맞아요. 진짜요? 지금 신사역이에요? 으아아악!"



재이는 싱크대 뒤쪽 벽에 붙은 커다랗고 까만 그림자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일이냐고 놀라 묻는 지업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재이는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두들기듯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더 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Coc……, cock……, cockroach!"



한 마리가 아니었다. 불을 키자마자 커다란 세 마리의 바퀴벌레가 찬장 뒤와 싱크대 뒤쪽으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재이는 곤충류라면 질색을 했다. 그 중 바퀴벌레는 진저리를 칠 만큼 제일 싫어하는 종류였다.



"으아아악, oh my gosh! 어떡해, 어떡해!"



진정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았던 평화롭고 고요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공포와 혐오로 진창이 되어 온몸에는 우둘투둘한 소름까지 돋았다. 진정 아늑한 둥지라면 애벌레라든가 바퀴벌레쯤은 있는 법인데 재이는 그것을 몰랐다.



"흑, 웃지 말아요. I hate it! Hate it! 정말 싫단 말이에요. 정말 싫어. 싫다구요. 나 여기서 못 살아!"



눈물이 맺힐 정도로 싫어 죽겠는데 지업은 뭐가 재밌는 건지 폭소를 터뜨렸다. 짐을 싸서 나가고 싶은데, 혹시 옷장 안에도 바퀴벌레가 있을까 두려워서 옷장 문조차 열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입은 팬티 위로도 그 놈들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온몸이 간지러워져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요? 진짜죠? 흐윽, 그러니까 여기 주소가…… 45-1 번지요, 으윽, 빨리 와야 해요. 신사역에서 △ 출구로 나와서요, 100미터쯤 오면 오른쪽에 패밀리 마트가 있거든요. 그 골목으로 들어와서 오다보면 세탁소가 하나 있어요. 거기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오시면 세 번째 건물, 201호예요. 아…… 안 돼요! 전화 끊지 말아요!"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애절한 외침에도 지업은 금방 도착할 거라고 진득이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재이는 침대에 두 발을 올리고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 온몸을 웅크렸다. 얼어붙어서 가만히 숨조차 죽이고 불안하게 지업을 기다리는데 너무 조용하면 녀석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머리칼이 쭈뼛 솟아오르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텔레비전이라도 틀었으면 좋겠는데 청소한다고 콘센트를 빼놓은 상태였다. 시꺼먼 브라운관 뒤쪽에 손을 뻗었다가 바퀴벌레라도 튀어나온다면 심장마비에 쓰러져 기절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기절한 적도 있었고.



"아으……, 엄마, 아빠……."



창백해져서 어쩔 줄 모르며 모아놓은 다리만 덜덜 떨던 재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지업을 원망했다. 전화도 끊어버리고, 금방 온다더니, 십오 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재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Like a virgin, hey, touched for the very first time, like a virgin. when your heart ……."



왜 이 노래가 생각난 것인지 재이도 알지 못했다. 일곱 살 산호세의 집에서 낮잠을 즐기다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바퀴벌레 편대비행 안면공격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기절했던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었다는 사실을 재이가 의식하고 있을 리 없었다. 무의식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흐느끼는 것인지 중얼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라이크 어 버진’이 열 번쯤 되풀이되었을 때, 전화를 끊고 정확히 17분이 지났을 때, 그토록 목 빠지게 기다리던 초인종이 울렸다.



재이는 말 그대로 총알처럼 튀어나가 문을 열었다. 세상에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정해, 진정."



"나가요! 얼른 나가야 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막무가내로 나가야 한다면서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던 재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현관 너머까지 내동댕이쳐진 신발은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며 작은 돌조각을 토해냈다.



"바퀴벌레는 핑계고, 유혹하려고 부른 거 같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바지는 단추도 채우지 않았고 지퍼도 반쯤 내려가 캘빈 클라인 팬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정시키고자 부러 짓궂게 농담을 걸었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이는 손가락으로 툭 밀면 그대로 넘어갈 것처럼 굳어 있었다. 지업은 재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덜미에서 가슴까지 손으로 쓰윽 쓸어내렸다. 그리고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아……."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게 무서워? 걱정 말아요, 이거면 바퀴벌레는 완전박멸 가능하니까. 좀 들어가도 되지?"



여전히 아연한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업은 방 안으로 들어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둥그렇게 생긴 캔을 하나 꺼냈다.



"그게 뭐예요?"



"연막탄. 이거 해놓고 서너 시간만 있다가 들어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지업은 연막탄을 가스레인지 옆에 두고 싱크대 문을 활짝 열었다. 재이는 혹시라도 바퀴가 튀어나올까 싶어 움찔했다.



"정말요? 그…… 근데, 데…… 데드 바디는?"



"하하, 시체? 하하, 정말 겁 많네. 보통 밖으로 나가 죽긴 하지만, 혹시라도 시체가 발견되면 연락해요. 치워줄 테니까."



지업은 옷장으로 걸어가며 여전히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는 재이의 머리통을 한 번 슥 쓰다듬었다. 처음 바로크에 들어왔을 때도 숫되어 보이는 게 귀엽더니, 어수룩한 것은 천성인 듯싶었다.



"저기, 지업 씨, 미안하지만 거기 아래 서랍에서 회색 슬리브리스 셔츠 좀 줄래요? 네, 그 서랍이요."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허술한 옷매무새를 민망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서랍을 열어 재이가 말한 셔츠를 찾는데 한쪽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은밀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취향을 말해주는 초박형 콘돔 한 곽과 러브 젤, 그리고 내용물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원통 모양의 플라스틱 케이스. 아아, 이 시대의 건강한 게이 청년이로군.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부드러운 미소의 포커페이스가 전문인 지업답게 전혀 못 본 척,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셔츠를 건넸다.



"이렇게 옷장이랑, 싱크대, 책상 서랍 다 열어놓고 연막탄 피워놓으면 숨어 있던 바퀴벌레도 끝."



손으로 목을 내리긋는 시늉을 한 후 지업이 불을 댕기자 캔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 안은 뿌연 연기로 꽉 찼다.



"그리고 우리는 나가서 집들이하고 놀다 오면 오케이. 아, 여기 주인한테 연락해요. 불났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벌레 때문에 연막탄 피웠다고 말해놓으면 될 거예요."



재이는 연기로 가득 찬 방을 심란하게 바라보며 지업이 시키는 대로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하루종일 깨끗이 청소해놨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그 끔찍한 것들이 전멸한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청소야 지업의 말대로 몇 시간 밖에서 보내고 들어와서 다시 한 번 더 하면 되는 거고.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뭘 이 정도 가지고. 옛날에 나 살던 집은, 좀 오래된 구식 주택이었는데 바퀴벌레에다, 불개미, 심지어 쥐까지 있어서 몇 달에 한 번씩 연막탄 피웠어요."



"쥐…… 쥐요? 으으, 그래도 cockroach가 제일 싫어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마음이 놓이니 조금씩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벌써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재이는 나란히 골목을 걸어 내려가는 지업에게 물었다.



"식사 안 하셨죠? 우리 뭐 먹을까요?"



"원래 이사 온 날은 집에서 자장면 시켜 먹는 건데,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할래요?"



"여기서는 이사한 날 자장면 먹어요? 그런데 지업 씨, 저기 반말해도 돼요. 제가 훨씬 어리잖아요."



"그럴까? 그럼 재이도 형이라고 불러."



기다렸다는 듯 지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형이요?"



"그래. 지업이 형."



"그럼, 저기 지업이 형, 우리 자장면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말하는 모양새가 귀여워 지업은 진정 덮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재혁과 취향이 일치하는 것이 바로 귀엽고 순진한 바텀을 좋아하는 점이었다. 기실 지업의 취향은 좀 더 어린 쪽이었지만. 재혁이 좀 더 노련하게 즐길 수 있는 상대를 선호한다면 지업은 아직 사내를 잘 모르는 애들을 정복하고 길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부쩍 자라는 바람에 짧아진 교복 밖으로 기다란 팔다리가 나온 애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재혁은 ‘내가 남색가면 넌 뼛속까지 변태야.’라며 지업을 힐난했지만 어쩌겠는가, 취향은 취향인 것을.


우연히 보게 된 재이의 나신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근육이 잡혀 있었다. 운동을 오래 했는지 허리도 탄탄한 편이었고. 좀 더 마르고 살짝 허리 라인이 잡혔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재이는 나이에 비해 풋풋한 냄새가 많이 났다. 일단 꾸미지 않은 타고난 순진함.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조숙한 척 어른인 양 흉내 내는 어린애들은 질색이었다. 뒤끝도 좋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시켜볼까. 재이가 묻는 말에 상냥하게 대답을 하며 지업은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안 된다고 울면서 반항하다가 허리를 뒤트는 모습도 제법 귀여울 것 같다는. 지업은 순진한 어린양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아무런 사심 따위는 없다는 듯 신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보이는 중국집을 가리켰다.





"첫사랑이요?"



주석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재이는 지업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지업은 손을 들어 오백 한 잔을 추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기보다 잘 마시네. 여기요! 오백 하나 더!"



분위기는 적당하게 풀어져 있었고 다음 주에 함께 게이 바에 가기로 약속하는 등 어느 정도의 친밀함이 조성되었다. 좀 더 개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판단, 지업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첫사랑이란 아릿하고 내밀한 감정이라 털어놓고 나면 상대와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재이는 웨이터가 가져다 준 오백 잔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한 후 천천히 잔을 들이켰다.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이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지업은 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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