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어]춤추는 해골 - 1

127일전 | 167읽음




춤추는 해골






살이라곤 한 점 없이 비썩 마른 소년이 있었다. 수수개비로 만든 허수아비보다 못한 꼴이었지만 유별나게 말라비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애들보다 약간 더 마르고 작았을 뿐이었다. 그 당시 그 주위 또래 애들은 다 그랬다. 조금 덜하고 더함의 차이가 있었을 뿐 못 먹고 커 다들 작고 메말라있었다. 때문에 소년, 테르의 부모는 자신들의 막내아들이 허약하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해야 형편 좋을 때 유아기를 보내 좀 더 튼튼한 형들보다 일을 덜 시키는 정도였다.


아직 어렸고 또 힘도 없었기에 테르에게 일을 주려는 곳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마른 소년은 저처럼 비썩 마른 땔나무를 주워오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황무지에 가까운 야트막한 뒷동산을 넘어 벌목과 수렵이 금지 된 산엘 올랐다. 풍요로운 산은 영주가 고용한 험악한 산지기들이 매일같이 지키고 서있었지만 조그맣고 허약한 소년까지 막아서지는 않았다. 만약 테르가 좀 더 건강해 눈먼 토끼라도 잡을만해 보였다면 대번에 엉덩이를 걷어차여 내쫓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약해보였다. 품에 끌어안은 나뭇가지들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그는 나름대로 집안에서 밥벌이는 하고 있었다. 주위 산은 온통 주인이 있고 벌목이 금지되어 땔감을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휑한 뒷동산만이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주인 역시 없었다. 그 외의, 조금이라도 돈이 될 만 한 것에는 죄다 어디어디 남작, 어디어디 자작 하며 귀족들의 소유권 표시 팻말이 박혀있었다.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힘 강한 사람이 주장하면 그만인, 그런 시절이었다.


날마다 아침이 되면 멀건 수프가 식탁 위에 올랐다. 수프에 들어 간 재료는 그때그때 달랐다. 부모가 일하는 곳에서 전날 얻어 온 야채에 비축해둔 감자나 옥수수가 조금 들어갔다. 보통은 그랬고 형편이 조금 좋을 때에는 빵이 곁들여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 달에 한 번 쯤 계란을 먹을 수도 있었다. 허나 빈궁이 찾아들면 멀쩡한 먹을거리는 구경하기 힘들어진다. 멀쩡한 옥수수 대신 알을 낱낱이 털어 뼈만 남은 말린 옥수수자루를 가루 내어 물에 풀어 끓였다. 그거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흉년이 들면 생풀을 뜯고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면 집집마다 어린애들이 줄고 남은 애들도 테르처럼 허약해졌다.


요즘은 수프에 건더기가 제법 보이는 시기였다. 때문에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는 테르의 발에도 힘이 붙어있다. 그렇다고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천천히 느리게. 배고픈 아이들은 대부분 행동이 굼떴다. 뱃속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채워져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많이 움직이면 그만큼 더 빨리 배가고파진다. 배가 고프다 해도 해가 지고 가족들이 모두 집에 모일 때까지 뱃속에 무언갈 넣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최대한 힘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신나게 뛰어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간식을 집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산과 들을 차지한 귀족의 자식들뿐이었다. 혹은 그 귀족의 아래에서 더 아랫사람들을 부려먹는 고용인들의 자식 정도였다. 적어도 이 동네에서는 그러했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땅 파는 것뿐인데 땅 한 뙈기 없는 이들이 즐비한 동네에서는.


느릿하게 동산을 넘어 땔나무를 주워가는 것을 봐주는 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땀 한번 훔치고 숨 한번 몰아쉬고 허리를 굽히고 눈을 내렸다. 땔나무를 주우러 오는 아이가 테르 혼자는 아니었기에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는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때문에 이따금 생나무를 꺾다 들켜 쫓겨나는 아이도 있었다. 산지기들 사이의 소문은 빠르기에 그랬다간 다른 산에도 출입을 금지 당하게 된다. 땔나무를 사려면 삼일에 한 번은 굶어야 할 형편이라 절대로 쫓겨 날 수는 없었다. 정직하게 떨어져 마른 가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도 오늘은 수확이 좋았다. 어제 오후에 사냥이 있다며 일찍이 쫓아내더니 몰이꾼들에 의해 부러진 가지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금세 품이 가득 찼다. 세우면 턱까지 오는 큼직한 가지도 하나 주웠다. 품안은 이미 틈이 없었지만 버리고 가기 아까워 그 가지는 허리끈에다 동여맸다. 그리 꼬리마냥 질질 끌면서 산을 내려왔다.


나무는 거의 없이 흙과 돌 뿐인 황무지 동산에 올랐지만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멀었다. 테르는 나무 짐을 내려놓고 큰 가지도 허리에서 풀어 바위에 걸터앉았다. 평소보다 시간이 넉넉했지만 할 일은 없었다. 이럴 때면 그냥 쉬거나 혼자 놀았다. 논다고 해도 장난감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은 구경조차 못해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흙장난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흙이며 돌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땅에다 선을 그어보았다. 일직선으로 쭉 내리그으니 그게 꼭 만날 줍는 나뭇가지 같았다. 그 직선 옆에서 비스듬히 또 선을 긋자 제법 그럴듯해졌다. 나뭇가지에 나무 짐이 나무가 되고 잎이며 꽃도 돋아났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그림이랄만한 것으로 변해가길 수년, 지금은 자리에 앉으면 막대부터 집어 들게 되었다. 그림이 그가 노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습관적으로 나뭇가지를 집어 들려던 테르의 눈에 질질 끌고 온 커다란 가지가 들어왔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펜 대용으로는 너무 큰 그것을 집어 들었다.



‘크게 그려보자.’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시간도 많이 남았고 또 요즘은 먹을 게 넉넉한 편이니까.



“읏차.”



테르는 제 몸뚱이만한 나뭇가지를 들고서 일어났다.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놀이였기에 내키는 대로 선을 그었다.


길쭉한 나뭇가지의 끝이 흙바닥에 턱 박혔다. 잔돌이 조금 있긴 해도 평평하고 너른, 아주 큰 도화지다. 살짝 박힌 끝을 파내듯 빙그르르 돌리고는 주욱 길게 그었다. 선을 그리는 막대를 따라 몸도 함께 걸어간다. 앞으로 뻗어나가기만 하는 듯하다가 위로 각이 진다. 꺾어져 겹치는 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폴짝 넘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비틀비틀 물결치듯 다시 내려왔다. 무언지 모를, 제멋대로 엉겨있던 선들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긴 선은 머리부터 꼬리를 부드럽게 이었다. 위로 각이 져 올라간 것은 날개다. 날개의 깃이 물결치며 다시 몸뚱으로 내려왔다. 커다란 새다. 발은 꼬리 근처를 맴돌다 다리 쪽으로 풀쩍 뛰었다. 선이 늘어날수록 나뭇가지의 움직임도, 그것을 따라가는 발놀림도 정교하고 복잡해졌다. 흡사 나무막대를 상대역으로 한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새가 날개를 활짝 폈다. 그 옆으로 바람이 흐르고 그 뒤로 구름이 흐른다. 막대의 끝은 아래로 내려갔다. 나무와 산과 집과 밭이다. 저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렇겠지, 하고 조그맣게 그렸다. 하지만 새는 그 아래는 보지 않는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제 커다란 두 날개를 믿고 하늘만 바라보며 날아간다.


테르는 싱긋 웃으며 막대를 옆에 내려놓고 다시금 바위에 걸터앉았다.



“행복한 새야.”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간이 제법 지났음을 깨닫고 나무 짐을 안아들었다. 길쭉한 막대는 어찌할까 하다가 큼직한 바위들 틈새로 잘 숨겨두었다. 그리기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 정도 크기의 나뭇가지를 줍기란 힘들 것이다. 불에 태우기는 아까웠다.


다시 한 번 그림을 내려다보고는 언덕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은 널따란 농경지 곁에 작게 달라붙어 있었다. 척박하고 비탈져 쓰지 못하는 땅이었다. 그마저도 매달 임대료를 내야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유민이었지만 농노나 다름없었다. 소작은 농지 관리인에게 줄 뇌물이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 가난한 마을의 사람들은 죽어라 일하고 품삯으로 먹을거리 조금만을 얻을 수 있었다. 불공정한 일이었지만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진 못하였다. 그런 일이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식구들 몽땅 굶어죽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노였을 때도,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똑같이 그렇게 대대로 살아왔다.


노을이 하늘에 손닿기 조금 전, 테르는 나무 짐을 끌어안은 채 집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마을 아래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붉은 헝퀴 밭이다. 염료로 쓰이는 먹지 못하는 작물이다. 가난뱅이들 근처에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 놓으면 밤사이 몰래몰래 훔쳐간다고 일부러 저런 것을 심어 놓았다. 열매가 새빨가니 먹음직해 빈궁기 때는 종종 애들이 그걸 집어먹고 탈이 나기도 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진 마을은 아직 텅 비었다. 아주 어린애들과 그 애들을 돌보는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을 나간 탓이다. 해가 거의 떨어져 일하기 어려울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일터에서 풀려난다. 테르는 자물쇠도 없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다 땔나무를 부려놓고 물통을 집어 들었다. 우물은 비탈 아래에 있다. 힘이 부쳐 두 개는 힘들었기에 하나만 덜렁덜렁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


물을 긷고 물통에 부어 양손으로 끙끙 들고 올라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세 번을 왕복하자 해가 꼴깍 저물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손에 저마다 먹을거리를 들었다. 집을 지키고 동생을 돌보거나 잡일을 하며 기다리던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늘은 유독 무언가 많았다. 테르도 기대에 차 얼른 물을 커다란 항아리에 부어 넣고 마중을 나갔다. 등에 자루를 짊어 진 그의 아버지가 막내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친도 두 형도 모두 손이 찼다. 다들 지친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입가에 미소 같은 것이 어려 있다. 죽은 듯 조용하던 마을이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기쁜 소리를 내지르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테르는 평소와 달리 반쯤 뛰다시피, 활기찬 발걸음으로 앞서 집 문을 열었다.



“수도에서 귀하신 분들이 방문하셨다더라.”



테르의 둘째 형이 말했다. 아버지와 첫째 형은 얻은 대부분의 물건들을 들고 집 뒤쪽으로 나갔다. 잘 숨겨 보관해두려는 것이다. 어머니는 커다란 솥에 물을 끓이며 가지고 온 자루에서 밀가루와 한줌 기름덩이를 꺼냈다. 달걀도 몇 보였다. 테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지고 나간 물건들도 십중팔구 음식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음식은 생전 처음 본다. 테르가 주워 온 나뭇짐을 태우기 좋게 부러뜨리며 둘째 형이 말을 이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수레 두 대가 와서 음식을 나눠줬어. 한 대는 밀가루가 산처럼 쌓여있고, 또 한 대는 온갖 음식이 가득했다. 엄청나더라.”


“우와, 그 왔다는 분들이 준 거야?”


“아마도. 여기 관리인은 썩은 감자 한 알도 아까워하잖아. 이런 일은 나도 난생처음이라고. 나 태어나기 일 년쯤 전에 영주님 아드님이 태어나셨다고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테르는 입을 헤 벌리고 형의 말을 홀린 듯 귀에 담았다. 음식이 산더미만큼 쌓인 수레라니,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나도 보고 싶다….”


“알았으면 너도 데려갔어. 한 사람당 한 자루씩이었거든. 진짜 아깝지 뭐.”


“그러게. 아깝다.”



테르는 의자에 쪼그려 앉은 채 끓고 있는 솥을 바라보았다. 살코기는 없이 기름만 조금 들어갔지만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옥수수나 감자가루가 아닌 밀가루가 한 그릇 넘게 가득 들어갔다. 큼직한 야채가 수프 위를 둥둥 떠다닌다. 빵도 다섯 조각 준비되어 있다. 모친이 불가에다 감자 다섯 개를 통째로 굴려 넣었다. 비쩍 마른 소년의 입속에 절로 군침이 맴돌았다.



“수도에서 만날 왔으면 좋겠다.”



둘째 형 역시 눈을 빛내며 솥과 구워지는 감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예 수도 가서 살고 싶다. 농지 관리인 아들한테 들었는데, 수도에서는 쓰레기통에 살점 남은 뼈다귀가 넘쳐난다더라. 먹을 게 워낙 많아서 다 먹지도 않고 막 버린대!”


“진짜로?”


“거기선 흉년이 들어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다는 걸!”


“대단하다……. 나도 수도 가서 살고 싶어.”


“돈이 있어야 가지. 거기가 얼마나 먼데. 가다가 굶어죽을 걸.”



돈은 굶는 사람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멀고 먼 단어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돈을 벌수는 없었다. 돈이 쥐어지면 도망치기라도 할까봐 서였다. 설사 남은 식량을 팔려 해도 부근의 돈을 쥔 자들은 죄다 한통속이라 10분의 1조차 못되는 가격밖에 쳐주지 않았다.


형제는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눈앞의 먹을거리에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뱃속이 든든하니 발걸음도 힘이 찼다. 테르는 평소보다 일찍, 그리고 빠르게 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땔나무를 두 번 해 올 생각이었다. 사냥 통에 부러진 나뭇가지는 아직 많을 것이다. 그러니 힘이 있을 때 많이 주워놓자. 땔감은 넉넉할수록 좋았다. 겨울을 대비하자면 특히 그랬다. 겨울이 오면 불은 더욱 필요하지만 눈이 내려 땔나무를 구하기는 훨씬 힘들었다. 그러니 눈이 오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이 모아두어야 했다.



“헤헤.”



테르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침에 나온 구운 감자는 아직 따스했다. 건더기 많은 수프만으로도 배가 충분히 찼기에 일하다 허기가 지면 먹으려고 남겨가지고 왔다. 잠시 감자를 만지작거리다가 야트막한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어…?”



발이 우뚝 멈췄다. 언덕 위에 큼직한 짐승이 한 마리 서있었다. 테르는 두려움 섞인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말이다. 하지만 흔히 보던 통통하고 땅딸막한 짐말과는 달랐다. 마치 커다란 수사슴 같았다. 길고 가는 다리에 두 귀 사이부터 엉덩이 끝까지 늘씬하게 뻗어 내리는 선. 달리는 것을, 빠른 속도를 목적으로 브리드 된 말을 본 적 없는 테르는 사슴과 말 사이에서 태어난 짐승이 아닐까, 하고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느라 말 옆에 서있는 소년은 한참 뒤에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읍.”



그는 무심코 소리치려다가 얼른 입을 막고 뒷걸음질 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동네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농지 관리인의 아들도 저런 가죽신은 신지 못했다. 열두 살이지만 제대로 크질 못해 훨씬 작은 테르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잘 먹고 잘 컸지만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혈색의 소년이었다.



“…….”



테르는 입을 막은 그대로 한 발 두 발 슬그머니 물러났다. 수도에서 왔다는 사람들의 아들일까. 아무튼 신분 높은 사람일 것이다. 다행히 소년은 시선을 땅에만 두고 있어서 테르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한참을 물러 선 그는 언덕 아래를 빙그르르 돌아갔다.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먼 거리였지만 신분 높은 소년을 태연하게 지나쳐 갈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조금 더 걷는 편이 나았다. 혹여나 들킬세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멀찍이, 테르는 조심조심 산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처럼 오늘도 여기저기 부러진 잔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금방 품을 가득 채운 테르는 아쉬운 눈으로 더러 남은 나뭇가지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땔나무를 주워가는 것은 허락해주되, 도구는 사용금지였다. 자루라도 하나 가지고 온다면 나뭇가지 뿐 아니라 잘 마른 낙엽들도 가득 짊어지고 갈 수 있을 텐데. 아쉽지만 허락될 리가 없었다. 산지기들의 고용인이 비렁뱅이 아이들이 자루에 뭘 숨겨갈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르는 나뭇짐을 품에 안고서 산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산을 내려가면 얼마 앞이 낮은 언덕이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고민에 빠졌다. 또 빙 돌아갔다간 오늘 내로 두 번 나무를 모으기는 힘들 것이다. 살금살금 언덕으로 다가가 목을 길게 빼어 야트막한 윗부분을 살폈다. 소년의 모습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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