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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달]runandrun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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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도시의 정적을 깨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낮의 번잡스러움과 반대로 밤의 도시는 또 다른 의미로 소란스러웠다. 밤거리는 형형색색의 네온 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과학이 발달한 이후 불빛만으로는 도시의 낮과 밤은 그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도시의 한복판 거미줄처럼 연결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빛을 뿌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

    침대에 누워 잠든 사내의 입에서 조금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잠에서 막 깬 듯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블라인드를 내렸어도 완전히 차단되지 못한 빛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빛을 피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연은 끙끙거리며 몸을 돌렸다. 지금 자신의 잠을 깨운 것은 과연 밤의 도시를 비추는 빛인지 고막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사이렌 소리인지 이연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집은 빛이 너무 잘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큰 창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선택이 곧 잘못이었음을 이사 온 지 1주일도 안 돼서 이연은 깨달았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이연은 밤에 창문을 통해 보는 야경이 일품이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설명에 혹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연은 가끔 캔 맥주를 한 손에 들고 혹은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중개인은 광량이 과도하게 집으로 들어온다는 점을 불행히도 이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도로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지만, 건물의 방음상태는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일조량이 좋다는 장점은 곧 단점이 되었다. 창문 아래로는 길게 쭉 뻗은 도로가 나 있었다. 달리는 자동차들과 도로를 비추는 가로등이 있다. 도로를 향해 난 탁 트인 창문으로 낮에도 밤에도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동산 중개인의 말만 듣고 창문의 바로 옆에 침대를 붙여 놓은 구조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이연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이사 온 지 첫날밤 창문에 블라인드를 설치 못 한 이연은 쏟아지는 헤드라이트의 빛에 뜬눈으로 새웠다.

    다음 비번 때 침대 위치를 바꿔야겠어. 침대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 일어나 앉은 이연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이연이 그렇게 마음먹은 것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온 두 달간 세 번째 마음먹은 것이었고, 이연은 실행하지 못했다. 죽어라 욕하면서도 탁 트인 창밖을 보면 할 말을 다시 잃기 마련이었다. 이연은 해파리처럼 축져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근육이 잡힌 늘씬한 몸에 브리프 하나만 입은 이연은 하품을 했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이연은 따로 잠옷이니 나이트가운이니 할 것 없이 심플하게 브리프 한 장만 남기고 홀라당 벗고 자는 습관을 지녔다. 어차피 동거인 없이 이연 혼자 사는 집이었고, 한밤중에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침대 옆에 걸쳐둔 바지를 꿰차고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슬리퍼를 발에 꿰찬 이연은 주방으로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마냥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이연은 팔을 뻗어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더듬어 가던 이연의 손끝에 차가운 유리병에 닿자 이연은 행동을 더듬이의 끝이 물체에 닿은 달팽이처럼 멈췄다. 이연의 손가락은 유리병에 가득 담긴 압축된 에스프레소 캡슐을 집어 들었다. 이연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어른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캡슐이 들렸다. M&W사에서 나온 고농축 에스프레스 캡슐은 캡슐 하나로 약 1리터의 갓 뽑아낸 커피를 만들어 낸다. 광고의 캐치프레이즈대로 언제 어디서나 물과 이 캡슐만 있다면 갓 뽑아낸 커피를 마실 수가 있다. 이 획기적인 개발품은 인스턴트커피 시장의 54%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연도 M&W사의 점유율과 매출을 올리는데 일조한 열성구매자 중 하나였다. 핫플레이트 위에 올려놓은 유리주전자에서 어느새 뿌옇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안에 에스프레소 캡슐 하나를 집어넣자 곧 주전자 가득 짙은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애용하는 머그잔에 한가득 커피를 따른 이연은 그것을 들고 침대로 다시 이동했다. 침대에 앉아 머그잔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중얼거렸다. 블라인드 사이로 다시 강렬한 헤드라이트 빛이 한줄기 쏟아져 들어왔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연, 그가 하려는 뒷말은 빠져 있었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4번째의 다짐이었다. 머그잔 안의 커피가 적당히 식자 한 번에 쭈욱 들이마신 이연은 침대 바로 옆의 낮은 테이블에 머그잔을 던지듯 올려놓았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머그잔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이연은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지자 짜증을 부리듯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한참 들리던 그의 투덜거리는 점점 잦아졌다. 곧 이연은 안정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지 못했다. 방안에 울리는 소음에 깊은 잠속으로 가라앉던 이연의 정신이 위로 끌어 올려졌다. 깊이 잠들지 못해 옅은 수면상태였던 이연은 금방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개인용 휴대 단말기의 파란 불빛이 빠르게 점등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액정 위에 무수히 떠오르는 글자들에 이연은 인상을 썼다. 왜 저게 켜져 있지? 몇 번 눈을 깜박인 이연은 단말기 화면에 떠오르는 무수한 정보에 한숨을 내쉬었다. 단말기를 꺼둔다는 것을 잊었다.

    그러나 그의 짜증은 곧 액정에 뜬 내용을 확인한 후에 사라졌다. 한참을 휴대용 개인 단말기를 노려보던 이연은 곧 단말기의 전원버튼을 OFF시킨 후 침대로 몸을 던졌다. 현재로서는 관계가 없는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잘래.”

    베개 사이로 또다시 이연의 꿍얼꿍얼 거리는 잠투정 소리가 잠시 들리다 사라졌다.

    축져진 이연의 어깨를 마틴이 툭 하고 쳤다.

    “헤이! 이연.”

    마틴은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경쾌하고 톤이 높았다. 이연의 몸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마냥 흔들렸다. 평소와 다른 이연의 상태를 점검한 마틴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씩 웃으며 이연에게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잔을 넘겼다.

    “피곤해 보여.”

    마틴이 건네준 머그잔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카페인인 식도를 타고 위 속으로 들어가자 이연은 뇌 자극에 기운이 나는 듯했다.

    “잠을 못 잤어.”

    “잠을 못 잤어?”

    마침 옆에서 지나가던 크리스가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참견을 했다. 이연의 말에 크리스와 마틴은 이연이 잠을 못 잔 이유를 추리해 쏟아냈다.

    “게임?”

    게임광다운 마틴의 질문이었다.

    “데이트?”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젊은 남자가 잠을 설칠 일이란 게 얼마나 있겠느냔 말이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 이연이니 술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숙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게임은 아니라고 했고, 남은 것은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이연은 제법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고, 여자들에게 꽤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몇몇 오퍼레이터들은 이연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의미심장한 크리스의 표정에 마틴도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으며 어서 말하라며 재촉했다. 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동료들의 말대로 늦게까지 데이트를 즐긴 것이라면 좋겠다. 여자이고 남자이고 간에 육체관계를 가지지 않은지 약 1년 정도 되어갔다. 이연은 기억을 더듬었다. 데이트를 해본 기억이 언제였지? 무감각해진 기분이었다.

    “단말기를 꺼두는 것을 잊었어.”

    이연은 손바닥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었다. 그 말에 시선이 일제히 단말기를 향했다. 검정색의 매끈한 몸체를 가진 휴대 단말기가 빛났다. 악마를 본 것처럼 크리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연이 겪은 일은 크리스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단말기를 꺼 두지 않아 봉변을 당한 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중 크리스도 한 명이었다. 물론 이연은 크리스와 달리 금방 단말기의 파워버튼을 오프시켰지만 단말기를 어디에 둔지 잊은 실수를 한 크리스는 시끄럽게 삑삑거리며 우는 휴대 단말기를 찾느라 씨름을 해야 했었다. 다행히 긴급소집은 아니었지만, 크리스는 한참을 초조해져서 진땀을 뺐었다. 그 일을 떠올린 크리스는 그것 참 불행이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안됐다는 듯이 연민의 눈으로 이연을 보았다.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편히 쉴 수면을 방해하며 삑삑거렸을 단말기를 떠올리니 끔찍했다.

    이연은 피곤한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떼었다. 그런 이연의 피곤함을 공감한 크리스는 자신이 마시던 커피를 아낌없이 이연의 머그잔에 덜어 주었다. 이연은 감사하게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이연의 어깨를 두드린 크리스는 엄지를 치켜들고 자신의 어깨 뒤로 좌우로 흔들었다.

    “수면실 비었어. 가서 쉬지 그래?”

    머그잔 안을 다시 가득 채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연은 잠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괜찮아.”

    “뭐 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만..”

    크리스는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닥터 울렌을 조심해.”

    그리고 크리스는 누가 자신을 뒤쫓기라도 하는 것 마냥 후다닥 자리를 떴다. 크리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머그잔에서 얼굴을 땐 마틴이 슬쩍 어깨로 이연을 밀었다.

    “정말 괜찮겠어?”

    마틴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피로한 이연의 모습을 닥터 울렌이 발견하는 순간 이연은 팀 닥터인 그에게 한동안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이연의 직업은 육체적인 위험이 높았지만, 그 만큼 정신적인 위험도도 타 직업에 비해 높았다. 특히 팀 닥터인 울렌은 다른 팀 닥터들에 비해 너무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열성은 팀 요원들의 건강을 지키는데 한몫했지만 다른 의미로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팀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좋았으나 그의 잔소리는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능가했다. 팀 동료 중 닥터 울렌에게 시달린 맥은 다른 곳으로 파견근무를 요구했다. 불행히도 그의 요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맥의 섬세한 위는 신경성 위궤양을 일으켰다.

    닥터 울렌은 맥의 신경성 위궤양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순전히 팀원들의 건강을 위해 노력한 팀 닥터인 자신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은 최악이었다. 맥의 희생으로 그 일 이후 닥터 울렌의 열정은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감당하기에 닥터 울렌은 어려웠다. 언제 닥터 울렌이 카르테를 옆구리에 끼고 와서 안경 너머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흩어볼지 모를 일이었다.

    “또 불빛 때문에 잠을 못 잔거야?”

    이연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머그잔의 커피는 거의 식었다.

    “창문에 선팅스크린을 쓰라니까.”

    마틴은 선팅스크린을 쓰지 않는 건 너 뿐이야라고 원시인을 보듯 이연을 보았다. 마틴의 말이 맞았다. 블라인드가 아니라 선팅스크린을 쓰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광량을 쉽게 조절할 수가 있었다. 한낮에도 완전히 암흑처럼 빛의 차단 조절이 가능한 선팅스크린을 창문에 설치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내키지 않았다.

    “그건 내키지 않아.”

    마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연은 좀 특이했다. 새로운 전자기기에 대해 누구보다 빠른 습득과 이용을 보이는 반면에 실제생활에 활용하는 것을 꺼려했다.

    요즘 누구나 가정집에도 선팅스크린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창문으로 통해 들어오는 빛의 광량만 조절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창문 자체가 하나의 스크린이 된다. 범용단말기의 스크린이 되기도 하고, TV 화면이나 그 외의 영상이 출력되는 모든 시스템을 이용할 수가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이연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너무 피곤하면 수면시스템을 쓰던가.“

    이번에도 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틴과 크리스가 말한 수면시스템은 군인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짧은 수면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에 임하는 군인들의 수면건강을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뇌파와 신체를 평소와 같이 제대로 충분히 잠을 잔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주는 시스템이었다.

    마틴은 그런 이연을 커피를 홀짝이며 바라보았다.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한 후 이연은 수면시간이 대폭 줄었다는 것을 동료인 마틴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업무 수행에 지장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연은 팀에서도 꽤나 우수한 요원이었다. 아직까지는 수면조절을 잘하고 있는 듯 했지만 지속적인 수면방해를 받는다면 건강을 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할 일은 안 생겨. 침대 위치만 바꾸면 되는 거니까.”

    이연은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머그잔의 끝까지 차올라 찰랑이던 검은 액체는 말끔히 사라졌다. 간단한 일이다. 내일은 이연이 기다리던 비번이고, 내일 침대를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다.

    “그래 실행에 옮기면 말이지.”

    마틴은 이번에도 그것을 지적하며 말했다. 그 말에 이연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빙점에 얼어붙은 액체 마냥 굳어버렸다. 마틴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적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연은 반박하지 않았다. 불빛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고, 이연은 그때마다 침대를 옮기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연은 비번 때마다 침대를 옮기지 못했다.

    비번 때마다 일이 터지는 징크스가 있어 침대를 옮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그런 일이 있긴 있지만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비번 날 무엇을 했냐하면 이연은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마치 100년 동안 수면이라는 저주를 받은 동화속의 공주처럼 침대위에 쓰러진 이연은 미동도 없이 깊은 숙면을 취했다. 때로는 책을 읽었다. 이연의 취미중 하나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마틴은 고상한 노인네 같은 고리타분한 취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21세기 말쯤에 일어난 대지진의 영향으로 나무가 너무 많이 손실돼서 1세기 동안 벌목금지라는 조항이 공통적으로 생겼다. 때문에 종이책을 만드는 일이 현저하게 줄었기도 했지만, 발달된 과학 덕분이기도 했다. 과학의 발달은 생활의 편리성과 함께 많은 변화를 주었다. 책은 종이가 아니라 전자화면이 되고, 전자 신호로 변경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책의 내용을 원하는 페이지만을 골라서 단말기를 이용해 볼 수가 있었다. 필요하다면 영상과 함께 말이다. 일반적으로 책이 차지하는 부피와 공간에 비해서 손톱크기의 작은 칩에 들어있는 양은 방대했다. 벌목금지라는 조항뿐만이 아니더라도 편의성 때문에 종이책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덕분에 현재는 대지진 전 만큼이나 나무들은 울창해졌지만 그것을 건드리는 사람들은 없다. 물론 이연뿐만 아니라 그처럼 영상단말기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그런 그들의 모습은 21세기 사람들로 치면, 오페라를 즐기고 오래된 고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고상함 혹은 고리타분함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연은 마틴이 말한 그 고리타분하면서 고상한 취미를 즐겼다. 침대에 앉아 블라인드로 조절한 적당한 빛을 받으며 책을 읽는 것을 이연은 꽤나 좋아했다. 이연은 그 상황을 즐겼다. 그 다음은 샤워를 마친 후 창틀에 앉아 막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노을이나 야경의 불빛을 바라보며 목뒤로 넘어가는 그 알싸한 맛과 향과 그리고 시각이 주는 조화는 최고였다. 이연은 결국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해도 일조량이 지나치게 좋은 그 창문을 좋아했다.

    “이번에는 꼭 할 거야.”

    이연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마틴은 이연의 말에 속으로 웃었다. 마틴이 보기에는 동양계인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발끈하는 것이 이연에게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꼭 아이 같다니까.’

    동양계들의 특징인 나이에 비해 한참은 어려보이는 외모 외에도 가끔씩 보이는 아이같은 면이 이연에게는 엿보였다. 같은 나이어도 그들이 보기에는 신기하게도 동양계인들은 한참이나 어려 보였다. 이연의 신기한 점은 임무에서는 저런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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