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이]엉겅퀴 - 8

127일전 | 109읽음

쳐다보며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종국에는 데이트 신청을 했다. 느릿하게 기우는 태양이 서가 안쪽까지 빛나는 몸을 드리웠고 그 위에 새겨진 헨리의 그림자가 너무나 완벽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기막히게 아름답다는 탄성이 절로 흘러나오는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하루였다. 그래서 그토록 고대했던 헨리의 데이트 신청도 미뤄버린 채 불안하게 두근대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실에 도착해 아직 살아 있는 엄마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맥이 파랗게 드러난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 분 후 엄마는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길고 가늘게 울리는 심전도 소리가 엄마의 죽음을 대신 말해줬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과 함께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주병을 재이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조와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자신을 부른 저 파란 녹색 병이 ‘아직은 아니야. 섣불리 결론짓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이는 또르르 자신에게 굴러온 소주병을 들어 손에 쥐었다. 믿고 싶었다.



그때 호텔의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재이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택시가 도착했다는 리셉션의 연락이었다. 바로 내려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후 재이는 가방을 끌고 나갔다. 다른 손에는 여전히 소주병을 굳게 움켜쥔 채.



***



전화를 끊고 조는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은 채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변명할 틈도 주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명랑한 척 말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조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평소처럼 편하게 대답하지 못했을까, 원칙이라고. 생활권 내에 상대를 들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어느 정도 선을 긋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선을 긋고 싶은 거라면, 다른 사람 명의로 핸드폰 하나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다.



'문명의 이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유비쿼터스, 이런 거 피곤하고 매력 없어요. 클래식하게 만나자고요. 만났을 때 되도록 다음 약속을 잡고, 주고받는 연락은 이메일로 하고, 혹시나 여의치 않게 급한 일이 생기면 약속 장소로 연락해놓고.'



거짓말도 아니고 전부 사실이었다. 생긴 건 모던한데 하는 행동은 앤티크라며 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트랜지스터가 아닌 진공관 앰프를 여전히 사랑하는 조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적당히 만나는 사이더라도 느릿한 게 편했고 공을 들이는 게 좋았다. 천천히 약속을 잡고, 만날 때까지의 기다림과 설렘을 즐기고, 결국엔 섹스일지라도 그게 전부는 아니기 위한 최소한의 마음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나잇보다 가벼운 열한 자리 숫자, 부드러운 미소로 헤어진 후에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구겨서 휴지통에 넣거나 삭제, 예를 누르면 그만인 번호 따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거고, 만나고자 하면 만나게 되는, 그런 게 사람의 인연이니까. 번호 하나에 의지해 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얄팍한 믿음에 자신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재이가 전화번호를 묻는 순간, 갑자기 말이 막혔다. 처음 만났을 때 집으로 데려갈까 불식간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알려줄 번호가 없다는 데 당황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이중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한결같이 지켰던 원칙이었고 지금까지 불편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바꿔야 할 이유도 없었다. 정말 답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한숨을 쉬는데 인터폰이 울리며 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무님. 문화재단 이사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어머니였다. 좀처럼 회사로 연락하지 않는 분이신지라 조는 고개를 갸웃하며 버튼을 눌렀다.



"예. 연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십 분 후에는 용인 연구소로 출발하십니다. 기획 2팀 정한승 차장님께서 이병렬 이사님도 동행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조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연구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자리였다. 지난 번 H34 프로젝트 워크숍에서 느꼈던 미묘한 경직성을 타파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권위적이고 지시와 보고에 익숙한 이 이사라니, 목적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마땅찮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출발 시간은 삼십 분 후로 늦춰주셨으면 좋겠군요. 통화가 길어질지도 몰라서요."



어머니는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서론이 긴 편이다. 사람에 대한 안부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바로 자기의 목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조는 수화기를 들었고 짤막한 신호음 뒤에 전화 연결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어떻게 별 일은 없으시고요?"



조는 스케줄 북에 적힌 가족들의 한 달 계획을 대강 눈으로 훑었다. 어머니, 현세은 문화재단 이사, 8월의 주요행사, 셋째 주 화요일 조인 미술관 개관, 둘째 주 토요일 미술관 개관 기념 파티.



"아직요. 오늘은 용인 연구원들과 점심을 하기로 해서요. 예, 어떻게 미술관 개관 준비는 잘 되어 가시나요?"



아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으신 모양인지 부드러운 웃음기가 차분한 어조에 묻어나왔다. 요즘 프로젝트 막판이라 바쁘다고 무심했나 싶어 죄송스러웠다.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습니다. 일이야 누구나 다 하는 건데요. 어머니 조만간에 같이 점심이나 하시죠.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조는 스케줄을 확인하고 목요일 점심쯤이 어떠냐고 물었고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는 흔쾌히 찬성했다. 한 번도 안 된다고 말씀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곱게 자라신 분이고 그대로 고운 사람이었다. 파혼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연적의 아들, 미워할 법도 한데 어머니는 조와 다른 두 동생을 차별하며 키우지 않았다. 외려 친아들이 아니라 엇나갈까봐 더 정성을 쏟았고, 그 때문에 재성이와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다.



아버지 건강에 대한 염려와 유학 생활을 끝내고 유럽 여행 중인 재성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서서히 전화하신 목적이 윤곽을 드러냈다.



― 이번 개관 기념 파티에 금진그룹 사람들도 올 예정이다. 아버지께서 세령이와 너 나란히 앉히라고 하시는데, 괜찮겠니?


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는 결혼은 사랑하는 여자와 해도 좋다고 허락을 내리셨다. 혼인 하나도 사사로운 일이 될 수 없는 이 바닥 풍토에서 참으로 고맙고도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문제라면 조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조는 특별히 싫지만 않다면 부모님들이 권하는 상대와 결혼하리라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석유화학사업이 주력인 금진그룹 장녀 정세령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였고 부모님들도 흡족해하시는 상대였다. 전부터 조금씩 의중을 비추시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실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힘겹게 대답을 하고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조는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전화 때문에 힘든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류를 챙기며 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겪어야 할 일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단 한 사람 때문이리라. 여러 가지로 몹쓸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정 차장과 함께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조는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이 이사는 자기 차로 움직인다고 했다. 용인까지 가는 내내 팀원들과 함께 짜놓은 중장기 전략들에 대한 삐딱한 의사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 되었다. 조는 정 차장과 몇 마디 나눈 후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연구원들과 이야기할 몇몇 주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오전 중에 있었던 일들이 순서도 없이 뒤섞여 복잡한 상태였다.



호텔을 떠났는데 재이의 연락처는 여전히 모르고, 젠장, 왜 지업이 재이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거야, 내주에 있을 파티가 끝나면 정세령과의 약혼은 기정사실화될 것이고, 유부남 게이라니 끔찍하군, 이병렬 이사는 도대체 왜 연구소에 동행하려고 한 것인지, S25를 맡았던 오세창 전무가 시킨 것인가, 도대체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조는 지끈거리며 쑤시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주변 사람들이 안다면 대놓고 비웃을 일이었다. 특히 지업이 녀석. 조는 서류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겨우 두 번밖에 못 본 상대, 섹스도 안 한 상대 때문에 골머리 썩히는 걸 안다면 그 자식은 꼴좋다며 비웃을 게 분명했다. 감정 따위는 선을 넘지 않게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잘난 척했던 벌인가도 싶었다.



결국 조는 리모컨을 들어 가리개를 작동시켰다. 소리도 없이 매직미러가 앞좌석과 이어지는 통로를 스르르 막았다. 이쪽에서는 저쪽을 볼 수 있지만 저쪽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는 특수 유리로 만들어진 가리개였다. 조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업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연결음으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들렸다. 컬러링을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적응되지 않게 바꾸기도 자주 바꿨다. 세 번째 소절로 넘어갈 때쯤 듣기 좋은 지업의 음성이 들렸다. ‘청아한 아이다’를 부르면 딱 어울릴, 테너 가수처럼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지업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일품이었다.



"나야, 바빠?"



― 말단은 언제나 바빠. 용건만 간단히.


하지만 말하는 본새는 참으로 싸가지가 없었다.



"간단히 할 테니 바빠도 시간 좀 내."



― 오케이, 기다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중간 중간 말 거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고 예의 녀석의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상냥한 대꾸가 흘러들어왔다. 전화기를 든 채 통화할 수 있는 장소로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 됐어. 말해봐.


세상에서 제일 바쁘신 친구께서 친히 일을 접고 멍석은 깔아주셨는데 막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러다 습관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 금진그룹 맏딸하고 약혼할지도 몰라."



― 브라보. 드디어 남색가의 정체가 드러나는군.


녀석이 늘 하는 냉랭한 농담이었다. 타인에게는 예의 바르고 더없이 상냥한 지업은 조에게만은 본색을 드러냈다. 이 녀석에게 위로의 말을 들어본 적이 고등학교 시절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를 제외하곤 없었다. 지업은 게이로 살 수 없는 슬픈 운명 따위는 대놓고 비웃었다. 게이가 아니라 어쩌다 사내 맛 한 번 보고 빠져 든 남색가일 뿐이라고. 친구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고 상처받다간 녀석하고는 한 마디도 더 나눌 수 없었다. 다만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듣던 농담마저 자신이 몹쓸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받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야, 뼛속까지 변태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슬프다."



― 설마 동정 받자고 전화한 것은 아닐 테고. 용건.


매정한 놈.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수화기 앞에 들이밀었다. 오래 시간 끌었다간 피도 눈물도 없는 친구 자식 바쁘다고 툭 전화 끊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업무시간이니 너무 오래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조는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 막 터널로 들어가 흑백으로 변한 주변을 응시하며 조용히 속내를 드러냈다.



"……재이 말이야, 자꾸 신경이 쓰이네."



― 신경이 쓰인다라……. 미묘한 표현이군.



"그래, 미묘하지. 휴우, 됐다, 됐어. 바쁜 사람 붙잡고. 조만간에 보자. 지난번에 말했던 그거, 잘 좀 생각해보고. 그리고 저기, 재이 핸드폰 번호 불러봐."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재이한테 물어봐.



"물어봤어. 번호를 못 외웠다고 너한테 물어보래. 오늘 이사 한다고 바쁜 것 같더라……."



왜 이 녀석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엄한 서류만 자꾸 들추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묘하군.


능구렁이 같은 자식. 고등학교 시절부터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결코 쉽게 속내를 드러내는 놈이 아니었다. 성장 환경이 불우해서 꼬였다고 찔러도 끄덕도 하지 않고 맞는 말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녀석이었다. 조는 한숨을 내쉬며 결국 재이와의 통화에서 가장 신경 쓰였던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재이랑 계속 만났던 거야?"



― 글쎄.


거슬렸다. 조는 들추던 서류를 무릎 위에 놓고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주변을 빙빙 에두르며 서서히 조여오는 녀석의 말투가 신경을 거슬렀다. 앞에 있었다면 스트레이트로 아구창을 날려버렸을지도 몰랐다. 저 자식 죽으면 뱃속을 꼭 갈라봐야지, 조는 생각했다. 분명 뱃속이 먹물처럼 시꺼메서 아무것도 안 보일 게 분명했다.



차는 한남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다리 넘어 보이는 신사동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렸다. 이사 갈 동네가 신사동이라고 했다. 기분 좋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고 흔들리며 상처받은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가슴이 지끈 내려앉았다.



"계속 만나고 싶어. 그런데 상처는 주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처럼."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리자 칼처럼 날을 세운 지업의 말이 곧바로 치고 올라왔다.



― 역시 오만한 조재혁다운 말이군. 가질 수 있는 것도 원하지 않고, 되는 것도 시작도 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인간.



"……야, 너 말이 좀 심하다."



― 칼자루 단단히 움켜쥐고 새삼 남이 받을 상처 따위 걱정하는 거,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잘나서 재수 된통 없는 박지업, 그만 해라. 오늘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전화번호나 불러."



― ……싫다면?



"뭐라고?"



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서로 거칠게 말을 주고받아도 지업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지업은 자신에게 분명히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 바빠서 이만 들어가야겠다. 원하는 건 손수 알아보시지.


입만 벌린 채 놀란 신음만 내뱉고 있는데 전화는 재수 없는 박지업처럼 툭 끊어졌다. 조는 핸드폰에 남은 박지업이란 이름 세 글자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씹새끼, 손수? 제길, 사람을 뭐로 아는 거야?"



윤 비서가 들었다면 상사에 대한 환상이 박살나며 거품 물고 쓰러질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조는 핸드폰을 옆 좌석으로 내던지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창밖을 노려보았다. 휴가철이라서인지 대낮인데도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점점 더 미간이 좁아지면서 인상이 험악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기사는 결국 반포 인터체인지에서 차를 뺐다. 그러나 강남의 정체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양재역 사거리쯤 도착했을 때야 차량 흐름이 조금씩 좋아지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 제 자식이 안 알려주면 내가 못 알아낼 줄 아는 모양인데……."



분노를 연료 삼아 투지를 불태우던 조는 가까이 다가오는 ZK telecom 간판을 보고 가리개를 열었다.



"김명훈 씨 저쪽에 잠깐 차 좀 세워주세요. 정 차장님,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십 분 정도면 될 겁니다."



시계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정 차장을 뒤로 하고 조는 훌쩍 차에서 내려 거침없이 통신사 대리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십오 분 후 나온 조의 손에는 6.9mm 최신의 초박형 까만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



이사랄 것도 없었다. 옷과 책, 가지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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