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이]엉겅퀴 - 5

193일전 | 418읽음

호텔이나 건물 안의 냉기는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재이는 가볍게 이를 으드득 갈았다. 바로 이틀 전 빵빵한 냉방을 자랑하는 모텔 방에서 흠뻑 젖은 채 벌거벗고 설쳤던 탓이 아니겠는가.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이 확확 달아올라 열 때문에 어질어질한 정신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아니 무슨 욕실을 유리로 만드는 거야! 서울은 변태 천국이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름 인생 경험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변태에게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게 굴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호감까지 보였던 것도 억울했다.



으슬으슬 떨리는 통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재이는 그러나 몽롱한 가운데 떠오른 기억에 움츠러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일단 들이받긴 했는데,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오른쪽 얼굴을 완전히 적시며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순간 놀라고 당황해, 재이는 황급히 등을 돌려 모텔을 빠져나와버렸다.



"괜찮겠지?"



어느새 약해진 마음에 걱정스런 얼굴로 중얼대던 재이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었다. 그런 인간은 한 번쯤 당해봐야 했다. 백 번 당해도 싼 짓을 하지 않았던가. 전부 그가 자초한 짓이었다.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릴 적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 랜든이란 애가 있었다. 장난기가 많고 짓궂은 친구였는데 툭하면 재이를 놀려댔다. Jay Jae(얼간이 재이)라면서 이름 가지고 놀려대고, 피부가 노랗다며 손가락질하고, 좋아하던 인어공주 동화책을 가지고 계집애들이나 보는 거라면서 꽤나 괴롭혔다. 참고 참던 재이는 결국 어느 날 분노의 폭발을 하고 말았고 온 힘을 다해 세차게 그 녀석을 밀쳤다. 수업 종이 울려 다른 애들은 다 들어간 시간이라 둘 밖에 없을 때였다. 녀석이 화장실에 나뒹구는 것을 본 후 재이는 냅다 달려 교실로 돌아갔고 잠시 후에 녀석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다. 그리고 랜든은 아파서 일주일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볼거리를 앓아서 결석한 것이었지만, 그 일주일 동안 재이는 자신 때문에 랜든이 앓았다고 생각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옥을 겪어야 했다.



"휴우……."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계속해서 걸렸다. 좀 심했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초면인데다 낯선 자신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준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마지막에 도가 지나친 장난을 치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 탓도 있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라지만 모텔에서 같이 잠까지 자고, 그 사람에게 기대감을 품게 해준 것은 분명했다. 조가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재이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멍하니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거였나.



'뭐야, 나…… 결국 조가 쉽게 생각하는 게 기분 나빴던 거야?'



열에 들떠 뜨거워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하고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거였다. 정말이지 이놈의 성깔, 한 번만 더 침착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되는데 늘 이 모양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져 재이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열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열 때문인지 으슬으슬 추운 게 한숨 자고 일어난다 해도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재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 속에서 나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아무래도 나가서 약을 좀 사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리셉션에다 근처에 약국이 어디 있는지 묻고 나서 재이는 호텔을 나섰다. 뜨거운 땡볕 덕분에 냉기가 사라져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이 좋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따가운 햇살이 약해진 호흡기를 자극하는 매연과 뒤섞여 버겁게 다가왔다.



재이는 약을 들고 나와 한 블록 아래에 있는 커피 빈으로 향했다. 바로 약을 먹기엔 먹은 게 없어서 곤란했다.



카페 라떼와 초콜릿 머핀을 주문하고, 물 한 잔을 따라 쟁반에 받친 후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크에서 만났던, 바텐더로 착각해 온갖 폐를 끼쳤던, 그리고 단 이틀 만에 파란만장 스토리를 엮어낸 조의 친구인 지업이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너무나 창피해져 재이는 어쩔 줄 모르며 무거운 쟁반을 든 채 그대로 지업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요, 재이. 왜 그렇게 서 있어요?"



"아, 예."



지업은 읽고 있던 신문을 깨끗하게 접은 후 옆에 놓인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한가득 피곤이 담긴 재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 주말 내내 제대로 즐겼나 보군. 유쾌하지 못한 상상을 애써 지워버리며 지업은 쟁반 위에 놓인 약봉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약이에요?"



"저기, 감기가 좀 들었어요. 열도 좀 나고, 재채기도."



재이는 말을 멈추고 흠칫 어깨를 긴장시켰다. 지업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그대로 덮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재이의 이마를 짚고 있던 지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제법 있네요. 그런데 그 머핀이랑 커피 가지고 되겠어요? 감기 걸렸을 때는 뜨거운 국물이 좋을 텐데."



"괜찮아요. 입맛도 별로 없어서요."



지업은 재이의 대답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업은 두 번 이상 묻는 법이 없었다. No면 no, yes면 yes. 되는 일에 전력으로 부딪혀도 힘든 게 세상이었다. 안되는 것은 빨리 알아채서 즉각 정리하는 게 현명한 세상살이의 이치였다. 그래서 정을 중요시하는 이 나라에서 지업은 종종 예의는 바르지만 ‘인정머리 없는 놈’으로 불렸다. 거절해놓고 왜 두 번 물어봐주지 않느냐며 외려 섭섭해하던 사람들, 이해할 수 없었다.



목이 부어 퍽퍽한 머핀이 잘 넘어가지 않을 텐데 재이는 라떼를 마시며 머핀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뜯어 입에 넣었다. 목이 부어 아픈 바람에, 삼킬 때마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짝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서먹해 재이는 괜히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시선이 어쩐지 불편했다. 여전히 친절하긴 한데 이상하게 많이 어색했다. 편안하고 부드럽게 분위기를 이끌던 바로크에서와 달리 지금은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조보다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장소가 틀려서일까, 뭔가 많이 달랐다. 계속되는 침묵이 점점 버겁게 다가와 불쑥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은 출근 안하세요? 이 시간에 어떻게……?"



"호기심이 많네요. 늘 그렇게 질문이 많아요?"



빙그레 웃으며 되묻지만 분명하게 선을 긋는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자 지업은 턱으로 머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먹어요. 약 먹어야죠."



어색해하는 티가 역력했다.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깐 채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머핀을 입에 쑤셔 넣으며 라떼를 들이붓는 모습이 귀여웠다. 열이 올라 불그레해진 눈가가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지업은 조금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래처 왔다가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려고 들렀어요. 숙소가 이 근천가 보네."



"네. 바로 옆의 한강 호텔이에요."



"랭귀지스쿨에 일하러 온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예. 다음 달부터요. 그땐 스쿨 근처 스튜디오로 옮길 거예요. 압…… 쿠전이던가? 뭐 그런 이름이에요."



"아, 압구정. 그쪽이면 조하고 종종 가는 곳이네."



조의 이름이 나오자 잔잔하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재이는 정말 무방비했다. 마음을 감출 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구김살 없이 자랐다는 뜻일 게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손에 넣는 인생. 담배가 당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지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순진한 눈동자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타지에 와서 아프면 서러워. 건강관리 잘해요."



"예. 고맙습니다."



갑작스런 작별의 말에 얼떨결에 재이도 따라 일어나 그가 양복 재킷과 가방을 챙기는 것을 지켜봤다. 그에게 물어보면 조와 연락이 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무래도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바로크가 있긴 하지만, 회원제 com. room인 것을 안 이상 내킬 때마다 들락거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뻔뻔한 성격은 못 되었으니까. 지업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할 때 결국 재이는 다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저기 혹시 조 연락처 알 수 없을까요?"



지업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가 무슨 오해를 할지 불 보듯 뻔했지만 설명하자니 목도 까끌까끌하니 많이 아프고 말이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아 재이는 얼굴만 붉힌 채 대답을 기다렸다.



"조가 알려주지 않았어요?"



재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업은 가만히 재이를 쳐다봤다. 하룻밤 상대였던가? 자유분방한 녀석이지만 원나잇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깊게 사귀지 않아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재이와는 몇 번 더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얼굴까지 붉히는 걸 보니 녀석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었다. 심술이 났다. 나름대로 수작을 걸던 상대를 친구에게 뺏긴 것도 편한 심사가 아닌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자신을 사랑의 전령사로 이용하려 들다니. 지업은 섭씨 1도 낮춘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나도 말해줄 순 없겠는데."



냉정한 거절을 예상치 못했던 듯 재이의 눈이 황망히 커지며 눈빛은 좀 전보다 훨씬 더 크게 일렁였다. 지업은 자신의 말을 한 번 더 되새길 시간을 준 후 곧이어 냉혹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미국도 그렇겠지만, 한국은 더 많이 보수적이에요.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말해줄 순 없어요. 재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조는 …… 원나잇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구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티슈를 더욱 세게 쥐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원나잇.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콱 움켜쥐는 것 같았다. 가슴이 꽉 막혔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일까. 왜 이렇게 참을 수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시야가 흐릿해져 재이는 이를 앙다물었다.



"미안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재이는 의연하게 대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업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재이 연락처를 알려줘요. 조에게 전해줄게요."



"아, 전 아직 전화가……. 지금은…… 호텔로 전화하시면, 여기 한강 호텔 411호에요. 저녁엔 거의 있으니까, 아, 아니 됐어요. 그냥 전할 말이 있었는데, 된 것 같아요. 예. 됐어요. 그냥 두세요. 어쨌든 죄송해요."



지업의 말이 맞았다. 주말 정도 함께 즐겁게 보낼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연락하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바쁜 서울 생활에 귀찮은 일 하나 더 얹어주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자리에 도로 앉는데 지업이 맞은편에 서서 어깨를 한 손으로 꾹 잡으며 말했다.



"재이 씨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아직 여기에, 그래요 지옥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금세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야 좀 가슴이 쓰리겠지만 오랜 시간 정을 쌓은 게 아니니 시간이 해결할 일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끝난 것 같으니 느긋하게 공을 들여 볼까. 지업은 부드러운 눈으로 재이를 바라보며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몇 번 툭툭 쳤다. 재이는 입 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네. 고맙습니다. 전…… 괜찮아요."



지업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볼펜과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끼적인 후 북 찢어 재이에게 건넸다.



"이건 내 연락처예요. 타지에서 힘들 텐데, 친구가 필요하면 연락해요."



종이에는 ‘박지업. 010-1653-2628’라고 쓰여 있었다. 지업은 시계를 보더니 늦었다며 다음에 또 보자고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바쁘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재이는 지업이 준 쪽지를 깨끗하게 접어 지갑 속에 넣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아둔 약봉지를 집어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은 후 미지근해진 물을 삼켰다. 좀 더 물을 마시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셀프 정리대로 갔다. 컵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따라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찰랑찰랑 물을 채워 자리에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재이는 차가운 테이블 위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시원한 물이 담긴 투명한 컵 너머로 뒤집어진 세상이 보였다. 이글대는 태양 아래서도 고장 나지 않고 잘 돌아가는 세상이 컵을 가득 채웠다. 컵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도 함께, 툭.



***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선잠을 깼다. 약에 취한데다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재이는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뒤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어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에서 도망가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멈췄던 벨소리는 곧바로 다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Darn it!"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이불을 내팽개치고 일어나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돌바닥에 수레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아빠! 큼큼, 아니에요, 아냐. 자다가 깼더니 그런가봐."



재이는 어둠 속을 더듬거려 스탠드를 키고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아둔 시계를 집었다. 바늘은 7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페에서 돌아와 바로 침대 속에 들어가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 내리 8시간을 넘게 잤다. 그러나 깊게 잠든 게 아니라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지라 몸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았다.



"응, 정신없지 뭐. 정말 복잡해, 여기. 근데 거기 몇 시야? 아, 일하는 중이었구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통화하고 중간에 짤막하게 한 번 한 후 처음으로 통화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호텔 전화비는 비싸서 핸드폰을 장만한 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나 보다. 별 다른 말은 없지만 열흘 넘게 소식이 없어 내심 걱정한 모양이었다. 일의 특성상 아빠는 종종 밤을 새곤 했는데, 한참 일하다 쉬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고 했다. 아빠는 쉰 목소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몸 아픈 것은 아니냐고 계속 물었고 재이는 변명을 하느라 바빴다. 가다듬으려고 애를 썼지만 완전히 잠긴 목소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아니야. 진짜 안 아파.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봐. 요 며칠 돌아다느라고 좀 피곤했거든."



재이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연결된 전화선으로 갈 수 있을 데까지 최대한 움직인 뒤 팔을 뻗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통이 손에 잡혔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그나마 부었던 목이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재이는 몇 모금 더 물을 마셔 목을 부드럽게 만든 후 학원 사람들하고 만났던 이야기며, 서울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뭐랄까 다들 사무라이 같다니까. 척척 우산 꺼내서 앞으로 푹 찌르고 쫙 펼치는 거야. 버스 놓칠까봐 가까이 서 있다가 옷에 빗물이 다 튀겨서, 어휴, 정말이지 놀랐어. 응? 아니. 히히. 정말 그럴 껄 그랬나?"



재이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침대로 와 털썩 누웠다. 머리는 멍했고 찌뿌드드한 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수화기만 간신히 걸치고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내리 굶었더니 배가 고프기도 했다. 재이는 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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