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어]_내_침실에_원시인이_산다_내_정원~외전 - 8

162일전 | 349읽음

몇 없어도 빙계는 여럿 되거든."


"…집안 식구들이요? 그, 부모님께선…."



성무는 가슴을 떨며 물었다. 결혼을 반대할 것임이 틀림없는 부모님. 지금쯤 크게 언성이 오가고 있진 않을까…. 불안과 죄책감으로 심장이 마구 팔딱거린다.



"부모?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아직 살아있지. 여행 중이었는데 내일 온다더군."


"내, 내일요?"


"그래. 아마 아침쯤?"


"아침……."



드디어 주말 저녁 드라마의 시작인가! 어쩌면 막장으로 유명한 평일 아침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성무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땡전 한푼 없는 가난뱅이 사내새끼가 감히 내 아들에게 꼬리를 쳐!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뺨을 맞을 것인가 물을 뒤집어 쓸 것인가. 여긴 외국이니까 와인일지도 모른다. 시계는 풀어서 바지주머니에 넣고 가야지.



"저기… 비페르 씨 부모님과 아는 사이 시랬지요?"



돌아서려던 닥터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만?"


"그, 그… 어머님께서 역시 절… 안 좋게 생각하시지……않을까요?"



닥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글쎄 어떠려나. 일단 웃을 거 같은데. 하지만 호불호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긴장하며 선 성무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겉보기론 리지에의 취향이 아닌데…….



"잘 모르겠군. 외모는 그녀의 눈에 차기 힘들 듯하지만. 알아서 잘 해봐. 어차피 상관없잖아. 아주 밉보이지 않는 이상은."


"그, 그런가요……."



성무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주 밉보이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집안 대가 끊기게 되는데 어느 어머니가 장남의 남자연인을 달가워하겠는가. 당연히 밉보이겠지.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곤 돌아서는 닥터를 다시금 붙잡았다.



"저기-."


"왜? 또."


"비페르 씨, 형제는 있어요?"


"남녀 쌍둥이. 올해 스물이던가? 학기 중이라 집엔 없어."


"그렇군요!"



아, 다행이다. 아들이 하나 더 있었어! 성무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설마 동생도 게이인 건 아니겠지.



"동생이 많이 어리네요."


"나이 차이가 좀 나지. 비페르 놈 하나로 끝내려다가 실수로 가진 애들이니."


"우와, 진짜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야? 더 물어 볼 거 없으면 난 간다. 여기 티비도 있고 컴퓨터도 있으니 그거 가지고 놀아. 필요한 거 있으면 저기 놓인 전화 있잖아, 거기서 맨 오른쪽 위의 버튼 누르면 한국어 할 줄 아는 집사와 연락 돌 거다.



"네, 고맙습니다!"


"……별로."



닥터는 꾸벅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성무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놈한테 이런 녀석이 걸려들다니. 부모와는 정 반대다. 윗 대는 이독제독이었지. 그는 혀를 짧게 차며 방을 나섰다.






닥터의 말대로 비페르는 집안 식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남자와 사귀고 결혼까지 할 예정, 이라는 핵탄두 급 폭격이었지만 의외로 큰 반향은 없었다. 비페르가 후계자는 직계방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아이를 양자로 들일 것, 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시끌시끌 귀 따갑게 떠들어대던 루프스 가 사람들은 이내 얌전해졌다. 속으로 되레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비페르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면 자신의 자식 또는 손주가 가주가 될 가능성은 극히 낮았으니까. 게다가 마음에 드는 아이, 라고 했다. 지금부터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몇몇은 벌써부터 가주의 마음을 홀딱 빼앗은 동양인 남자가 어떤 선물을 좋아할까 고민 중이었다.



"가주의 결정을 꺾을 생각은 없소만 식은 조용히 올리는 편이 좋겠다 싶소."



비페르의 삼촌뻘 되는 중년의 남자가 내 손자 영특함,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그에 동의했다. 비록 동성애에 많이 관대해진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유서 있는 가문의 가주가 사내와 결혼한다는 것이 세간에 좋게 비칠 리 없었다. 비페르는 나직이 대답했다.



"신부가 동의한다면."



비페르로서도 많은 사람 앞에 성무를 내보이기는 싫었다. 혼자 보기도 아깝다. 성질부리고 짜증내는 닥터를 억지로 눌러 앉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놈들에게 보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서류만 관공서에 제출하고 끝내고 싶을 정도다. 아니면 눈 먼 주례사 구해다가 둘이서만 식을 올리거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내용만은 팔불출이라 여러 사람이 웅성거렸다. 우와, 우리 가문 직계에서 팔불출이 나왔어. 기적이다. 대대로 연애세포 소멸종자라고 외치는 사람은 닥터뿐만이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다만 대놓고 떠드는 사람이 얼마 없을 뿐이다.



"그럼 이번에 버스를 대체할 경전철 도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내까지 연결되는…."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적당히 귀에 담으며 비페르는 먼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엉덩이, 잘 있으려나.






" 이 방은 그냥 다 크네, 다 커."



텔리비전을 켠 성무가 투덜거렸다. 컴퓨터도 켜봤지만 온통 영어라 도로 껐다. 그나마 익숙한 윈도우라서 다행이다. 시작과 종료버튼은 위치와 그림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영 볼게 없으면 다시 켜서 윈도우 기본 게임이나 할 생각이었다. 영어라도 플레이하는데 아무 문제없으며 가볍게 시간 때우는데 최강이다. 성무는 리모컨을 들고서 침대에 길게 엎드린 채 턱 아래를 벅벅 긁었다. TV에서 아침 드라마가 곧 시작한다며 떠들어댄다. 여긴 저녁인데. 시차가 열두 시간하고 좀 더 나나보다. 시계가 보였지만 계산하기 귀찮아서 관뒀다.



"흐아아암- 그러고 보니 저녁 먹어야 하려나."



잘 먹고 체력을 보충해둬야 내일 아침 있을 난장판을 견뎌내지. 생각만 해도 몸이 으슬 떨린다. 성무는 닥터가 가르쳐 준 침대 옆 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 약간 어색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어… 저녁밥이요. 아! 혹시 라면 있어요? 봉지라면이요. 컵라면이어도 좋은데."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죄송합니다만 주인님께 여쭈어보겠습니다.]



봉지라면이든 컵라면이든 몸에 좋은 음식은 절대 아니다. 침실에 머무르는 애인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 명령받았기에 집사는 회의 중인 비페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No, 였다. 내 엉덩이에게 불량식품을 먹일 수는 없다. 집사는 다시 성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봉지라면도 컵라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본식 라면은 어떻습니까?]


"…그건 싫어요. 그럼 그냥 밥에다가… 된장찌개 돼요?"


[예, 물론 됩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아, 여우 먹을 고기도 좀 부탁드려요."


[곧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성무는 헤헤 웃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호텔식 룸서비스라는 것인가!



"여기 호텔이었나?"



그는 새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가정집치고는 과하게 화려무쌍하더라. 호텔이었군. 직원도 아주 친절해. 손님을 무려 주인님이라고 부르다니. 성무는 즐겁게 밥을 기다리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사이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했다. 지난편의 끝이 심각했던지 분위기 있는 음악이 깔린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소박한 차림의 역시나 젊은 여자를 날카롭게 노려본다.



[뻔하잖아. XX 씨 돈 보고 달라붙은 거겠지.]



"으…."



가슴이 뜨끔했다. 난 돈보다는 먹을 것…이었지만. 그래도 돈 없어도 괜찮은데! 소박한 차림의 여자가 울먹이며 반박한다.



[아, 아니에요! 전, 정말로, XX 씨를…!]



찰~싹! 나왔다, 싸대기! 성무는 제가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아아, 저 드라마의 정석. 드라마를 거의 보지 못한 성무조차 너무도 잘 알고있는 바로 그것. 물 컵 들이붓기와 함께 양대 산맥이다. 어쩌면 내일있는 바로 그것. 물 컵 들이붓기와 함께 양대 산맥이다. 어쩌면 내일 시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크흑, 역시 드라마 속 여자들은 무서워…."



실제로도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다. 하기야 가끔 아줌마들 싸움 나는 거 보면 장난 아니더라. 아저씨들은 주로 퍽퍽 치는데 아줌마들은 쏘아붙이는 말이 아주…… 맷집에 자신 있는 성무로서는 후자가 더 무서웠다. 맞는 거야 뭐. 한 여자는 울면서 도망쳤고 다른 여자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콧대를 빳빳이 세웠다. 화면이 바뀌며 중년 여자와 승리한 여자가 고급 저택 거실에 마주 앉았다. 대화를 듣기론 저 중년 여자가 XX 씨의 어머니인 듯했다.



"과연, 아까 그 가난한 여자와 부잣집 도련님 XX 씨가 사귀다가 들켰나보군. 그래서 모친이 며느릿감으로 봐둔 집안 좋은 여자에게 가난한 여자를 쫓아내고 XX 씨를 차지하라고 부추긴 건가?"



1화만 봐도 스토리 이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성무는 베개를 꽉 끌어안고 호호호 사이좋게 웃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크윽, 비페르에게도 저런 약혼녀가 있는 게 아닐까! 부잣집이니까. 원래 잘사는 집안끼리는 끼리끼리 약혼하고 결혼한다더라. 성무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어머니만으로도 벅찬데 젊고 기세등등한 부잣집 아가씨라니…… 무섭다.



"…이러다 머리끄덩이 잡히는 거 아닐까."



앞날이 깜깜했다. 저거 봐라 저거 봐. 부잣집 사모님이 가난한 여자의 부모를 협박한다. 가난한 여자의 아버지가 부잣집 건물의 관리인이었던 것이다! 아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여. 그래도 성무는 살짝 안도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이다. 형제도 하나 없으니 가족이 해코지 당할 일은 없겠다. 피붙이가 없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게 될 줄이야.



그때 벨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밥이다! 성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음식을 가지고 들어 온 사람은 전화를 받은 집사가 아닌 젤먼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침실에 닥터와 젤먼 외에는 출입금지령이 내려진 탓이다.



"맛있게 드십시오."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젤먼은 딱딱한 한국어로 인사하곤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성무가 감사의 손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한데 저 할아버지 비페르와 같이 있던 사람 아닌가? 아무래도 배달은 셀프서비스인 모양이었다. 성무는 얼른 텔리비전을 테이블 쪽으로 돌렸다. 리모컨으로도 방향전환이 가능했지만 몰라서 직접 손으로 움직였다. 싱싱한 고기는 꼬리치는 여우에게 내려주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붙잡았다.



[싫어요! 전 XX 씨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가난한 여자가 애절하게 소리친다. 성무는 슬픈 표정으로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그냥 사랑하게 해주지. 돈이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니던가!"



"국물 맛 제대로네. 된장찌개만 시켰는데 밑반찬도 참 많다. 역시 호텔음식인가."



그것도 죄다 비싸 보이는 반찬들이다. 성무는 달걀-실은 오리 알-장조림을 젓가락 끝으로 쿡 찍었다.



"어우, 치사빤스다. 뭐야 저게. 아무튼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고 집안이랑 돈으로 본다니까. 좀 가난해도 착한 여자구만!"



아가씨 심정 저도 아주 잘 알아요. 저도 아주 눈물 나고 무서워 죽겠습니다. 성무는 밥 한 공기를 후다닥 비우고 여분으로 준비 된 두 공기 째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든든하게 잘 먹어야 내일 저 꼴을 무사하게 당하지.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연속극은 부잣집 여자의 저 당신 아이를 가졌어요, 어택으로 끝이 났다. 성무는 젓가락을 공중에 띄운 채 잠시간 멍해졌다. 뭐? 저 XX 새끼 언제 저 여자랑 잔거야?! 방송국은 치사하게 저기서 끊냐!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애라니! 애라니!



"시, 심각하잖아… 알고 보면 비페르 이 자식도 숨겨둔 애 둘 쯤 있는 거 아냐? 무슨 스토리 진행이 저래? 완전 막장이야! 애라니, 애라니……."



성무는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 저러면 XX는 착하고 가난한 여자를 버려야만 한단 말인가! 가난한 여자만 불쌍하게 되었다 XX 이 자식은 사랑하지도 않는 주제에 그건 왜 하냔 말이다! 실수든 뭐든 간에 정말로 애가 생겼으면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그냥 모른 척 하기에는 애는 또 무슨 죄냐고!



"다음 편을 내놔라!!"



성무는 아줌마들이 모일 때마다 왜 드라마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그럴 만 해. 연기일 뿐인데도, 허구일 뿐인데도 왜 배우 욕을 그렇게나 하는지 이해가 간다. 크악! 저 XX 새끼! 저놈 엄마도 나빠! 부잣집 여자도 진짜 못됐고! 그나마 가난한 여자가 착하기는 한데 하는 짓은 또 답답하다. 미래의 시어머니 앞에서 말 한 마디 못하는 거 봐라. 그냥 우리 사랑하니까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그래! 맞서질 못하겠으면 그냥 헤어지던가! 아주 가슴이 답답했다. 성무는 숟가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는 당당히 말할 테다!"



맞을 때 맞더라도, 물 끼얹을 때 끼얹더라고! 어차피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다! 손해 볼 것도 물러 설 곳도 없으니 막나가자! 아자아자 파이팅!



"그런 의미에서 한 공기 더."



성무는 빈 밥그릇을 치우고 여분 2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최악의 경우 밥도 못 얻어먹고 바로 쫓겨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배를 채워둬야지.






비페르의 모친은 유서 깊은 영국 귀족가문의 차녀였다. 때문에 결혼 전, 처녀 적 불렸던 이름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다들 죽은 남편이 부르던 이름, 리지에라고 부르고 있고 그녀도 그걸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였지만 닥터에게는 가끔씩 투덜거리곤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우리 미뇽한테는 처녀 적 이름을 듣고 싶은데."



젤먼에게 떠밀려 억지 마중을 나온 닥터가 짧게 대꾸했다.



"싫어."


"고집은. 자."



서른이 머잖은 장성한 아들을 둔 여자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얼른 에스코트하라며 실크 장갑을 낀 손을 내흔든다. 박한석 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집안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건데. 허나 싫어도 슬퍼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법. 그는 떨떠름하게 리지에의 손을 잡아주었다. 달라붙지 마, 이 유부녀야. 이렇게 젊고 예쁜 유부녀 봤어? 미용술과 성형술의 발달로 요즘엔 널렸더라. 난 천연이거든. 두 사람은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비페르가 홀딱 빠졌다는 그 애, 한국인이라며?"



미래의 한성무 씬 시어머니 되실 분께서 큼직한 에메랄드를 박아넣은 듯한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닥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미뇽만큼 귀여워?"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나도 이제 중년이다. 마흔은 진작 넘었다고!"



어릴 적에야 뭐, 그렇다고 치자. 리지에를 처음 만났던 때엔 아직 십대 후반이었으니. 게다가 리지에는 세 살 연상이었다. 그러니 그때는, 그래도 이십대 까지는, 진짜 많이 봐줘서 서른 초반 까지는 억지로나마 이해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마흔 중반이다. 심지어 리지에는 타고난 동안에 돈을 퍼부어서 스물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닥터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편이긴 했지만 잘해야 서른 중반에 후반정도이니. 이건 뭐 열 살 가까이 어려보이는 여자가 귀엽다 사랑스럽다 하는 꼴이었다.



리지에는 젤먼이 봤다간 뒷목 잡을 만큼 체통 없이 깔깔깔 웃으며 닥터의 어깨를 찰싹 쳤다.



"백 살 노인이 되어도 미뇽은 미뇽이야! 한국에 그런 말도 있잖아?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뜻은 알고 말하는 건지."


"아무튼- 궁금하구나."



귀부인이 요염한 미소를 붉은 입술로 베어 문다.



"미뇽처럼 귀여운 동양인이라면 두 팔 벌려 끌어안아 주지."


"…그러다 모자간에 싸움난다."


"어머, 질투하는 거야 미뇽? 걱정하지 마, 나에겐 미뇽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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