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이]엉겅퀴 - 3

163일전 | 328읽음

갈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지척에 자신의 아파트가 있긴 하지만 한 번도 상대를 데리고 간 적은 없었다. 생활권 안에 파트너를 들이지 않는 것은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미 하이야트에 데리고 간 것부터가 예외긴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에 파트너를 데리고 가진 않았다. 조는 물끄러미 재이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흑심 품은 상대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외국에서 온 친구 정도로 생각해버렸다.



"하긴, 같이 안 잤으니 괜찮을지도."



잠시 느슨하게 생각했던 조는 결국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위험했다. 그리고 어제는 안 잤지만 오늘은 잘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왜 어제 같이 안 잤을까. 과음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두 병, 재이가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소주 두 병은 조에게는 주량을 초과한 게 아니었다. 전에 어떤 상대하고는 조니워커 골드를 둘이서 세 병 작살내고도 밤새 뒹굴었던 적이 있었다. 발베니를 포기하고, 지업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데리고 나와 놓고는 왜 같이 자지 않았을까. 미진한 숙취로 인해 멍한 상태에서도 조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근사해요. 정말 멋져요. 너무 로맨틱해요. 다리 조명도 근사하고, 희미하지만 별도 보이고. 와우, 강가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처음이에요, 이런 경험. 프랑스에 있을 때도 못해봤어요. 카페에서 밤새 수다 떤 적은 있지만."



술이 조금 들어가자 재이는 말이 많아졌다. 그것도 영어와 한국말이 마구 뒤섞여서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영어야, 조도 유창한 편이니 상관없지만 프랑스 이야기를 묻자 불어까지 간간이 섞여 곤란해졌다.



"예. 교환학생으로 가서 1년간 마르세유에서 살았어요. 정말 재밌었어요. 스페인, 독일, 그리고 알제리에서 온 애들하고 같이 살았는데, 뭐랄까, 내 평생 그렇게 놀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가까운 데에……."



조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게이의 도시에서 와서 그럴 수도, 아니면 그에게는 이곳이 외국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재이는 자신을 노출하는 데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다. 미리 선을 그어놓고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적당히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만남만 반복했던 조에게 재이는 여러모로 신선했다.



"그럼 미국서 태어나서 한국엔 처음 온 거야? 보통 친척들 만나러 오기도 하잖아. 그런데도 한국말 잘하네?"



"엄마, 아빠 다 한국 사람이니까. 주말마다 한국어 학교에도 다녔어. 한국 친구도 있었구. 한국어로 된 책도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했다구."



"그래, 기특하다. 그런데 이십삼 년간 한 번도 안 왔던 한국에는 왜 온 거야?"



"아…… 그건 말이지, 뭐랄까 연어가 태어난 강에 돌아오는 거 같은 거랄까. 조, 먼 바다에 가서 살다가 알 낳으러 돌아오는 연어 알지? 참내 걔네들은 컴퍼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찾아서 돌아오는 걸까? 신기하지 않아?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연어의 recurrence theory recurrence theory 회귀성 이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 아우, 한국말로 하려니까 답답하네. 영어로 해도 돼? 고마워. 그러니까 자기나침반 설하고, 태양의 움직임 이론인데……."



그리고 한동안 조는 재이가 말하는 연어의 회유와 회귀성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때는 조도 얼근하게 취한 상태라 원래 물었던 질문을 까맣게 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재이의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연어는 강 하구에서 가을에 알을 낳고 죽어. 알을 낳고 죽는 거야……."



느릿하게 이어지던 말꼬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재이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1년 전에 엄마가 죽었어. 굉장히 더운 날이었지."



어떻게 연어의 회귀가 엄마의 죽음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조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재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조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감싸 안아준 후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때는 자연스러웠다.



"우리 엄마도 죽었어."



조는 재이를 만나고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



"조 엄마도 죽었어? 1년 전에?"



"아니. 내가 네 살 때."



"그럼 조는 엄마 없이 자란 거야? 가엾어라."



조는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 년이 좀 지난 후에 재혼을 했고 새어머니는 갓난아기와 함께 들어왔다. 배다른 동생이었다. 강보에 싸인 채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참 귀여웠다. 그러나 조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동생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도. 조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자 멍하니 검은 강물을 바라보던 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Mama est morte. 엄마는 죽었다. 까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해. 뫼르소도 더운 여름날 엄마가 죽었지. 난 이방인을 참 좋아했어. 뭐랄까,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사람으로 살았던 까뮈의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이해가 되었어. 굉장히 여러 번 읽었어. 읽다가 울어버린 적도 있었어. 엄마가 들을까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었어. 조, 이방인 읽어봤어? 안 읽어도 괜찮지만 나중에 한번 읽어봐. 그런데…… 그래서였을까. 우리 엄마도 여름에 죽은 거 말이야. 아, 하지만 난 엄마가 죽고 나서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진 않았어. 그러니까 빵, 누구를 죽일 일도 없을 거야. 서울의 태양은 남프랑스의 태양만큼 뜨겁지도 않을 테고. 서울은 총을 구하기 힘들어서 다행이야. 아, 그래. 서울에는, 이십삼 년 만에 회귀한 건 말이지, 뭐랄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야."



마지막 말을 제외하곤 재이는 죽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본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나야 할 사람?"



"응. 그 사람을 만나서…… 알을 낳아야 해."



그래, 알을 낳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멍청하게 눈을 껌뻑이던 재이는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분명 농담일 텐데 재이의 표정이 너무나 엄숙해 보여 조는 순간이나마 그 말을 믿었다. 알을 낳는다. 물고기 중에는 수컷이 알을 낳는 종도 있던가. 취한 중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조는 잠들어 있는 재이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왼쪽 눈 밑에 보일 듯 말 듯한 경련이 일며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갔다. 무르게 보이면서도 단단한, 이탈리아 대리석 같은 인상이었다. 화려해서 처음 본 순간 뇌리에 박히는 타입이라기보다 보면 볼수록 눈길이 간다고 해야 할까.



"꼭 바흐 같군."



취하긴 단단히 취했네. 조는 피식 웃으며 취기를 핑계 삼아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재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만가만 시동을 걸었다. 일단 근처의 모텔에 방이라도 잡고 씻고 편하게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두 달 만에 제대로 쉴 수 있는 주말인데 취한 채 차에서 불편하게 자고 싶진 않았다. 가는 길에 문 연 약국이 있으면 낑낑대는 저 녀석을 위해 숙취 해소 약이라도 좀 사는 게 좋겠지, 중얼거리며 조는 차를 출발시켰다.





"으음, 귀찮아."



재이는 윙윙대는 날벌레 소리에 손으로 허공을 내저으며 이불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뺨을 간질이던 날벌레가 순식간에 커다란 곰으로 변해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을 짓눌렀다. 재이는 괴로운 신음성을 내며 몸을 비틀다가 꽉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수정체에 맺힌 커다란 상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재이는 멍하니 반달곰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곰은 씩 미소를 쪼개며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옥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그제야 재이는 네 발로 자신을 가둔 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곰이 아니라 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조는 트렁크만 입고 수건은 목에 두른 채 위에서 뚫어져라 재이를 쳐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조의 머리칼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똑 뺨 위로 떨어졌다. 주변으로 차츰 퍼져가는 물기를 따라 홍조가 번졌다. 그 자세가 참으로 야하게 느껴져 재이는 벌겋게 얼굴을 붉혔다.



"아아, 이제야 내 매력을 느낀 모양이네. 수줍어하는 모습도 보기 좋은데?"



"수…… 수줍어하단요! 누, 누가."



새빨개진 얼굴로 재이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본 게 처음도 아닌데 괜히 낯 뜨거웠다. 이렇게 눈에 띄게 빨개지면 안 되는데 확확 달아오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서 더욱 당황했다.



"와, 말까지 막 더듬고? 어제는 마구 반말로 대들더니?"



"아, 저, 저기, 비켜요. 일어날 수가 없잖아요."



밀치며 일어나려는 재이의 어깨를 조는 두 손으로 꽉 내리누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이, 너무하잖아. 우리 어제 상당히 잘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아침이 오니 강변에서의 어젯밤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네, 요정의 장난으로 돌릴 셈인가?"



부드럽게 빨려 들어가는 목소리에 재이는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눈빛은 장난기로 넘쳐 흘렀다. 맥이 풀려 재이는 툭툭 그의 가슴을 손등으로 치며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거 다 알아요."



"흐음, 놀리는 거 아닌데. 아, 이거 데뷔 후 십 년 만의 수치인걸. 그러니까 함께 밤을 보냈는데…… 아. 무. 일. 도. 없. 었. 다. 흠,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슨 삼류 추리소설 제목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말이지. 노우, 노우, 그럴 수는 없지."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그의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왔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민트향이 나는 입술이 순하게 다가와 포개졌다. 이 끝으로 윗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혀로 입술 사이를 톡톡 두드린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짧게 숨을 내뱉는 사이, 조는 놓치지 않고 혀를 입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혀와 혀가 엉키고 청량감 있는 타액이 흘러들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키스였다.



Good kisser.


혀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빨아들이는 듯한 키스였다. 재이는 나직한 신음을 울렸다. 커다란 손이 시트 위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재이의 몸을 훑어 내렸다. 얇은 시트 너머로 그의 체온이 아련히 느껴졌다. 좀 더 확실하게 감각하고 싶은 마음에 재이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그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조는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고 재이는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 눈으로 거리낌 없이 그를 좇았다. 가볍게 몸을 날려 침대 옆에 선 조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후후, 네 안 깊은 곳까지 맛본 느낌인 걸……."



재이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 사람은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했다. 그런데 입맛을 다시며 쿡쿡대는 모양새가 어쩐지 이상했다. 그래도 명색이 분위기 있게 키스한 후인데 말이다. 키스의 여운에 젖어 몽롱하게 누워 있던 재이는 한순간 말의 의미를 깨닫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 어제 몇 번이나 토했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가는 재이의 등 뒤에서 시원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저 사람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치약을 잔뜩 묻혀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울을 보니 가관이었다. 한쪽 머리는 눌려 뭉쳐 있었고 얼굴은 퉁퉁 부어서 쌍꺼풀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꼴로 넋이 나가게 키스를 하다니,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재이는 수치를 지우려는 듯 맹렬히 칫솔질을 했다. 거울에 싱글싱글 웃으며 반쯤 열린 욕실 문 옆에 기대선 조의 모습이 비췄다.



"이 닦고 나면 다시 키스해주게?"



칫솔을 놀리는 손놀림을 빠르게 하며 거울 속 사내를 무섭게 째려봤다. 조는 쿡쿡 웃음을 흘리면서 계속해서 재이를 놀렸다. 그래, 놀려라. 달달 놀려서 냠냠 맛있게 먹어라. 그래서 아주 꽉꽉 체해 버리라고. 재이는 수돗물로 입 안을 헹구며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비켜요, 나 씻을래요."



이를 다 닦은 후 부루퉁하게 밀어내는 말을 하며 문고리를 잡는데 조가 팔목을 움켰다. 새치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조는 시선을 마주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만난 상대와는 안 하는 게 원칙이야?"



미소는 여전했지만 장난기가 묻어나지 않는 정색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머쓱한 기분이 들어 슬쩍 그에게서 팔을 빼냈다. 처음 만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어제는 즐거웠고 분위기가 됐다면 할 수도 있었다. 좋은 사람이고 매너도 바르고, 유머 감각도 상당하고. 재이는 힐끔 조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시원스럽게 잘 생겼고 몸매도 탄탄하니 남자다워 좋고. 시선이 마지막에 멈춘 곳은 트렁크 팬티. ……. 큰 것도 같고……. 그런데.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말을 시작했던 재이는 주저하며 멈췄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진지하고, 조의 생각이 어떤지 종잡기가 힘들었다. 어디까지 보여야 하는 것일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런데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말해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는 게 예의일 테니. 재이는 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보낸 시간은 정말 좋았어요. 다만……, 당신한테 나를 너무 많이 보여준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리며 재이는 조심스레 욕실 문을 닫았다. 목덜미가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였는데, 외피로 드러난 수굿한 속내가 심장을 슥 건드렸다. 조는 욕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만찮은 상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무나 분명히 이해가 되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 나도 널 너무 많이 안 것 같다."



허를 찔린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조는 커다란 킹 사이즈 침대에 털썩 몸을 날려 누웠다. 이탈리아 대리석이 맞다. 물러 보이면서도 단단하고,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게. 재밌는 녀석. 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룻밤 새 무슨 감정이 그리도 크게 자라났겠는가.


그러나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생겼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심장이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끼기도 했고. 이대로 끝내서 바이바이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내일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좀 더 알고 싶기도 했고, 재밌을 것도 분명하니까. 결정을 내린 조는 벌떡 일어나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쳐다봤다. 그리고 씩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넌 아직도 서울을 잘 모르지~."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조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리모컨을 들어 욕실 문을 향해 겨냥한 후 붉은 버튼을 눌렀다. 창문처럼 되어 있던 벽장식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샤워를 하고 있는 알몸의 재이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휘유~. 기대보다 잘 빠졌는걸!"



샴푸 거품이 매끈하게 빠진 등짝을 따라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아침이었고―12시가 넘었지만 아직 식사 전이니― 조는 매우 건강한 이십대였고, 흑심을 품고 있는 상대가 전라로 샤워 씬을 연출했다. 살짝 김이 서린 욕실, 잘 빠진 젊은 청년의 알몸, 그리고 관객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 어떤 에로 비디오에서도 보지 못한 근사한 장면이었다. 단전 아래에 피가 몰리며 흥분이 되는 건, 절대 조가 짐승이라서가 아니었다. 당연한 생리적 반응일 뿐이었다.



"야아,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꿀꺽 침을 삼키며 조는 꼿꼿이 솟아오른 팬티의 앞섶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머리를 다 헹구었는지 재이는 몸을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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