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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령]풍운록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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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흑령님

    풍운록

    제1장 지옥광왕(地獄狂王)

    횡산.

    섬서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산준령으로서 수려한 절경으로 시인묵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산이다.

    지금은 횡산의 절경들이 어둠 속에 묻혀 있고, 하늘 위에 떠있는 고고한 달빛만이 그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고요하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밤의 정적 속에 묻혀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밤의 정적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꺼억- 좋다.. 뉘 있어 감히 나를 막을 쏘냐? 하하..암.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지. "

    어둠 속에 잠겨있던 가파르고 험준한 협곡을 기다싶히 해 올라오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달빛이 어둠에 묻혀 있던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낙천서생인가?

    얼마나 취했는데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갓 약관을 넘은 듯한 백의문사였다. 저 상태로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의 오른손에는 술 호로 병이 꼭 쥐어져 있었다. 백의문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술병을 힘차게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 이놈-- 니가 날 노려보면 어쩔 것이냐? 그런다고 내가 나 먹을 것도 모자란 백화로(百花露)를 누러팅팅한 네놈에게 줄 것 같으냐? "

    시원하게 술을 들이키던 백의문사가 갑자기 달을 향해 삿대질까지 해대며 노성(怒聲)을 발했다. 아마도 술에 취해 제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달이 시비를 거는 걸로 착각을 하는 걸 보면.

    한참 애꿎은 달을 꾸짖던 백의문사는 반성(?)하듯 조용히 있는 달의 태도에 화가 풀린 듯 달래듯 말했다.

    " 너도 알고 있겠지만 백화로란 것이 어디 하루이틀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냐.. 백가지 꽃의 이슬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보통 인내력가지고 가당키나 하는 일이냐? 난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리고 백화로란게 아무나 마시는 술이 아니란 말이지. 나같이 덕망 있고 잘생긴 공자한테나 어울리는 술이야...넙적 하니 누루팅팅한 네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

    달을 향해 가당치도 않은 일장연설을 토하는 백의문사. 그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음인가? 달은 구름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달이 사라진 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백의문사는 득의 만만하게 웃으며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술조차도 백의문사를 외면하는 듯 술병은 비어있었다.

    " 이런 젠장할.. 야 이놈아. 네 누르팅팅한 얼굴에 놀라 내 백화로가 다 도망갔잖아. 어떻게 책임 질거야? "

    백의문사는 구름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달에게 다시 애꿎은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는데 술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

    지칠 때까지 혼자 열심히 열을 내던 백의문사는 결국 제풀에 꺽여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취기가 밀려오는가?

    백의문사의 눈이 스르르 감겨들었다.

    풀-석

    완전히 잠에 취한 듯 백의문사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뒤로 횡산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제는 백의문사도 횡산의 일부분인양 야경(夜景)에 동화되었다.

    사경(새벽 2시 전후)을 접어들 무렵이다.

    딸랑-딸랑

    백의문사의 횡포로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횡산에 돌연 한 소리 혼백을 휘젓는 방울소리가 밤을 헤집고 또렷이 울려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미동도 없이 잠 속으로 빠진 듯 하던 백의문사가 눈을 떴다. 백의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눈을 뜨고 방울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살폈다.

    그러자 산기슭을 헤치며 올라오고 있는 사면이 흑색일변도인 가마 한 대가 보였다.

    첫눈에 보기에도 강인함이 엿보이는 삼십 전후로 보이는 네 명의 흑의무사(黑衣武士)들이 그 가마를 메고 있다. 흑의인들은 가볍지 않은 수련을 쌓은 듯 가파른 산길을 평지를 걷듯 하고 있었다.

    백의문사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스쳤다. 흑의무사들은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천천히 걷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다가오는 속도는 섬광(閃光)과 같았던 것이다. 또한 험한 협곡 위를 오르는데도 흑색가마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이들이 일개 가마꾼에 불과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네 명의 흑의무사에게서는 일대종사와 같은 기도가 흘렀다.

    이걸로 미루어 짐작 건데 이런 자들을 부리는 가마 안에 인물은 실로 엄청난 신분을 가졌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흑색가마는 백의문사 앞에 당도해 섰다.

    갑자기 나타난 가마는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아니 어둠에 묻혀 귀기(鬼氣)스럽기까지 했다.

    보통 사람이 때늦은 시각 이러한 협곡에서 흑색가마를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의문사는 태연했다. 아니 달을 향해 행패를 부리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백의문사의 기색은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게 전신에 흐르던 광태(狂態) 대신 고고한 기상이 흘렀고 술로 흐리멍텅하던 눈에는 총기(聰氣)가 반짝였다.

    사실 백의문사가 늦은 시각 횡산에 올라온 것은 이 눈앞에 흑색가마 때문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 본이 아니게 술로 지루함을 달래다 술에 취해버렸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아마도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흑색가마는 사면이 가려져 있어 백의문사에게 지극히 불리했지만 백의문사는 투시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흑색가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여러모로 유리해 보이는 흑색가마였다. 분위기나, 숫자 면에서.

    "그대가 무영문주(無影門主)인가? "

    흑색가마 안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백의문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양이다. 백의문사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대가 지옥광왕(地獄狂王)이요? "

    백의문사는 지옥광왕 못지 않게 거만하게 물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나올는지 보겠다는 듯 자못 흥미로운 눈길로 흑색가마를 주시했다.

    갑자기 흑색가마 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그 살기는 가는 실처럼 백의문사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범부(凡夫)라면 심장이 동결돼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일순 백의문사의 눈에 긴장감이 스쳤다. 그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극히 일순간의 일이었다.

    백의문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담담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지옥광왕이 내뿜는 무형살기(無形殺氣)로 파리하게 질려 가는 안색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지옥광왕이 누구인가?

    - 지옥광왕(地獄狂王) 철뢰(鐵雷)

    오 십 년 전 천지를 휩쓸던 공포의 대마존, 천하가 좁다고 날뛰던 절세거마(絶世巨魔)가 아닌가. 그의 손에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죽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혁혁한 마명을 날리던 자. 그와 대적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사십 년 전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었다.

    백의문사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랐다. 입안에 쌉싸름함 피 맛이 느껴졌다. 지옥광왕의 살기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백의문사는 지옥광왕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선지피를 삼켰다.

    흑색가마 안에서 뻗어 나오던 살기가 홀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근성이 있는 자이군. 그렇다. 본좌가 바로 지옥광왕이다. 그대는 무영문주가 맞겠지?"

    백의문사는 남몰래 내상을 억지로 다스리며 짐짓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 그렇소. 바로 내가 무영문주(無影門柱)요. "

    죽음의 대명사 지옥광왕을 대하고도 조금의 굽힘도 없는 태도였다. 놀라운 일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지옥광왕의 마명(魔名)은 아직도 건재했다. 떨지 않고 그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보통이 아닌데 거기에다 백의문사는 줄곧 지옥광왕에게 평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광오(狂傲) 하기까지 했다.

    무영문주(無影門柱) 묵비후(默飛 )

    이것이 백의문사의 정체이다.

    무영문(無影門)

    어디에 위치하였는지 문도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강호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오 년 전에 무영문이 나타났다는 것과 정보를 사고 파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뿐.

    무영문과의 접선방법은 황학루 누각에 정보를 팔고자 하는 자는 백색 깃발을 정보를 사고자 하는 자는 흑색 깃발을 꽂아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영문이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는 듯 일을 가려서 받았다.

    그리고 무영문이 승낙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기일 내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무영문에 정보를 사고 판 사람은 누구나 무영문이 정보문으로서 천하제일이라는데 첫 손가락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알 수 있다는 확실한 신용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무영문이었다.

    " 하하.. 광오한 젊은이로군. 좋다. 마치 본좌의 어릴 적을 보는 듯 하구나. "

    놀랍게도 지옥광왕은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에 유쾌하게 웃었다. 강호에 알려진 행적 되로 라면 크게 진노해야 정상이건만 .....

    묵비후는 지옥광왕의 말에 이제까지 와는 달리 짐짓 겸손(?)함을 보였다.

    " 과찬이십니다. 강호로 출도 하시면 아시겠지만 저 같은 놈은 길에 채일 정도로 많이 있으니까요. "

    물론 자기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자는 많다. 그러나 묵비후처럼 지옥광왕에게까지 그 작태를 들이 될 자는 거의 전무(全無)했다. 세상살기 싫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하나뿐인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겠는가.

    지옥광왕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 호오.. 세상이 그리도 많이 변했다는 말인가? "

    " 선배님이 다닐 때와는 많이 변했지요. 바야흐로 먼저 배짱 튕기는 놈이 유리하고 겸손하다 억울하게 당하는 놈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래 겸손한 저로서도 먹고살아야 하겠기에 세상 돌아가는 순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제가 이럴진데 다른 사람이야 ....."

    묵비후는 일순간에 무림동도들을 싸잡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 화술(話術)이 뛰어난 자이군. 의외야. "

    " 무엇이 말입니까?"

    " 자네같은 자가 무영문을 맡고 있다니 말일세. 천하정보를 다루는 자리니 진중함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그렇지 않고서야 약은 강호인들이 어찌 안심하고 일거리를 맡길 수 있겠나? "

    묵비후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 제가 못미더우십니까? 의뢰한 정보가 누출될까봐? "

    " 아니. 그러기 전에 내가 자네를 죽이면 되는 일이니 그리 걱정은 되지 않네. "

    지옥광왕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옥광왕의 말에 사색(死色)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묵비후는 담담했다.

    그가 상대하는 자는 거의가 거물급이었다. 묵비후가 애시당초 그들을 두려워하였다면 무영문이라는 단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간이 컸다.

    " 뭐 더 못미더운 것은 없으십니까? "

    " 천하를 손바닥 안에 들여다본다는 무영문주가 자네와 같이 새파란 어린애란 것도 의외일세."

    "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원래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법이지요."

    어깨를 으쓱이며 묵비후가 거만하게 말했다.

    " 이제 새 시대가 열렸다는 말인가? "

    잠시의 침묵 후 나온 지옥광왕의 음성에는 진득한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 나왔다. 묵비후는 분위기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사실 그도 목숨은 하나이니 쓸데없이 지옥광왕의 마음을 심란(心亂)하게 해 명을 달리하는 일은 피해야하므로.

    " 그래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었는지요? "

    묵비후의 물음에 지옥광왕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 흥. 고생이야 내 제자들이 했지. 걱정하지 말게나. 내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나이를 먹지는 않았으니."

    " 걱정이라니요. 천하의 지옥광왕을 누가 걱정하겠습니까? "

    묵비후는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물론 웃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지옥광왕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묵비후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 그래. 모두 내가 죽었기만을 바라고 있겠지. "

    묵비후의 이마에 식은땀 몇 방울이 보인다. 잠시 머리를 굴린 묵비후는 이 상황을 타계(他系)하기 위해 연기력을 발동해 흥분하며 말했다.

    " 그래서 이렇게 떡 하니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저 같음 괘씸해서 빨리 못 죽죠. 오래 살라고 축원은 못 할 망정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다니..그게 사람으로써 할 일입니까? "

    다행히 지옥광왕에게 그 수가 통한 모양이다. 곧 흑색가마 안에서 묵비후를 달래는 듯 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자네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나. "

    묵비후는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다는 듯 괴면쩍게 웃으며 변명했다. 완벽한 연기력이다.

    "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제 직업이 상관도 없는 남에 일 알아내서 먹고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남의 일에 쉽게 흥분하게 되지요. 고치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군요. "

    " 난 또, 어쩐 일로 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다했지."

    " 하하..물론 생각이야 많이 하지요. 저의 중요한 고객이신데요. "

    " 훗.... 험.. 농담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어떤가. 젊은이? "

    즐거운 흥을 일축시키며 지옥광왕이 말했다.

    "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렇게 달빛이 좋은 밤, 천하절경을 눈앞에 놓아두고...."

    묵비후가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묵비후의 취미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다. 상대가 공포의 대마존 지옥광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상대가 지옥광왕이기에 더욱 더 사귀어 보고 싶었다. 무영문의 활동은 묵비후의 취미를 위한 미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급할 건 없겠지. 사 십 년이나 기다린 일인데... "

    지옥광왕이 낮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묵비후는 미처 들을 수 없었지만.

    " 내 자네가 썩 마음에 드는군. "

    " 하하. 이거 영광입니다. 그렇다고 절 지옥으로 데려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

    묵비후는 지옥광왕의 말투에서 대화를 계속할 의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히 묵비후의 얼굴

    을 환해졌다.

    " 입이 가벼운 게 탈이긴 하지만. "

    묵비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지옥광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것 같지 않게 정겨운 광경을 연출했다. 묵비후가 낮게 투덜거렸다. 물론 청각이 유달리 좋은 지옥광왕에게는 큰 소리로 들릴 정도로.

    " 어쩐지 너무 잘 나간다고 했어. 그렇다고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하고 엉덩이를 차 벌릴 것은 뭐람... 그래도 내가 일문의 문주 아니냐구. "

    딸랑-

    대답 대신 흑색가마 안에서 방울소리가 울렸다.

    순간 얼음으로 깍은 듯한 흑의무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들이 사부를 모시고 난 후 사부께서 타인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삼스레 눈앞에 젊은이를 눈여겨보았다.

    네 명의 흑의무사들은 조심스럽게 가마를 내려놓았다.

    묵비후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흑색가마의 휘장이 서서히 젖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지옥광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인물은 묵비후의 상상을 여지없이 깨부수었다. 그는 그 명호에 걸맞게 팔척 거한(巨漢)의 인상이 험악한 노인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타난 자는...

    도저히 팔십을 넘었다고는 볼 수 없는 이제 갓 마흔을 접어들었을 듯한 청수한 얼굴에 크지도 작지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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