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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로제 - 가시왕관의 예언 1-127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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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천사와 약탈자 (1)

    임이여, 어찌 그 길을 가십니까.

    반짝임에 혹해 왕관을 쓰지 마소서.

    그 관에는 가시가 많습니다.

    임이여, 어찌 그 길을 택하십니까.

    높아지기 위해 왕좌에 앉지 마소서.

    그 자리는 춥고 외롭습니다.

    내 해 같은 사랑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왕이 되고는 나를 사랑하실 수 없나이다.

    내 달 같은 기쁨이시여,

    왕이 되지 마소서.

    부디 나를 버리고 가지 마소서.

    사랑하던 우리는 왕관 앞에서 갈라졌습니다.

    나는 애원하며 붙잡았지만 그대는 기어이 뿌리치고 떠났습니다.

    버린 그대는 왕이 되어 땅에 많은 죄를 지었고, 버려진 나는 예언자가 되어 하늘에 대고 울었습니다.

    영영 떠났던 그대가 나를 다시 찾은 것은 먼 훗날 죽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대, 나의 왕은 무너지는 하늘 앞에서 얼굴을 가린 채 울었습니다.

    그대는 내게 죽여 달라 청하였고, 가혹한 부탁에 마음이 뜯겼지만 나는 다만 입을 맞췄습니다.

    “울지 말아요. 당신의 업이 깊어도 영원치는 않으니.”이것이 내 마지막 예언임을 확신하며 입을 맞춥니다.

    “시대의 시작이 당신이듯 시대의 끝 또한 당신. 또 다른 당신이 매듭을 지을 겁니다.”예언의 마디마디에.

    “그 역시 당신처럼 가시를 먹지만 괜찮아요. 그에게는 또 다른 내가 찾아갈 테니.”사랑하던 이의 입술에.

    “그들은 우리를 닮아서 우리처럼 사랑하겠지만 우리 같은 잘못은 하지 않죠.”독을 머금은 왕의 입술에.

    “그래서 그들은…….”왕에게서 눈물과 독을 덜어온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마지막 예언을 속삭입니다.

    그것은 비밀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고, 모든 것을 털어놓은 나는 흐려진 왕의 눈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그러니 이제 쉬세요, 나의 왕.”그것으로 왕은 죽고, 예언하는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먼 훗날, 우리를 닮은 당신들이 새로이 만나는 것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들은 간절함도 그리움도 없이 서로를 경계하지만, 그 만남의 의미를 사무치게 아는 나는 동떨어진 시간 속에서 홀로 웁니다.

    사랑스러운 이들이여, 당신들을 위해 내 마지막 예언은 시간에 파묻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예언이 현재를 물들여도 미래는 온전히 당신들의 것.

    나는 내 입을 막고 과거의 망령이 되어 단지 바랍니다.

    가시왕관의 찬란함 앞에서, 부디 우리처럼 길을 잃지 마시길.

     

     

    왕관의 보석이 흩어지면 가시에서 짐승이 나리라,

    가시 먹은 짐승은 왕국을 멸하여 마지막 왕자가 되리라.

    대국 엘라이온의 촉망받던 왕자가 대죄를 범했을 때 백성들은 모두 이 예언을 떠올렸다.

    만인에게 사랑받던 왕자 레오 엘라이온은 어느 날 미쳐서 형제들을 살해했다.

    죄 지은 왕자는 짐승이라 낙인찍혀 가시밭 황무지로 달아났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망국의 예언 속 ‘가시 먹은 짐승’이 나타났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 게으름뱅이에겐 늦잠이 더 소중했다.

    “해가 중천입니다, 필리아 자매. 어서 일어나세요!”단호한 인상의 부인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러자 침대에 놓인 이불뭉치가 꿈틀댔다.

    “원장님…… 조금만 더요…….”이불이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신음했다. 그러자 그 부인, 깐깐한 수도원장 노에가 질책했다.

    “그 소리는 아까도 했습니다. 웅얼대지 말고 이제 일어나세요.”그러나 이불은 뻔뻔했다.

    “사람은 왜 꼭 두 발로 서야 하는 존재인 거죠……?”“두 발 아니고 네 발이어도 괜찮으니까 일단 일어나세요.”“마음은 이미 일어났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왜 신께선 이렇게 무거운 육체를 우리에게 주셨는지…….”“매일 먹고 자니 몸이 무겁지요! 빨리 일어나지 못합니까!”이불의 연이은 반항에 노에는 결국 이불을 들췄다.

    두툼한 이불이 높이 떠오르며, 종알대던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났다. 이불 아래에 있던 건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아직 잠이 덜 깬 여자아이였다.

    “으앙, 추워요!”이불이 사라지자 여자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몸을 웅크린 모양이 퍽 처절했지만 노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징징대지 말고 옷이나 입으세요. 대사제님이 오셨습니다.”“네? 대사제님이요?”대사제라는 말에 그 여자아이, 필리아가 눈을 반짝 뜨고 노에를 바라보았다.

    “왜요?”필리아가 경계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노에는 대답하는 대신 필리아를 마주보았다.

    하나, 둘, 셋.

    노에가 마음속으로 셋을 세자 필리아의 얼굴이 신 것을 씹은 듯 확 찡그려졌다. 무뚝뚝한 수도원장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만 몰래 웃었다.

    로제 숲엔 작은 수도원이 하나 있다. 워낙 후미져서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서 필리아라는 수습사제는 수도원장 노에와 단 둘이 살았다.

    필리아이자 수습사제인 그 게으름뱅이는 한가한 수도원 생활을 매우 사랑했다.

    귀찮은 일은 싫어요, 복잡한 일도 싫어요, 밤잠 자기 전까진 낮잠이나 자고 싶어요.

    인생을 이토록 편하게 살고 싶었기에, 필리아는 대사제의 갑작스런 방문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필리아. 하나도 안 변했구나.”백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 인자하게 말했다. 하지만 억지로 일어나 끌려온 필리아는 시큰둥했다.

    “대사제님은 그새 주름이 느셨네요. 자글자글하게.”“그래, 그 입버릇도 여전하고.”노인, 대사제 아이로가 핀잔했지만 필리아는 못들은 척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발을 동당대며 물었다.

    “왜 오셨어요?”“맞춰보렴.”필리아는 이마를 찡그리며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대로 하나, 둘, 셋.

    눈을 비춰보던 필리아가 곧 탄식했다.

    “저를 죽이러 오셨군요?”대단한 헛소리였지만 대사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게 부탁이 있다.”“싫은데요…….”“뒷감당 가능하겠니?”“대사제님, 그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에요.”“가르침에 감사하네.”필리아의 볼이 더 부풀었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시키시려고? 필리아는 눈치를 살피다 되물었다.

    “무슨 협박인데요?”“시나피 지방으로 심방을 좀 다녀오렴.”“엑?”“어느 대부호가 말 안 듣는 따님 때문에 골치를 썩는 모양이다.”“아! 대사제님!”필리아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왜 자꾸 그런 일을 가져오세요? 그리고 심방이라니요, 저는 정식사제도 아니잖아요!”“수도원 생활을 8년이나 했으면 이제 사제 하나 몫을 할 때도 됐지. 시나피에서 널 간절하게 찾는다. 리바노스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이다.”“아, 진짜!”필리아는 몸부림치며 성을 냈다. 낙낙한 사제복을 입은 터라 퍼덕퍼덕 먼지가 날렸다.

    필리아가 리바노스에 간 건 석 달 전, 그때도 대사제의 협박에 못 이겨서 참주를 알현한 걸로 기억한다.

    리바노스의 참주는 강인한 지도자이자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평범한 엄마였다. 그리고 열두 살 난 그의 아들은 엄마의 후광과 제 힘을 믿고 설치는 악마새끼였다.

    그 오지게 말 안 듣던 놈 때문에 어찌나 고생했던지. 필리아는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이후 리바노스 참주가 네 얘길 대단하게 했다는구나. 무려 ‘로제의 천사’라고…….”“꺄아악!”대사제의 말을 듣던 필리아가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노에도 탄식했다.

    “로제의 천사…….”“반복하지 마세요, 진짜 죽을 것 같아요……!”졸지에 천사가 된 필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흐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사제는 수치스러워하는 제자에게 담담히 고했다.

    “그 소문이 시나피까지 퍼진 모양이지. 시나피의 대부호도 딸내미를 좀 봐달라고 심방을 청했다. 로제의 천사께 말이다.”필리아는 천사라는 낯간지러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몸부림쳤다. 그리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사제님, 아가들을 돌보는 건 제 일이 아니에요. 그런 건 가정교사를 부르세요.”“가정교사로 안 되니까 널 보내는 게다.”“아, 그때 딱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저 이렇게 밖으로 막 굴려도 되는 사람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소문나도 상관없어요?”필리아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대사제도 짐짓 진지하게 필리아를 불렀다.

    “필리아여…….”“네…….”“어차피 갈 거, 힘 빼지 말거라.”“주님! 이 영감님께 벼락 좀 던져주세요!”참다못한 필리아가 피 토하듯 소리쳤다.

    대사제는 도리어 코웃음을 쳤고, 더 절박해진 필리아는 노에에게 도움을 청했다.

    “원장님, 원장님도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필리아 자매. 사제라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마땅히 손을 내미는 법입니다.”“그 말씀 고대로 돌려드릴게요. 제가 지금 도움이 엄청 필요하거든요?”“입 다물고 나갈 준비나 하세요.”“원장니임!”하지만 노에라고 필리아의 편은 아니었다.

    수도원장 노에의 목소리는 엄격했고 대사제 아이로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 사이에 끼인 가련한 수습사제는, 오늘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제 지방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장미가 많았다.

    수도원 근처의 숲도 들장미가 만발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정작 필리아는 그 화사한 길을 지나면서도 아무 감명 없이 시큰둥했다.

    “대사제님.”결국 끌려나온 필리아는 터덜터덜 걷다가 옆에서 걷는 대사제를 불렀다. 퍽 우울한 목소리로.

    “음?”“대체 무슨 꿍꿍이세요?”“꿍꿍이라니?”“저번에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왜 갑자기 밖으로 내보내는 건데요?”“갑자기랄 게 무어냐. 때가 됐다 뿐이지. 이제 너도 세상에서 몫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저는 딱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데요…….”“나오고 싶어 세상에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되리. 저도 모르게 났으니 길 더듬어 사는 게지.”대사제가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필리아는 그저 잔소리로 여기고 귀를 막았다.

    “네, 네, 어련하시려고요.”그리곤 한숨을 폭 내쉬며, 기왕 가게된 거 최대한 빨리 끝내자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지금 만날 영애는 이름이 뭐예요?”“클레로. 대부호 지자논의 딸 클레로다.”“몇 살이요?”“열일곱인가 그랬지.”“무슨 문제가 있는데요?”“얌전하던 그 따님께서 갑자기 난동을 부린다더구나.”돌연 날뛰는 부잣집 아가씨라니,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 필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염려스럽게 말했다.

    “대사제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보는 것뿐이에요.”“리바노스에서 그렇게 했다면 이번에도 그리 하려무나.”하지만 돌아오는 대사제의 대답은 가벼웠다. 필리아는 그게 영 수상해서 대사제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래본들 대사제의 눈은 고요할 뿐이었고, 필리아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말했다.

    “그럼 대사제님, 저 거기서 목걸이 풀어도 돼요?”“필요하다면. 단,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게.”대사제의 대답은 여전히 쉬웠다. 그로써 이 노인의 속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된 필리아는 가만히 인상을 썼다.

    그 사이 장미 숲이 끊기고 대로가 나타났다. 대로에는 시나피에서 온 호화 마차가 필리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로써 추궁할 기회를 잃은 필리아는 얌전히 시나피 행 마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은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사제에게 심방을 요청한다. 그럼 사제는 방문해서 무슨 일인지 살펴보고 가족들을 위로한다.

    필리아가 대사제에게 받은 명령도 그런 거였다. 지자논이라는 사람의 집에 일이 생겼으니 한 번 가보라는. 물론 필리아의 심방은 다른 사제들보다 독특하지만, 어쨌든 맥락은 같았다.

    마차로 반나절을 달리자 샛노란 언덕이 보였다. 들판에 만발한 겨자 꽃을 보고 필리아는 시나피에 도착한 것을 깨달았다.

    큰 도시답게 시나피는 관문에서부터 사람이 북적댔다. 그 인파를 보고 필리아는 속이 슬슬 거북해졌다.

    ‘사람이 너무 많아.’이어 마차가 도시로 들어갔을 땐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 사방에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들이 은연중 흘리는 혼잡한 소리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조용한 숲에서 갑자기 대도시로 나온 필리아는 메스꺼워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진정해,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그냥 대충 하고 가는 거야. 그럼 사람들도 더 이상 날 찾지 않겠지? 그래, 그거야! 주님, 모든 사람을 실망시킬 수 있게 도와주세요!’필리아가 이토록 괘씸한 기도를 올리는 사이, 마차는 광장을 지나 거대한 저택으로 향했다.

    ‘여기가 그 집인가?’필리아는 잔뜩 긴장한 채 점점 가까워지는 호화찬란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널따란 정원과 여러 채의 건물을 지닌, 이 대도시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대저택이었다.

    마차로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본관까지 가니 이미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집사와 하인들, 그리고 고급 옷을 입은 풍채 좋은 노신사.

    필리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바로 대부호 지자논이었다.

    ‘아, 뭐 저렇게 많이 나와 있어…….’필리아는 창밖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필리아를 마중 나온 거부와 그 식솔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반면 손님인 필리아의 행색은 초라했다. 대충 올려 묶은 금발에 후줄근한 사제복. 이 저택의 하인들보다도 못한 꼴이었다.

    그 모습은 이 저택 식구들이 고대하는 ‘로제의 천사’와 거리가 한참 멀었고, 고로 그들의 대면은 꽤 우스꽝스러웠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자 포대자루가 내렸다. 아니, 자세히 보니 포대자루 같은 옷을 입은 여자애였다.

    ‘어린애?’필리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부호를 비롯한 하인들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그 바람에 필리아도 덜컥 얼어붙고 말았다.

    ‘아……. 표정 봐. 이미 대놓고 실망하고 있어.’신께서 필리아의 괘씸한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셨다.

    사람들의 의혹 가득한 시선에 필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끔찍한 순간이었지만 필리아는 이것을 기회삼아 양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자학하듯 앙증맞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리리예요. 잘 부탁드려요!” 

     

     

    그 깜찍함이 정적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필리아는 그 반응에 만족하며 더 귀엽게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근데 리리를 왜 부르셨어요?”필리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갸웃대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필리아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리리는 대사제님이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웃음을 숨긴 채 필리아는 다시금 종알거렸다. 그러자 잠시 넋을 놓았던 노신사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귀, 귀하가 리바노스 참주님과 연을 맺은 사제가 맞소?”“네, 리리는 리바노스에도 갔었어요!”미심쩍은 물음에 필리아는 시침을 뚝 떼고 해맑게 대답했다. 그로써 노신사의 얼굴은 더 곤혹스러워졌다.

    “귀하, 실례지만 나이가…….”“나이요? 리리는 열 살이에요! 꺅!”필리아가 발랄하게 소리치자 노신사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가 상상한 로제의 천사는 자애가 넘치는 성녀였지, 이런 볼품없는 꼬마가 아니었다. 리바노스에서 전해진 소문도 어느 사제가 사람을 치유한다는 거였지, 웬 계집애가 말끝마다 꺅꺅거린다는 게 아니었다.

    예상과 전혀 다른 필리아의 모습에 노신사는 턱까지 차오른 욕설을 꾹 삼켰다. 그리곤 힘겹게 말을 이었다.

    “환영하오. 리리 사제. 나는 이 집의 주인인 지자논이라고 하오.”“아, 그렇구나…….”“다름이 아니라 내 딸에게 문제가 생겨서 불렀소. 이번 주 안에 고쳐준다면 헌금은 원하는 만큼 하겠소. 건물이라도 하나 지어주겠소.”그 노신사, 지자논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코흘리개 사제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한심한 모양이었다.

    지자논이 대부호답게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지만, 정작 필리아는 돈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것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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