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이]엉겅퀴 - 10

162일전 | 240읽음

로운 이야기를 쏟아낼 입술에 시선을 멈춘 채 차가운 맥주를 목으로 시원하게 넘겼다. 잠시 후 추억에 젖어 반짝이는 눈동자가 지업을 향했다.



"마이클 커닝햄 알아요?"



들어본 적은 있었다. 인문사회학 교양서적은 읽어도 소설은 읽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꽤 유명한 게이 작가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재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뭐랄까, 그 사람 소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영어로 읽어서 영어로 외우는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번역이 서툴러도 대강 이해해 줘요. 흠흠. 나는 오늘 교훈 하나를 얻었다. 다른 비합법적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소년들끼리의 사랑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기껏해야 평범한 일쯤으로 여겨지는 것뿐이다."



"훌륭한 번역인데?"



"고마워요."



재이는 맥주로 목을 축인 후 계속해서 말했다.



"내 얘기…… 같았어요. 내가 그랬거든요……."



냉동실에 보관하는지 맥주잔은 정말 차가웠다. 손가락만 닿아도 팔꿈치까지 저릿할 정도로 차가웠다. 술이 들어가 조금씩 더워지는 가슴과 손가락의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바람이라도 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재이는 나이테처럼 가느다랗게 홈이 파인 맥주잔의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닥에서부터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조차 투명할 정도로 맑고 차가웠다.



"걔는 정말 용기를 내서 다가온 걸 텐데……. 난 겁이 나서 주저하던 손길도, 처음 느낀 쾌감도, 모든 게 다 겁이 나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굴었어요. 그 후로도 계속 놓지도 못하고 끌어안지도 못하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비겁하게 웅크리고 또 웅크리다 결국 걔한테 상처만 줬어요."



한숨을 쉬며 나직하게 읊조리듯 고백하던 재이는 고개를 들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업은 그때, 순진하게만 봤던 이 친구가 마냥 풋풋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인데, 우리 나이로 스물넷,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커닝햄 소설을 읽다가, 아까 그 대목에서 울었어요. 걔가 떠올라서,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 한참 울었어요.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하지만…… 돌이킬 수 없고."



눈가가 젖어들며 호프집의 노란 조명이 검은 눈동자에서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재이는 감상에 빠져 자꾸 축축해지는 마음을 말리려고 애써 웃음 지었다. 그러나 웃으려고 애쓰는 형용에서 때론 더 진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아직 내성이 덜 생겼구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진 너무 무리하지 마."



냉소 따위는 전혀 없는 본인도 놀랄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위로였다. 저절로 손이 나가 재이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배시시 웃으며 재이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순순하게 귀여운 동생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서 예뻐해줄 텐데. 지업은 전혀 귀엽지 않은 자신의 골칫덩이 동생을 잠시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녀석은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 사람 좋아하고, 다혈질이고, 그러면서 유약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책임감 없는 점까지 그대로 닮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말 듣고 진득하게 일 다니나 싶더니 사장과 싸우고 때려치웠다는 소식을 아침에 전해 들었다. 지업은 맥주를 들이켰다. 정말이지 약한 인간들은 질색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민폐 끼치면서 상처는 혼자 다 받은 것처럼 구는 인간들이란.


불편한 생각에 빠져 있던 지업은 어느새 돌아와 자리에 앉은 재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네 첫사랑 자리를 꿰찬 그 행운의 사나이 이름은 뭐야?"



재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할 수가 없어요. 잊었거든요. 정말이에요, 슬프지만 잊어버렸어요. 어렴풋하게 떠오르긴 하는데, 생각이 안 나요."



잔을 들어 남은 술을 전부 마시고 경쾌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지만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헤어지고 나서 슬프고 괴로워서 더 기억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러다 잊어버렸나 봐요. 하지만 그건 기억나요. 걔 눈썹 옆에 빨간 점이 있었는데, 걔가 잠이 들면 난 몰래 그 점에 키스를 하곤 했어요."



지금도 떠올리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과 달리 기억의 많은 부분은 희미했다. 그때는 정말 어렸다. 미숙하고 이기적이고 그런 주제에 예민해서 상처도 쉽게 입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그런 실수를 저지를 것 같진 않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상처 입히는 그런 비겁한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자, 내 얘긴 끝. 이젠 조 얘기 해줘요."



재이는 맥주잔을 들어 살짝 소리가 날 정도로 가볍게 테이블을 치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도 전환할 겸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자신이 지업의 이름 대신 조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그래서 지업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좀 더 마실래?"



빈 잔을 힐끗 보며 지업이 물었다. 재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백 두 잔이요."



지업은 지나가던 웨이터를 붙잡고 빈 잔을 가리켰다. 재이는 접시에 놓인 초록색 콩을 몇 개 집어먹으며 지업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업은 팔짱을 낀 채 먼 곳만 바라볼 뿐 도통 말할 기색을 보이지 않아 재이는 어린아이처럼 졸라댔다.



"어서요, 형, 어서 첫사랑 얘기 해줘요."



지업은 웨이터가 가져다 준 맥주의 거품을 입술로 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사랑 없어. 아직까지 사랑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첫 경험이라면 모를까."



"정말요? 우와, 믿을 수 없어. 나보다 훨씬 올드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정말이에요? 흠, 좋아요! 그럼 첫 경험이라도 얘기해줘요."



"첫 경험? 정말 듣고 싶어? 너도 아는 사람인데……."



웃으며 장난을 치던 재이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돌았다. 지업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재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 하구요?"



접시에 담긴 안주를 집어 입에 넣으며 지업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1,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지. 둘 다 잔뜩 취했고, 난 아버지가 깽판을 치는 바람에 기분이 더러웠고, 그 녀석은 늦게 온 사춘기가 극에 달해 모든 게 다 불만이었고, 날씨는 더웠고, 둘 다 네거티브한 에너지는 활활 넘치는데 쏟을 길은 없고, 그러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만져줬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빙그레 미소까지 짓는 지업의 여유로운 모습에 재이는 입 안이 텁텁해졌다. 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지업과 조라니, 지업의 말을 한 마디씩 되새기던 재이는 두 사람이 함께 서로를 어루만지는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기분이 상당히 이상했다.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느낌이었다. 모르는 게 더 편할 사실을 원치 않게 알게 되면서 은근히 퍼지는 불쾌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정리할 틈도 없이 스르르 말이 먼저 흘러나갔다.



"그럼 혹시 지금, 두 사람……?"



너무 사적인 질문이다 싶어서 아차 하며 말꼬리를 삼켰지만 이미 내뱉은 후였다. 그러나 지업은 개의치 않고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물론 아니지. 포지션이 같아서 뭘 더 해볼 수도 없어. 이제는 애 때처럼 hand-job 수음手淫


으로 만족할 만한 나이도 아니고 말이지."



직설적인 표현에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적이나마 지업을 질투했던 마음도 부끄러워 재이는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자, 이번엔 내가 실례."



재이는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는 지업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국나이로 스물아홉이라 했으니 다섯 살 차이였다. 그런데 그들은 상당히 어른 같았다. 나이가 먹으면 사회적 위치가 남자를 남자로 만든다고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민 사회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아빠는 미국 사회에선 남자의 위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거라고 설명했다. 재이는 호프집 안을 둘러보았다. 태반이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이런 것도 남자의 위치를 위한 것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열댓 명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서 커다란 외침이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울리더니 왁자지껄하게 잔을 부딪치며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이는 돌아와 자리에 앉은 지업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정말 요란하네요. 재밌어요."



"이젠 적응이 됐나 보군. 즐거운 지옥에."



"헤헤, 그런가 봐요. 정말 즐거워요."



지업은 잔을 들어 바닥까지 비우자며 제의했고 재이도 흥겨운 마음에 응하면서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맥주 세 잔, 주량보다 좀 더 마신 것 같았지만 적당한 취기에 기분도 좋아 재이는 호기롭게 ‘한 잔 더.’를 외쳤다.



"그런데 왜 조한테 직접 말해주지 않고, 나한테 전화번호 물어보라고 했지?"



지업은 문득 생각난 듯 갑작스레 질문을 했고 재이는 취한데다 지업의 말이 빨라 잘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네? 미안해요,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왜 조한테 전화번호 직접 말해주지 않았냐고. 나한테 물어보라고 했다면서."



지업은 상체를 기울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지업의 얼굴에, 그리고 직선적인 그의 시선과 질문에 당황해 재이는 상기된 얼굴을 더욱 붉혔다.



"저, 제가 아직, 그러니까, 넘버를 못 외워서……."



재이의 변명이 미덥지가 않은지 지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소음 때문에 그리고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취기 때문에 재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지업은 잔을 내려놓더니 테이블 옆에 놓아둔 재이의 핸드폰을 집었다.



"여기 전화기 모양 있지? 그거 누르고 # 표시 누르면 자기 번호 나와. 알았지?"



"네. 고마워요."



조금은 고압적인 말투에 주눅이 들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지업은 쐐기를 한 번 더 박았다.



"다음부터는 이런 걸로 사람 귀찮게 하지 말라고."



"네. 저, 근데 지업이 형……. 조가 제 번호 물어보던가요?"



그러나 지업에게 미안한 마음보다는 조가 그에게 자신의 번호를 물어봤다는 사실이 기뻐 재이는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지업에게 확인했다.



"그래. 그러니까 알지. ……하지만 안 가르쳐줬어. 아, 그만 일어나야겠다."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한순간에 오그라들었다. 지업이 괜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재이는 지업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안 가르쳐줬냐고, 다음에 물으면 꼭 알려주라고. 아, 혹시……. 재이는 의혹에 찬 눈길로 지업을 바라봤다. 혹시 그가 조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아까 조와의 첫 경험 이야기할 때 뭔가 아쉬움이 묻어났었다. 의심이 잔뜩 일어난 눈으로 뚫어져라 지업의 등짝만 쳐다보던 재이는 그가 카드 전표에 사인하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같이 내요. 얼마 나왔어요?"



"괜찮아. 한국에선 연장자, 그러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술값 내는 거야. 이게 지옥의 룰."



밖으로 나오자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무더운 공기가 갑갑하게 숨통을 죄어왔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땀이 줄줄 흘렀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재이는 자신의 막강한 라이벌일지 모르는 남자를 반 걸음 뒤에서 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땀에 젖은 셔츠가 찰싹 달라붙어 드러난 저 탄탄한 등짝하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하며, 당당하게 사람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하며, 목울대 뒤쪽에서 깊숙하고 맑게 울리는 목소리하며, 전신에서 풍기는 강렬한 남성미는 정말 부러울 정도였다. 미국 애들하고 만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열등감이었다. 게임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 옆 횡단보도에 도착했을 때 지업이 돌아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다음 주 게이 바 가기로 한 약속 기억하고 있지?"



"네. 기억해요. 전화 주세요."



힘없이 대꾸한 후 지업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지업은 잠시 재이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같이 가는 거 아니다. 데이트 신청이다."



허공에서 기계적으로 흔들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알코올의 작용으로 뇌신경이 둔해지면서 이해 능력이 떨어지고 반사 신경은 50% 이상 감소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해도 재이의 반응은 월등히 더뎠다. 겨우 그의 말을 알아듣고 반응을 보이려 했을 때는 지업은 이미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진 후였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향하는 재이의 입가에 점차 미소가 떠올랐다. 근사한 남자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Yea. So…… not Joe, but me…….” 헤, 조가 아니라 나란 말이지.



그리고 더불어 지업이 막강한 연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도 되었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생각이었지만 얼근하게 올라오는 취기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다. 너무나 오랜만에 받은 데이트 신청이라 기분이 부풀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꾸 어떤 남자가 떠올랐다. 열이 나는 사람한테 장난스럽게 녹색의 소주병을 들이미는 짓궂은 어떤 남자였다. 재이는 핸드폰을 열어 몇 개 안 되는 전화번호를 검색하며 중얼거렸다.



"이봐, 조조. 그까짓 넘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재냐? 나……, 인기 많은 사람이야. 이거 봐, 지업이 형도 나 좋다잖아. 나중에, 나아―중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어. 난, 짝사랑 같은 거 절대 안 해."



그러나 지금 걸고 싶은 전화번호는 핸드폰에는 없었다. 재이는 창백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오늘 내로 전화 안하기만 해봐라……. 끝이야, 끝."



재이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벽에 등을 기대섰다. 내일까지 정확히 십 분 남았다. 오늘 내로 전화 안 오면 끝이야. 그냥 지업이 형하고 데이트해버릴 거야. 끝이라고. 재이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끝인데, 그래, 끝인데, 그 인간 참 독하지, 계속 생각이 났다. 뒤에서 끌어안을 때 맡았던 체향이, 등에 맞닿았던 체온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발기가 되었다. 셔츠 안을 파고들던 커다랗고 뜨거운 손바닥도, 가슴을 애무하던 그 입술도. 입술에서 달뜬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지만 어둑한 골목을 비추는 노란 가로등마저 섹시하게 보였다. 골목에 주차된 중형차의 헤드라이트 모양도, 쓰레기 더미 위에 비죽 올라와 있는 길고 굵은 페트병도 자꾸 야한 상상을 부추겼다. 결정적인 것은 벽에 붙어 있던 피시방 광고지였다. 리니지. 19인치 모니터. 정액. 정액. 정액……. 단전 아래가 뻐근해지며 사타구니 사이가 더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젠장, 하고 싶어 죽겠다."



반바지 위로 민망하게 드러나는 것을 손으로 꾹꾹 밀어 넣던 재이는 차라리 빨리 집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건물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휘적거리면서도 날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센서가 고장 났는지 2층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어두워 보이지 않는 열쇠구멍에 맞추려고 애를 쓰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잘 되질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재이는 핸드폰을 열어 액정의 불빛을 문에 비추었다. 그런데 문 손잡이 옆에 샛노란 포스트잇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메시지인가 싶어 재이는 포스트잇을 떼어 액정 불빛에 가까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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